보라카이의 비정치적인 분홍색 하늘 아래서
사람이 만들지 않은 분홍색을 보면 두근거린다.
이 분홍색은 어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서도 독립적이다. 그저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색으로 존재한다. 감히 '분홍색'이라 이름 붙이기도 죄스러울 정도다. 이미 사람이 말하고 상상하는 분홍색에는 온갖 의미가 담긴다. 원초적인 분홍색은 우리가 우리 언어와 사고의 틀로 소환한 분홍색이 지닌 모든 의미를 초월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색'이라는 인간의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사실 우리가 명명하는 모든 것들보다 아주 작은 존재다.
2017년의 나. 연말 2개월 동안 이전까지의 삶과 전혀 달라진 지금의 삶이 서로 많이도 싸웠다. 집 무너진 개미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몸과 마음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소란한 일을 겪었다. 새로 생기는 궂은 일들은 이전의 궂은 일들보다 더 어렵고 무거워지기만 했다.애초에 내게 생긴 삶의 기회를 원망스러워하던 나의 상시적인 절망이 더욱 생생해졌다. 그 상태로 사람들이 21세기 초반의 한 시점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숫자가 또 한 번 바뀌었다.
날짜를 나타내는 숫자가 바뀐다고 저절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이전과 전혀 달라져버린 내 삶을 계속 걱정하고 보호해나갈 것이며 그 안에서 또 여러 가지 깨달음과 노하우를 얻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애초에 내게 생긴 삶의 기회를 원망하고, 그런 나를 사랑해주는 모순적인 과제를 해낼 것이다. 그러다 또 이보다 더 어렵고 무거운 궂은 일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달라진 지금의 삶이 또 어떤 변화로 나를 이끌어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냥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존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시간을 열심히 걷는 일뿐이다. 사람이 원초적인 분홍색을 절대로 만들 수는 없듯이 내가 나의 모든 걸 이해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 모든 좋은 결과와 잘못된 결과가 나에게서 기인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만큼이나 크고 대단하며 중요한 존재가 아니니까. 인생의 어떤 것들은 그저 해가 떴다 지듯이, 때로는 모른척, 때로는 신경 쓸 겨를 없이, 때로는 문득 깨달은 시간의 흐름에 감동하며, 그렇게 흘려보내야 한다.
2017년 12월 26일 오전 6시. 사람이 만들지 않은 예쁘고 비정치적인 분홍색 하늘 아래서 나는 원초적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절망으로 가득차지도 희망에 들뜨지도 않았다. 단지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사건들에 휘둘려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굴지 말자고 어렴풋이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세 번째 보라카이 여행에서 나는 내 인생의 세 번째 장을 맞이한 듯했다. 비로소 스스로의 인생을 자연스럽게 어깨 위에 지고도 꾸준히 걸어나갈 수 있는 고독하고 묵직한 어른의 한 걸음이 시작된 것 같았다.
알고 있다. 또다시 흔들리고 주저앉고 또 일어서는 인생길이 되리라는 것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염없이 속상해지는 순간이 또 올 거란 거란 것을. 하지만 힘을 내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잔뜩 힘을 내서, 올해도 다시금 변화하고 절망하고 사랑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인생이라는 사실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느라 고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