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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Jun 18. 2022

[이탈리아 여행] 나의 우울한 포지타노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Amalfi) 해안 도로를 달려 '포지타노(Positano)'로 향하는 길의 날씨는 썩 괜찮았다. 오후 3시 반 무렵의 태양은 눈 부셨고, 얇은 탈지면을 살포시 당겨 펼쳐 놓은 듯한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은 여행자의 설렘처럼 몽실몽실 가볍고 부드러웠다.


< '돌아오라, 소렌토'의 그 소렌토 앞 바다 >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 너머 그 유명한 ‘소렌토(Sorento)’ 마을이 보일 때는 잠시 차에서 내려 소렌토의 전경을 바라보며 오래전 음악시간에 배운 추억의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노래를 흥얼거려 보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그토록 간절하게 돌아오기를 고대하였나 보다. 꿈결 같은 목소리로 부르던 그 ‘소렌토’ 앞에 내가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도로 표지판에서 만난 ‘나폴리(Napoli)’와 ‘폼페이(Pompei)’ 역시 실감나지 않았다. 포지타노 이후 곧 그 도시들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은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로마나 피렌체 같은 유명한 대도시들을 직접 방문하는 일도 엄청난 것이지만 이탈리아 남부 해안의 도시는 훨씬 아득하고 먼 느낌으로 다가왔다. 향수와 그리움 같은.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 도시들이 가진 운명적인 메타포라고 할까. 어쩌면 바다를 품고 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곳에 발 디딜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조자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었다. 억지로 휴가를 짜낸 해외여행에서는 아무래도 지방 도시들은 후순위로 밀려나기가 쉽다. 진심으로 올 수 있으리라고 꿈도 꿔 보지 않았던 도시들을 지척에 두고, 아낌 없이 여행을 다니고 있는 지금 우리의 유한한 해외생활이 다시금 꿈처럼 느껴졌다.


  “해 지기 전에 빨리 포지타노 도착해서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야지. 시간이 없다. 다시 출발!”


  남편이 포지타노를 향한 걸음을 재촉했다. 꿈 같은 이탈리아 동쪽 남부 해안,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런 타이틀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에 선정된 아말피 해안 도로, 그 중에서도 아름다움의 절정이라는 포지타노를 비추는 오늘 오후의 ‘맑음’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포지타노로 가야 했다. 소렌토 너머로 보이는 바다 끝에서 조금씩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가자, 포지타노와 아말피를 향해! >


  포지타노로 들어가는 길은 꽤 구불구불하고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막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곡선 하나를 타고 넘을 때마다 기암절벽이나 푸른 바다를 향한 감탄의 환성을 지르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포지타노에 도착했다.


< 해안 도로를 타고 포지타노로 들어가는 길, 바다와 절벽이 함께 만든 절경이 일품이다. >






  포지타노는 이탈리아 남쪽 캄파니아주(Regione Campania) 살레르노도(Provincia di Salerno)에 위치한 작은 해안 도시로, 예전에는 항구였으나 지금은 항구 도시 보다는 휴양지에 가까운 어여쁜 도시이다. 푸른 지중해 바다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가파른 절벽을 따라 한층 한층 쌓아 올린 집들이 만드는 절경이 포지타노의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하겠다. 물론 아말피 해안 도로(소렌토에서부터 아말피 사이의 해안 도로)에는 포지타노와 비슷한 모습의 작은 마을들이 많이 있고, 어쩌면 포지타노 보다 더 유명하고 중요한 마을은 ‘아말피 해안 도로’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아말피’ 일지 모른다. 그러나 해안도로를 직접 달려 내 눈으로 확인한 바로는, 많은 크고 작은 해안 마을들 중 아름답기로는 포지타노가 단연 으뜸이다.

  아름다운 풍경 만큼이나 포지타노에는 아름답고 비싼 숙소가 많다. '유한한 영국 생활자'로써 매달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이기에, 지속가능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여행지의 숙소는 가능하면 관광지 중심에선 좀 멀더라도 깨끗하고 저렴한 곳으로 예약을 하는 편인데, 포지타노에서만큼은 우리도 조금 욕심을 내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근사한, 꽤 괜찮은 호텔을 예약했다.


< '맑은 날' 우리가 머문 방에서 볼 수 있다는 포지타노의 숙소 사진 (출처 : booking.com) >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사진으로 본 그대로, 우리가 머물 숙소는 포지타노의 바다를 담은 파랑과 포지타노의 특산물 레몬을 담은 노랑으로 장식된 깔끔하고 감각적인 방이었다. 테라스 너머로 바다도 넓게 펼쳐지고, 그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한 잔, 혹은 와인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야외 테이블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 호텔 홈페이지의 사진처럼 감각적이던 우리의 실제 숙소 내부 사진 >


   문제는 이 모든 것의 핵심인 바다 풍경이었다. 포지타노로 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점점 구름이 몰려들어 소렌토에서 보았던 하늘의 파란 색이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전부터 예고된 아말피 해안의 흐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국의 일기예보처럼 제발 수시로 바뀌길, 혹은 예보로만 흐릴 뿐 실제 날씨는 아름답길 얼마나 빌었는가! 그러나 이탈리아의 날씨는 그간 우리가 겪은 이탈리아와 달리 우직함이 있었다.


< 문제의 바다 전망 >
< 안타까움이 사무치는 뒷모습이다. >


  뿌연 그레이(Grey)가 감도는 우울한 블루(Blue).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었다. 또 바다의 색이었다. 처음 마주한 우리의 포지타노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대자연의 하나되는 어우러짐과 조화의 지혜를 굳이 포지타노 바다에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탈리아로 여행 오기 전, 매일 보던 영국의 회색 하늘을 연상시키는 포지타노의 ‘바다 전망’ 테라스 풍경을 보며 ‘허허’ 실소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다 전망’을 고집했던가. 바다 전망이 없는 대신 더 합리적인 가격과 조건을 제시하며 우리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던, 결국 바다 전망에 밀려 탈락한 다른 숙소들이 아쉽게 떠올랐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뭐. 비 떨어지기 전에 나가서 얼른 한 바퀴 돌아보자.”


  테라스에 서서 망연자실하게 하늘인지 혹은 바다인지를 바라보는 등 뒤로 동네 산책을 제안하는 남편의 말이 들려 왔다. 그래, 오늘 밤부터 점점 더 흐려질 예정이라고 했지. 지금 보는 이 풍경이 최악이 아니라는 것이 슬플 뿐이었다.





  몰려 든 구름이 태양의 조명 효과를 가려도 포지타노는 정말 구석구석 어여쁜 마을이었다. 일부러 멋을 낸 상점이나 레스토랑이 아닌, 일반 가정집 현관문 옆에 붙어 있는 번지 표시에도 바다의 감성이 담겨 있었다.


< 포지타노 거리의 예쁜 문과 더 예쁜 문패 >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게 난 골목은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녀들처럼 은밀하고 친근하게 어여뻤고, 아무리 몰래 숨겨도 숨겨지지 않고 터져 나오는 간지러운 웃음 같은 바다가 골목의 끝에서 찰랑이며 눈길을 끌었다.


< 소녀들의 웃음처럼 비밀스럽고 친근한 골목과 그 너머의 바다 >


  상점과 음식점 들이 모여 있는 중심 거리는 보다 다채롭고 화려했다. 사실 대도시에서 떨어진 작은 바닷가 마을이라고 해서 소박하고, 조금은 투박하지만 오래된 애정과 정성스러움이 만들어 내는 정겨운 예쁨을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바다의 감성을 담은 장신구와 그릇, 기념품 등을 파는 소품 가게, 포지타노를 그린 감각적인 아트 갤러리, 휴양지에서 입으면 잘 어울릴 예쁜 원피스들이 진열된 옷 가게,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야외 테이블과 루프탑 레스토랑, 클럽 음악이 흐르는 바 등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포지타노는 마을 전체가 예쁘게 지어 둔 스튜디오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래, 포지타노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 아니라 예쁜 ‘휴양지’였다.


< 휴양지의 화려함과 여유, 즐거움이 있는 포지타노 중심 거리 >



  중심 거리를 지나 오르막 길을 오르니 숙소 직원이 추천해 준 ‘사진 스팟(Spot)’이 나왔다. 포지타노 마을 전경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 먹구름이 더 몰려 오기 전에 서둘러 마을 산책을 나선 이날의 목적지였다(사실 포지타노 전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유람선을 타고 나간 바다 위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흐린 날의 우리에겐 유람선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오르는 집들이 포지타노의 매력이다. >


  바다 가까운 땅에서부터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오르듯 산 위쪽을 향해 뻗어 오른 집들이 계단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다. 서로 줄을 맞추지도, 색을 맞추지도 않은 집들은 분명 장대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닌, 살아가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정착민이 그때마다 하나씩 쌓아 올린 처절한 생의 흔적이자 개인의 역사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포지타노의 집들은 각자 자기만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각각의 개성 강한 표정과 역사 들이 어우러져 만든 전체로써의 포지타노는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고, 위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 포지타노의 '안식' 같은 야경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어느 새 날이 완전히 지고, 등불을 켠 집들이 까만 포지타노를 밝혔다. 각자의 표정이 훤하게 들어 나던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낮의 집들이 바다를 향해 앉아 언제든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생기’가 있었다면, 밤의 집들은 해 저문 저녁 바다라는 업(業)의 무대에서 돌아와 산에 등을 기대고 따뜻한 불빛 아래서 쉬어 가는 ‘안식’ 같은 모습이었다.

  바뀐 세상과 바뀐 포지타노에 이제는 바다를 업으로 삼아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겠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운명의 사람들이 바다를 품지 않을 수 있을까. 포지타노의 밤은 여전히, 매일 바다라는 넓은 무대를 향해 나아가는 꿈을 꿀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구름은 여전히 바다 위에 머물러 있었다. 숙소 테라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바다색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으나, 어제 동네 산책을 할 때 보았던 소녀들의 비밀 이야기 같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 골목 사이로 찰랑이던 간지러운 웃음 같은 바다는 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바닷가 마을에 왔으면 바다는 한 번 보고 가야하지 않을까.

  담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해안 골목을 지나, 작은 아치 지붕길을 지나, 적갈색 벽이 예쁜 계단과 살짝 칠이 벗겨져 더욱 정감 있는 노란색 벽을 따라 난 계단을 내려가면 바다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 숙소게서 바다로 내려가는 골목 >



  포지타노의 해안 자체는 작았다. 모래가 아주 곱지도 않았다. 해변만 본다면 우리 나라의 해운대나 경포대가 훨씬 넓고 멋있고, 모래사장도 훌륭했다. 그럼에도 포지타노가 포지타노인 이유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그 태양빛이 바다 속을 헤엄치며 만들어내는 오묘한 바다색일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먹구름이 자욱한 무심한 하늘.


< 태양을 잃어 어두운 포지타노의 바다 >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흐린 바다에서도 즐거운 사람들이 꽤 많았다. 온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강풍에도 해변에 돗자리까지 깔고 누워 ‘해풍(風)욕(?)’을 즐기는 사람들. 심지어 수영복을 입고 파도를 쫓아 바다로 뛰어 들었다가 다시 밀려오는 파도에 줄행랑을 치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런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들도 있었다.


< 이런 날씨, 이런 바다에서도 유럽 사람들은 바다를 즐겼다. >

  

  우리도 바닷물 가까이로 다가갔다. 입자가 굵은 (자갈에 가까운) 모래 덕분에 신발이 모래 속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을 적당히 바라보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굳이 물에 발을 담글 마음까지는 더더욱 없었는데, 그만 큰 파도가 내 신발 바로 앞까지 밀려와 신발 위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도망칠 새도 없었다.


  “와하하하하, 엄마 신발 다 젖었어~~~~~ 꺄악!!!!!!”


  엄마에게 일어난 작은 사고에 아이들은 무척 신이 났다. 그렇다면,


  “우리 신발이랑 양말 벗고 바닷물에 발 담가 보자!!”

  

  말이 떨어지자 마자 아이들이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졌다. 남편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재미를 몰라 아이들의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 선호도 조사에서 항상 후순위인 남편이었다.


< 신발이 젖은 김에 바닷물에 담가 보는 발 >


  바닷물은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다. 파도는 훨씬 거칠었다. 그렇지만 더 큰 난관은 모래알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뾰족하고 아프다는 것이었다.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나마 견딜 만 했는데, 파도가 갑자기 높아질 때 뒤로 빠르게 내빼려면 발바닥에 모래알이 박힐 것만 같았다.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파도는 더욱 높아졌고, 이러다 여행 중에 피를 볼 수도 있겠다 싶어 바닷물에서는 일단 철수. 튀어나온 아이들의 입은 포지타노의 특산물 ‘레몬사탕’으로 달랬다.


< 포지타노와 아말피의 명물, 레몬사탕. 가운데 레몬즙이 상큼하다. >


  노랗고 새콤달콤한 사탕을 입에 하나 씩 물고 모래 사장에 앉아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해변의 자갈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동안, 나는 바다를 조금 더 담았다.



  팔 한 폭 정도의 청량한 밝은 바다색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뒤에서 넘실거렸다. 무엇 때문에 그 부분만 유난히 밝은 것인지 이유는 몰랐지만, 그 한정된 색에 기대어 맑은 날의 포지타노 바다를 상상을 해 보았다. 역시 역부족. 지중해 바다를 제대로 본 적 없고, 상상력도 부족한 내가 짐작으로 그려낼 풍경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포지타노의 바다는 우울한 암색 바다 끝 한 폭의 청량감,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다들 찬양하고, 또 우리 역시 몹시 기대했던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는 아니었지만 바다에서 눈을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그날의 바다는 해 저문 저녁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당장이라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의 얼굴 같았다. 거센 바람을 타고 더욱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는 속에 있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해 터져 나오는 탄식처럼 들렸다.


  ‘늘 눈부신 사람에게도 사실은 이런 날이 있는 거지. 늘 눈 부셨기에 지금의 슬픔이 더욱 짙을까. 오늘 우리가 마주 앉아 있던 이 시간이 조금이나마 너에게 위로가 되기를. 나는 너를, 남들이 하는 말과는 다르게, 조금 슬프고, 애잔한 모습으로 기억할 테니.’


  기대와 다른 바다의 아쉬움을 암색 바다를 향한 위로로 대신하며, 옷과 발에 남은 자갈을 털고 해변을 떠났다.   





  포지타노의 오후에는 할 것이 없었다. 바다는 이미 다녀 왔고, 거기서는 나른한 오후의 해수욕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고, 길가 상점의 눈길을 사로 잡는 옷들은 내가 얻을 효용대비 너무 비싸 쇼핑을 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야외 테이블에서 분위기 있게 술을 한 잔 할 수도 없었고, 그 분위기에 배경으로 펼쳐 둘 바다도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상태.


  “버스 타고 아말피에 가볼까?”


  원래는 포지타노를 본 뒤에, 차를 운전해서 아말피와 소렌토를 둘러 보고 둘 중 한 곳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또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를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급커브의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은 조금 위험해 보여, 포지타노에만 머물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남을 줄이야. 게다가 이 해안도로의 이름이 ‘아말피 해안’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 중심이 된 도시를 가 보지 않는 것도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더욱이 이 해안도로의 진짜 절경은 포지타노에서 아말피 사이 구간이라고도 했다.


  “그래,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아말피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고 오자!”


  그리하여 우리는 아말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듣던 대로 포지타노에서 아말피로 가는 길은 정말 어마어마 했다. 경치가 아니라 그 스릴감이!

  바다 풍경은 오전에 포지타노에서 본 바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구름과 해무와 바다가 한 데 어우러진 서늘한 암색 풍경.


< 포지타노에서 아말피로 가는 해안 도로에서 바라본 바다 >


  하지만 만약 그날의 풍경이 눈 부셨더라도, 포지타노와 아말피 구간의 신스틸러는 아말피행 버스 기사의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이 아닐었을까.

  포지타노에서 아말피로 가는 길은 이곳으로 오는 첫날 소렌토에서 포지타노로 온 길과는 비교도 안 되게 급커브의 좁은 길이었다. 거의 270도를 꺾어 돌아가는 절벽 위의 해안도로. 우리는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바다 쪽의 좌석에 앉았는데, 도로와 절벽 난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 마치 벼랑 끝을 달리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 아말피로 가는 길.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한 질주가 이어진다. >
< 버스 창문으로 아래를 바라보면 벼랑 끝을 달리는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


  절벽 위의 좁은 도로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이 되는데, 매일 이 길을 달려 이골이 났을 버스기사는 여기에 거침 없는 질주를 더해 스릴감을 고조시켰다. 심지어 다가오는 급커브에서도 속도를 잘 줄이지 않아 차 안의 승객들은 그때 마다 이리저리 쏠렸고, 나는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를 타고 있는 듯 오금이 저려 앞 좌석 등받이를 꼭 붙들었다. 아니, 놀이동산의 롤러 코스터는 안전장치라도 있지, 아말피 해안의 버스에는 안전벨트가 고장 난 좌석도 여럿이고, 버스 아래로 보이는 ‘아찔함’은 ‘놀이’가 아니라 ‘실제’이다. 이것이야 말로 롤러 코스터 중의 롤러 코스터, 우리는 이를 ‘아말피 코스터’라 부르기로 했다.


<  '아말피 코스터'의 주인공, 아말피 해안 도로 위의 버스 >


  아찔한 곡예 끝에 버스가 무사히 아말피에 도착했다. 아말피의 첫 인상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포지타노와 비슷할 것이란 기대로 찾은 아말피는 어여쁘게 꾸민 옆 동네 포지타노에 비해 낡고, 거칠고, 비렸다.


< 예쁜 포지타노에 비해 거칠고 비릿한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던 아말피 항구 >


  유람선과 요트가 주로 보였던 포지타노 바다와 달리 아말피의 항구에는 생활의 흔적이 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흐린 하늘과 거친 파도 때문에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항구에 정박된 투박한 어선에서는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항구 주변의 음식점이나 카페, 상점 들에서도 예쁨이라거나 세련됨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항구에서 마을 안쪽 중심 거리로 향하는 길 역시 아말피 항구의 첫인상처럼 거칠기는 매한가지, 색이 바래고 금이 간 벽에서 당장 시급하지 않은 저런 곳까지 손을 쓸 여유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바쁜 나날이 전해졌다.

  아말피 중심 거리 포지타노 보다 조금 더 넓고 부산했는데, 대개 멋 보다는 실용성에 더 중점을 둔 듯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포지타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물건을 파는 기념품 가게 마저도 효율적이고 집약적인 진열로 감성 보다는 실질적 효용에 더 무게를 실은 듯했다.


< 아말피 중심 거리 >


  그래서 아말피에 실망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포지타노와 아말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시였다. '포지타노'가 화려하고 찬란한 휴양지라면 '아말피'는 투박하고 억척스러운 삶이 묻어나는 생활 터전이었다. 모든 것을 다 챙기는 대신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자리에 두고,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만큼만 손질해야 생활에 함몰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을 붙들어 내일을 다시 살아갈 여유를 얻을 수 있는, 흔한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 예쁘게 치장하기만은 할 수 없는 곳에 와서 너는 왜 더 어여쁘게 꾸미지 않았느냐고 실망을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투박하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아말피의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본 뒤, 약속 대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고, 포지타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아말피 항구로 돌아왔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다시 진해졌다. 그 너머로 비루한 생활의 냄새도 나는 듯했다. 오늘 하루를 견뎌낸 비루함,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의 고됨을 술 한 잔과 노래 한 자락으로 씻어내야 하는 숙명 같은 비루함. 생활이 가득한 항구 도시의 비릿함과 비루함을 누가 타박할 수 있을까.


< 아말피 거리에서 사람들이 먹고 있기에 우리도 먹어본 레몬 샤베트 >


  버스가 출발했다. 고된 하루 끝에 입 안을 적시는 단내 같은 아말피와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포지타노로 돌아가는 버스는 아말피로 올 때 보다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양방향 차선 중 아말피로 올 때는 절벽 쪽 차선으로 붙어서 달렸는데, 그러니 반대로 포지타노로 돌아갈 때는 안쪽 차선으로 달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봐야 길이 넓지도 않아 어차피 절벽 해안 도로인데도 그 조금의 차이가 버스기사의 질주본능을 자극할 줄은, 그래서 ‘아말피 코스터’의 스릴 강도가 한 단계 상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긴장과 급커브의 이중주가 만들어 낸 멀미를 이 지역의 명물, 레몬사탕으로 겨우 달랬다. 버스가 포지타노에 도착하고, 아말피 해안에서의 우리의 일정도 끝이 났다.




  다음 날, 아침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쿠구궁-------!!!”


  세상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테라스 문을 열자,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짙은 회색 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구름은 삽시간에 해안 가까이로 몰려오며 점점 몸을 두껍게 부풀렸다. 구름 아래의 바다는 곧 무엇인가가 쏟아 오를 듯 시커멓게 변해갔다. 검은 바다마저 삼킬 듯 구름은 쉬지 않고 무겁게 내려 앉았다. 테라스문 유리 안에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 회색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의 빠르기 였다. >


  순간, 하늘이 번쩍이고 곧 이어 ‘쿠구궁’ 세상이 다시 울렸다. 해수면이 출렁여 나도 모르게 테라스 문에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말도 안되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 찰나에 ‘포세이돈’의 등장을 상상하고 말았다.

  더욱 세게 뛰는 가슴을 누르며 계속 바다를 응시했다. 다행히 바다의 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해수면의 출렁임도 구름의 움직임에 의한 착시일 뿐이었던 듯했다.  


< 점점 두꺼워지는 구름과 해무가 큰 사건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


  곧이어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테라스 아래의 나무들이 이리저리 사정없이 흔들렸다. 테라스가 순식간에 젖고, 테라스 문 유리에도 빗방울이 맺혔다.


< 빠르게 강하게 테라스와 유리문을 두드리던 비 >


  잠시 후, 거짓말처럼 바다 위의 구름이 사라져 갔다. 그 사이로 하얀 달이 뜬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 거짓말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하얀 달이 떴다. >


  모든 것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왠지 모를 전율이 일었다.

  어제 해변에서 위로를 나눈 포지타노 바다는 나에게 자신의 우울의 끝을 보여줄 심산인가 보았다. 잠 자는 나를 흔들어 깨워, 무거운 눈물로 떨구는 해우(解憂)의 순간을 지켜봐 달라고. 해우 뒤에 찾아오는 맑은 환희를 함께 하자고. 어쩌면 그렇게 이겨내는 거라고 나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어쨌거나 그저 조금 흐린 바다가 아니라, 어디 가서도 쉽게 보지 못할 역동적인 바다의 우울의 끝을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한 것은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이래서, 흐림 조차 범상치 않기에 포지타노는 ‘그 유명한’ 포지타노인가 보다.


  바다의 해우를 목격한 뒤, 다시 눈을 잠시 붙였다 일어났다. 그 사이 날이 조금 더 개어 바다 색이 달라져 있었다.


  “와~ 저 바다 색깔 좀 봐!”


  어제의 팔 한 폭의 청량함 보다 더욱 투명하게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색을 가리키며 온 가족들을 불렀다.


< 새벽의 엄청난 '전율' 이후, 한 시간 뒤의 청량한 바다 >


  “어쩌지? 지금 나가야 하나?”

  “곧 체크아웃해야 하는데. 다 준비하고 나가면 다시 흐려지나?”

  “아, 그런가? 그럼 여기서라도 그냥 잘 보는게 낫나? 어쩌지?”

  “폼페이 일정을 몇 시간 미뤄야 하나? 그럼 로마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안되는데?”

  “폼페이는 비 온다는데, 그냥 폼페이를 스치듯이 지나야 하나? 근데 폼페이도 넓어서 쉽진 않을 텐데?”

  “아, 어쩌지, 어쩌지?”


  기대치 않은 바다색의 등장에 남편과 나는 잠시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 방언이 터지듯 정신 없이 새로운 계획을 쏟아냈다.

  결국, 원래의 계획대로 더 포지타노를 돌아보지 않고, 체크아웃 후 폼페이로 떠나기로 했다. 절반의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두껍게 끼어 언제라도 바다를 덮을 채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면 저 먹구름이 밀려와 이 이상의 바다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막아 설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겪은 우리의 ‘운빨’이다.

  또한 폼페이 역시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준비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 잠시지만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본 것에 만족하고 우리는 시원섭섭하게 포지타노를 떠났다.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머리 위로, 이른 아침 바다 위에 앉았던 것처럼 두꺼운 구름이 몰려들었다.


< 끝까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던 포지타노의 회색 구름 >


  ‘우울이 한 번에 떨쳐내질리가 있나. 조금씩,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다시 웃고 빛나겠지.

   안녕, 우울한 나의 친구, 나의 우울한 포지타노.’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 '나의 우울한 포지타노'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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