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지면 ‘징징거리는’ 투정처럼 들릴 것 같아 로마(Rome) 여행 에피소드(해당 매거진 ‘내겐 너무 벅찬 로마’ 편 참고) 이후 말을 아꼈지만, 이탈리아가 주는 크고 작은 불편함은 여행 내내 지속되고 있었다.
음식점의 바가지 요금에 대한 경계는 기본이요, 외국인에 대한 배려 없는 이탈리아어 교통 표지판과 각종 티켓 발권기, 구간마다 이용 방식이 다른 도로 통행료 차단기(잦기도 얼마나 잦은가!), 자기애가 강한 이탈리아인의 운전 습관 등등으로 여행의 즐거움만큼 긴장 또한 컸다.
무엇보다 물건을 사러 들어간 가게에서 외국인인 우리와의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어 보이는 이들을 만났을 때는 초대받지 못한 잔치에 불청객이 되어 앉아 있는 것처럼 당황스럽고 씁쓸했다.
차를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중에 도로 가의 어느 휴게소에 들렸을 때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그곳에서 빵과 음료를 사서 저녁을 대체할 생각이었다. 허름한 외관에 비해 깔끔한 인테리어의 가게 진열대에는 마침 보기에도 포슬포슬해서 군침이 도는 크로와상이 몇 개 남아 있었다.
크로와상을 주문하기 위해 빵 진열대 앞에 섰다. 가게 문을 열 때 우리를 맞이한 젊은 여자 직원은 처음부터 계속 이태리어로만 말을 하고 있었기에 영어가 잘 안 통할 것을 대비해, 세계의 공통어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로 쓸 동작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손으로 사고자 하는 빵과 커피 메뉴를 정확히 가리키고, 원하는 개수만큼 손가락으로 표시. 그 다음에 주고 받을 총 가격과 계산은 말이 안 통해도 카드 리더기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직원은 우리가 주문을 하려고 가까이 서서 손을 드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곁으로 오지 않고 하던 일, 옆 진열대 정리만 계속했다. 당황한 우리가 빵 진열대 안의 빵을 가리키며 영어로 ‘빵을 사고 싶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계속 이탈리아어로만 말을 하며 우리를 향해 살 물건을 골라서 계산대로 오라는 듯한 손짓을 보였다.
‘아니, 진열대 안의 빵은 우리가 꺼낼 수 없다고요!’
우리는 다시 한 번 ‘크로와상’ 진열대를 가리키며, 이탈리아에서도 통할 것 같은 “크로와상”을 크게 강조하면서 영어로 ‘크로와상을 사고 싶다’고 말했고, 그녀는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영어로 답한 후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 했다.
왜 그때 우리는 번역기를 쓸 생각을 못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다. 그러나 외모만 봐도 이탈리아어를 못할 외국인인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손님이 손짓을 써가며 그 정도로 의사를 표현하는데도 가까이 와서 상황을 파악할 노력을 하지 않는 가게 직원도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기분 같아서는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고 싶었지만, 저녁 때를 놓쳐 배가 고픈 아이들은 이미 탐스러운 초코 크로와상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도로 위에서 언제 또 가게를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크로와상’을 크게 말하고 손으로 가리키며, 우리가 직접 꺼낼 수 없다는 제스처를 보이자 그제서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빵 진열대로 다가왔다. 탐스러운 크로와상을 향한 군침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미리 생각해 둔 바디랭귀지로 크로와상 4개와 아메리카노 1잔, 물 등을 사서 차로 돌아왔다. 이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 진을 빼게 하는지, 몹시 상한 기분에 따른다면 맛이 없게 느껴져야 더 적절한 전개로 이어졌을 빵과 커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 휴게소 커피까지 맛있다니, 자꾸 진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
피렌체에서는 둘째 아이가 원인 모를 꽃가루 알러지 때문에 눈이 간지러워 계속 눈을 비비고 눈물을 흘렸다. 어린이용 안약을 사기 위해 급하게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번역기로 ‘어린이용 꽃가루 알러지 안약을 사고 싶다’는 이탈리아어 문장을 만들어 약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영어로 답하여 안약을 가지러 뒤 편 공간으로 갔다. 영어가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약사는 ‘Natural’이 괜찮냐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그 약사가 말하는 ‘Natural’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공색소가 섞이지 않은 ‘Natural’인지, 약의 성분이 ‘Natural’인지, 그렇다면 약효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혹시 인공눈물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 등등. ‘Natural’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재차 묻는 우리의 질문에 약사는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제품을 보여주지도 않고(그랬다면 약 상자에 적힌 추가적인 단어들을 검색이라도 해 보았을 텐데), 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뒷짐을 지고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역시나 황당함과 함께 슬 밀려오는 분통에 돌아서서 나오고 싶었지만, 눈이 가려워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에게 당장 무슨 조치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약사가 말한 그 ‘Natural’한 안약을 구입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몰려오는 관광대국 이탈리아는 작은 도로 가의 휴게소도, 길가의 동네약국도 모두 성업 중이라 이탈리아어를 못 알아 듣는 외국인 한 명에게 물건을 팔지 않는 것 쯤이야 영업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애당초 우리에겐 팔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돌아서는 발걸음에 괜스레 이탈리아를 비틀어 바라보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 'Natural'한 안약을 넣고 피렌체 광장에서 잠시 휴식 중인 아이 >
세상에 다시 없을 ‘베네치아’였지만 그 여행을 마칠 때쯤에는 이런 저런 불편함들이 쌓여 조금 많이 지쳐 있었다. 이제야 여행의 3분의 2가 지났다는 것이, 아직도 갈 길이 3분의 1이나 남았다는 사실이 갑갑했다. 이탈리아 남쪽 지방 아말피(Amalfi) 해안의 포지타노(Positano)와 폼페이(Pompeii)로 내려갈 긴 길도 까마득했고, 도로의 글씨들도 까마득했다. 더욱이 눈부신 햇살 아래 청량한 바다빛을 향한 푸른 기대감으로 찾는 포지타노의 기상 예보가 우리가 도착할 즈음부터 흐리고 비. 그 다음 여행지인 옆 동네 폼페이에도 비,비,비. 푸른 기대감이 사라진 이탈리아 남부로 향하는 길은 더욱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일기 예보에 뜬 먹구름처럼 어두운 기분의 우리에게 또 한 번 불운이 닥쳐왔다.
“이게 뭐야. 호텔이 문을 닫는다고? 멀쩡하게 예약 다 받아 놓고? 허, 하다하다 이제는 호텔까지 이러네.”
베네치아(Venezia)에서 포지타노로 가는 길은 차로 쉬지 않고 달려서 8~9시간이 걸릴 정도로 꽤 멀다. 어른들만의 여행이었다면 눈 한번 꾹 감고 하루만에 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중간의 적당한 위치에서 하루 머물렀다 가기로 했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별다른 정보 없이 거리와 위치만 보고 정한 숙소는 이탈리아 중부 지방 토스카나(Toscana)주 남쪽 끝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있었다. 토스카나주가 원래 와인 농장으로 유명하지만, 와인 농장이 몰려 있는 주요 관광지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는 한적한 지역. 그 지역에도 작은 와인 농장이 곳곳에 있다고 하니, 시간이 맞으면 숙소가 있는 마을의 와인 농장을 방문해 볼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나 인기 있는 호텔도 아니라 별다른 문제 없이 가볍게 쉬었다 갈 수 있지 않을까. 별 기대도 없었으니 하루 잠만 잘 수 있다면 아무 것도 보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동네 맛집을 경험하고 싶다는 소박한 욕구 조차 생기지 않아, 저녁 식사마저 호텔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프 보드(Half Board)’로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이 호텔 예약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숙박할 날을 이틀 앞두고 호텔에서 메일이 왔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하필 우리가 예약한 날짜에 임시 휴업을 하게 되었으니 같은 사업자가 운영하는 다른 호텔로 바꾸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하프 보드’로 신청한 저녁 식사 역시 다른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대체될 예정인데, 새 숙소에서 차로 15분 가량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조율해 주겠다고 했다. 물론 호텔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 예약을 아예 취소할 수도 있었다.
호텔측에서도 나름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밀려오는 짜증을 무마시키지는 못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사진으로나마 보기라도 했지, 대체될 숙소의 컨디션이 어떨지 알 길도 없을 뿐더러 숙소에서 밖으로 이동하기 귀찮아서 신청한 하프 보드인데 굳이 차를 타고 15분이나 달려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니. 그것도 음식이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지정된 식당에서. 그래서 취소를 한다면? 임박한 날짜에 적당한 호텔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하루 쉬어 가기만 하면 되는 중간 지점의 숙소였는데, 갑자기 숙제처럼 다가오는 결정의 순간이 부담스러웠다. 그리스로마의 신들이시여, 왜 이런 공을 우리에게 던지나이까.
“에고, 뭐 애초에 크게 기대한 숙소도 아닌데. 그냥 대체해 주는 숙소에 간다고 하자.”
뭘 해도 되는 일이 없어 피폐해진 주인공이 도망치듯 현실을 도피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숨어든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끝내 다시 일어설 희망과 웃음을 찾는다는 동화 같은 로맨틱 영화들이 있다. 저런 건 영화니까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쯤은 내게도 그런 꿈 같은 ‘어느 멋진 날’이 찾아오길 꿈꾸게 하는 영화. 그런 로맨틱한 영화의 배경이 될 것 같은 곳에 우리의 새 호텔이 있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꾸역꾸역 따라 들어가니 오래되었지만 정성스럽게 관리되어 오히려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풍기는 호텔이 우리를 맞이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자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직은 나뭇가지일 뿐이지만 포도나무가 정갈하게 열을 맞춰 서 있는 작은 포도 밭. 그 포도 밭 너머로 넓은 들판과 마을이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여 펼쳐졌다.
< '세상에, 세상에...' 를 계속 읊조리게 했던 마을 풍경 >
포도 밭 옆 닭장에는 닭이 여러 마리, 그 옆에는 누런 소도 한 마리. 마침 노을이 지는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더욱 달콤하게 채웠다. 아, 주차장 차양에 조롱조롱 열린 보라색 등꽃 향기인지도 모르겠다. 초록 나무가 길게 줄지어 만드는 산책로에는 다정한 부부가 느긋한 걸음으로 노을을 향해 길을 나섰다.
파란 하늘에 번지는 분홍색 금빛 노을, 싱그럽고 맑은 공기, 호텔 앞뜰을 가득 채운 초록색 내음, 제 각각의 색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갖가지 봄꽃들과 맑은 종소리 같은 새소리. 이 모든 것을 배경처럼 품고 있는 전원의 풍경이 아무리 보고 있어도 현실 같지가 않아서, 어쩌면 이곳으로 나 있던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 신비로운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힘을 빌어 내가 정말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 온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에서는 내가 주인공일까 하는 기분 좋은 공상이 펼쳐졌다.
< 봐도 봐도 비현실적인 눈 앞의 현실 >
마을에서 제일 근사한 청년과 얽히는 사건은 바리지도 않았다. 이미 내 곁엔 내가 여행가고 싶은 곳만 말하면 알아서 여행 계획을 세우고 가이드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는 듬직한 남편과 토끼 같은 두 아이(그 순간에 두 아이는 실제로 토끼처럼 온 호텔 정원을 뛰어 다니며 장거리 이동의 여독을 풀고 있었다.)가 있으니 이젠 그의 청혼을 받아 줄 수도 없는 것을.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이 마을에서 제일 근사한 청년’과 마주친다면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을 추천해 달라 부탁해 볼까. 제일 근사한 그도 나의 영화에서는 ‘마을 청년A’ 일 뿐, 영화는 그림 같은 이곳에 앉아 달콤한 와인 한 병을 나누는 13년차 부부의 이야기로 넘어갈 것이다. 러닝 타임(Running Time)이 허락한다면 근사한 그가 만들어갈 드라마 같은 사랑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을 빌어 소문처럼 들려오겠지.
< 로맨틱한 상상을 더욱 몽글하게 만드는 금빛 노을 >
노을 지는 하늘 아래서 넋을 잃고 상상의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있을 때,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직원이 다가와 우리가 묵을 방을 안내해 주겠다며 우리의 캐리어를 끌고 앞서 걸었다.
< 우리가 지낸 '엄청난' 숙소의 이곳 저곳 >
방의 컨디션을 사진으로 확인하지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방이었다. 세월에 닳아 매끈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도 영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공주풍의 실크 드레스 보다는, 조금 더 단정한고 실용적인 모슬린 원피스를 입은 주인공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단아한 일상을 만들어 갔을 것 같은 분위기의 거실과 그 보다 어린 소녀가 윈도시트에 앉아 달콤한 꿈을 꾸었을 것 같은 침실. 뒤뜰을 향해 난 테라스 문은 아무 이유 없이 한 번 열어 보고 싶을 만큼 감성이 묻어 있었다.
이런 운치 있는 방에서 쉬어 가는 하룻밤이라니. 처음 예약 변경 메일을 받았을 때의 짜증은 어느새 선물 같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도착한 레스토랑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아니, 기대를 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런 멋진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꽤 좁고 가파른 고지대 마을의 작은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을도 거의 사라지는 밤이라 어두침침했지만 광장의 난간 너머로 엄청난 장관이 펼쳐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주 커다란 전문가용 카메라로 그 풍경을 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은 마을의 광장이 보여주는 풍경을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 하프 보드를 대신해 찾아간 레스토랑 앞 풍경 >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지금껏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와 말투를 가진 직원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하고 메뉴를 가져다 주었다. 호텔에서 약속한 ‘하프 보드’를 제공하지 못하는 대신 자기네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 중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다고 했다.
너무 후한 조건에 놀란 우리는 정말 아무 제한 사항이 없냐고 물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친절하게, 금액도 개수도 제한 없이 다 주문 가능하다고 했다. 심지어 와인까지 병째로 모두 다. 우리가 ‘하프 보드’를 신청하면서 숙박비에 더해 추가로 낸 돈은 고작 30유로 였다. 그것도 4인 가족 전부 합해서. 이 정도면 ‘하프 보드’가 아니라 ‘축복’이 아닌가.
우리는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만드는 것들을 중심으로 스타터 두 개와 메인 요리 네 개, 그리고 지역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다는 조건에 비해 소박한 주문량이지만, 어른 둘에 아이 둘이었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더 많은 음식을 주문해서 맛을 본 뒤 남길 수도 있겠지만,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난 다정한 선의에 그런 화답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 스타터 : 치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엇 >
< 메인 요리 네 가지 >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이름만 보고 주문한 지역 특색이 살아 있는 요리가 언뜻 내 스타일이 아닌 듯이 보이기도 했다. 육류의 냄새나 독특한 향신료 향에 예민한 편인 나는 너무 새로운 요리는 잘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다. 과거의 도전이 그리 좋은 결과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분 좋은 다정함은 기꺼이 처음 보는 음식들을 먹어보게 만들었고, 진짜 맛이 좋았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인지, 정말 맛있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함께 곁들인 화이트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셔도 두통이 찾아오지 않는(보통은 한 잔에서 조금만 더 마셔도 두통이 온다.), 완벽하게 축복 받은 밤이었다.
< 다정한 직원이 추천해 준 달콤한 지역 와인 >
다음 날, 상쾌한 아침 산책 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먹은 조식마저 완벽했던 호텔을 뒤로 하고 떠나는 마음이 무척 아쉬웠다. 처음 여행 계획을 짤 때만해도 베네치아에서 포지타노 사이의 너무 긴 이동 때문에 의미 없는 지역에서 하루를 써야 하는 것이 몹시도 아깝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아까울 줄 알았던 이탈리아 여행이 이렇게 길고 힘들 줄 몰랐던 것처럼 단지 하루 쉬어 가려 했던 이 마을이 이렇게 소중해질 줄 몰랐다.
“나 사실 어젯밤에 좀 잠이 안 왔어. 그리고 체크 아웃을 다 마칠 때까지도 좀 긴장했어.”
“왜???”
이 완벽한 숙소에 대한 남편의 뜬금 없는 불안 증세에 놀란 내가 되물었다.
“우리한테 왜 이렇게 잘 해 줄까. 이렇게 해 주고 나중에 뭘 내놓으라고 하려고 이러나. 무섭기까지 하더라. 이탈리아에 와서 지금까지 맞은 뒤통수가 몇 번인데, 여기도 그런 건 아닐까 걱정했지.”
남편의 대답에 폭소를 터트렸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이탈리아라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남편의 밤을 지새운 걱정이 무색하게 이 아름다운 호텔은 우리에게 어떠한 추가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고, 주차장까지 짐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연거푸 전하며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 아니 유종의 다정함을 보여주었다. 비싼 호텔에서는 당연한 서비스일지 몰라도 이런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어색한 웃음으로 촌스럽게 손사레를 치며 무거운 가방을 직접 끌고 호텔을 나섰다.
“어제 잠이 안 와서 찾아 봤는데, 이 지역이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선 조용하게 쉬어 가는 여행지로 꽤 유명한가봐. 어떤 한국 사람은 이탈리아 현지인한테 추천 받아서 여길 여행했다고 적어 봤더라. 게다가 우리가 지낸 호텔이 우리 돈 주고는 못 올 꽤 비싼 호텔이었어. 와,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남편의 말처럼 우리는 행운이나 요행과는 별 인연이 없는, 오히려 불운이나 ‘엎친 데 덮치는’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불운 중 하나라고 생각한 어긋남이 선물이 되어 돌아온 하루였다. 덕분에 그동안 불만이 쌓여갔던 이탈리아에 대한 기억의 색깔과 온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2주간의 긴 이탈리아 여행은 나에게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보낸 하루로 남게 되지 않을까.
다시 포지타노를 향해 출발하며 길가의 표지판에 적힌 마을 이름을 나지막이 소리 내어 외웠다. 우리에게 영화 같은 ‘어느 멋진 날’을 선사해 준 이 곳의 이름은, ‘코르토나(Cortona)’였다.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코르토나 -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선물, '어느 멋진 날’ 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