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의 주인공은 부모일까 신랑신부일까?
(첫 문장부터 스포 있음. 주의)
네드 스타크의 목이 잘려나갔을 때, 그를 주인공이라 믿었던 시청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대표적으로 나요..) 그 이후로도 왕겜은 수많은 가짜 주인공을 죽였다. 심지어 그나마 진짜 주인공 같은 인물인 존 스노까지도 죽였다 살렸다. 우리는 그 충격에 짜증을 내면서도 이런 반전을 왕겜의 시그니처로 받아들이며 즐겼다.
왕겜의 마지막 시즌이 공개되는 날 결혼식을 올리게 된 나는, 정작 결혼하는 사람은 별로 즐겁지 않은 이상한 결혼식 문화를 목격하며 다시금 왕겜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충격으로 다가오는 왕겜의 법칙이 국내 결혼식 문화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혼식의 주인공을 총체적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진짜 주인공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혼식은 부모를 위한 날" 결혼을 준비하며 어려운 점을 토로할 때마다 듣는 말이다. 결혼 계획이 없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본 푸념일 것이다. 우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결혼식은 부모를 위한 날이다, 부모님 보시기에 좋은 조건을 앞단과 뒷단에서 전방위적으로 구축해야 하고, 부모의 손님이 품앗이를 하며 그간 부모가 동참했던 품앗이에 보답한다, 라는 것을. 심지어 한국 결혼식에서 부모의 역할은 ‘혼주’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한국의 부모는 자녀 혼사의 주인, 즉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혼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현대의 결혼식에서 부모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결혼 상대와 날짜를 자녀가 결정하고, 결혼식이 어때야 하는지도 자녀들이 결정한다. 웨딩 비즈니스가 설계한 절차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인지, 어디에서 결혼할 것이며 주례를 뺄 건지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할 건지 폐백을 할 건지 등등 결혼의 주요한 형식들도 자녀가 자신의 선호를 주장하고 부모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여기서 자녀들의 착각이 일어난다. 능동적 결정과정이 개입하기 때문에 당연히 “내 결혼식”인데 “부모가 간섭”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혼주들 또한 자신이 결혼식의 주인공임을 까맣게 모른다. 집안의 어른이어서 혼주라는 이름이 붙어있나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애들이 하는 결혼식”에서 부모로서 응당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일만 챙긴다. 가족끼리의 거래가 현대 혼주 역할의 핵심이다.
개중에는 물론 자녀의 결혼 상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자신이 지정한 날짜에 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문에 어떤 보상을 해야 하는지, 결혼식이 어때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강하게 개입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 또한 자신이 혼주, 즉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냥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봐왔고 그게 익숙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부모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정도의 믿음이 빚어내는 결과랄까. 나의 어머니는 심지어 “혼주 드림”이라는 말이 적힌 혼주용 청첩장을 따로 드리자 당황하기도 했다.
또 한가지, 결혼식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는 역할도 아직까지 혼주에게 중요한 역할로 남아있다. 요즘에는 부모 도움 없이 결혼식을 하는 신랑신부도 늘어나는 추세지만, 그럼에도 디폴트는 역시 부모의 지원이라는 값이다. 이 때문에 마을 공동체와 친인척 공동체가 붕괴되었음에도 여전히 품앗이의 의미를 갖는 결혼식은 그동안 혼주가 공들여온 품앗이에 대한 보상의 자리로 기능한다. 하객 동원력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부모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녀에게 물질적 심리적 권력 행사의 도구가 된다.
결국 전통적 의미에서 혼사 주인의 이름과 형식적인 역할, 그 의무감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실제 결혼식의 준비과정은 자녀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현대 한국의 결혼식은 진정한 주인공을 잃는다. 주인공이 나인줄 알았다가 형식상으로는 부모라는 사실에 놀라고, 다시 부모는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럼에도 주인공의 권력을 일부 행사하려 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물론 결혼을 준비하는 자녀가 괴롭기를 바라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가 괴롭기를 바라는 자녀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부모는 30년 전에나 우리의 나이였고, 30년 전 경험과 지금을 비교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리고 그 30년 동안 사회는 압축적으로, 거의 혁명적으로 변한 데 비해, 관습은 변하지 못해 견해 차가 생기는 것뿐이다. 그 때문에 수많은 개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믿는 것들을 놓고 다툼과 협상을 나누는 것뿐이다. 관습이라는 올가미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다.
이제는 사회적 차원에서 그 갈등을 종식시킬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국립국어원이 처가와 시댁 식구 간의 호칭 차이를 조정하고자 하는 공적 제스처를 보인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다. 명절만 되면 언론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명절 증후군, 명절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아젠다로 다소 시끄럽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더 나은 가족 관계를 위해 개개인의 소모적인 갈등을 없앨 수 있는 사회의 노력이란 점에서 중요한 목소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변화에 비해 형식의 전환이 이렇게나 더딘 게 답답해보이기도 하지만, 좋은 시작이다.
게다가 이제 곧 왕좌의 게임도 진정한 주인공이 정해질 텐데, 결혼식의 주인공도 이제는 좀 정해질 만도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