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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Dec 23. 2022

[오스트리아 여행 ① ] 혼자, 그리고 둘이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금까지 했던 모든 여행이 특별했지만, ‘오스트리아(Austria)’로의 여행은 ‘특별히’ 특별했다. 영국에 온 이후 언제나 함께 다녔던 남편과 아이들을 ‘바스(Bath)’에 남겨 두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방학 때만 여행을 다녀야 하다 보니, 유럽의 멋진 국가의 수에 비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곳을 보고 갈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남편과 내가 번갈아 한 번씩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오기로 합의했다.


  혼자 떠날 곳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이었다. 그곳에서 ‘영원한 사랑의 낭만’이 숨쉬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촬영지를 직접 걸어 보고 싶었다. 기간은 3박 4일 정도, 시기는 남편의 학교 일정에 여유가 생기는 6월 중순경.


< 영화 <비포 선라이즈>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이미지) >


  그러나 여행 준비를 하다 보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두고 가볍게 혼자 떠나는 여행이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좋은 것은 혼자 보단 함께 할 때 더욱 충만해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스물 넷의 나의 작은 방에 매일 배경음악처럼 흘렀던, 그래서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비포 선라이즈>의 장면 속에 내 모습도 한번 담아 보려면 혼자서는 아무래도 아쉽고 섭섭한 부분이 많을 여행이 될 터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부산의 어느 고등학교 1학년 첫날, 앞뒤로 앉아 인사를 나눈 이후 지금까지 친구의 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였다.

  “천지(친구의 별명)야, 같이 오스트리아 여행 안 갈래?”

  결혼을 하지 않아 비교적 생활이 가벼운 친구는, 6월은 진행중인 회사일 때문에 어렵지만 7월초라면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먼 한국에서 코로나 시국을 뚫고(7월엔 아직 해외 출입국자에 대한 PCR 테스트와 규제가 남아 있었다), 비싼 비행기표까지 감당하고(당시 한국-영국 직항 편도 비행기표가 250만원이 넘었다), 나와 여행을 하기 위해 유럽까지 날아와 준다는데 여행 일정쯤이야 무조건 친구에게 맞추어 줄 수 있었다.

  “그럼 친구야, 우리 7월에 오스트리아에서 만나~”

  친구와 1년만에(7월이면 내가 영국에 온지 1년이 될 즈음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상봉이라니, 그리고 모처럼 오랜 친구와 둘이 하는 여행이라니. 첫눈에 반한 ‘셀린(Celine)과 제시(Jessy)’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꽤 애틋한 만남이자 여행이 아닐까.


  처음 얘기된 여행기간은 3박 4일이었지만 서울에서 오스트리아까지 날아온 친구를 위해 남편과 나는 ‘혼자만의 여행’ 기간을 앞뒤 주말을 붙인 한 주, 즉 9일로 조정했다.

  길어진 여행 기간 덕분에 ‘빈’ 외에 ‘잘츠부르크(Salzburg)’와 ‘장크트 볼프강(St. Wolfgang)’까지 둘러 보며 오스트리아를 충분히 즐긴 ‘혼자 떠난, 그리고 둘이 함께한' 오스트리아 여행의 소회를 찬찬히 풀어보려 한다.

  우리의 첫 번째 여행지는 오스트리아의 서쪽에 위치한 ‘잘츠부르크(Salzburg)’였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오로지 <비포 선라이즈>만 생각하며 떠나온 오스트리아였기에 사실 여행 전에는 잘츠부르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어떤 도시인지, 랜드마크는 무엇인지 등 잘츠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모차르트(Mozart)’와 관련된 도시라는 것은 알았다. 클래식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조차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모차르트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는 도시.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 '모차르트의 집'에서 숫자로 모차르트를 설명해 둔 판넬 >


  풍문대로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를 수식어로 붙인 ‘무엇’들이 많았다.

  천재 음악가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의 영광을 간직한, 샛노란 색감과 고풍스러운 외관이 인상적인 ‘모차르트 생가’와 이후 모차르트가 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모차르트의 집(Mozart Wohnhaus)’. - 시간이 부족한데 더 알찬 ‘모차르트’ 여행을 하고 싶다면 ‘모차르트 생가’보다는 ‘모차르트의 집’을 추천한다. 다만, ‘모차르트 생가’가 위치한 게트라이데(Getreidegasse) 거리가 아름다우니 잠시 ‘모차르트 생가’ 앞에 들러 기념촬영이라도 하고 떠나길!


 샛노란 색감과 고풍스런 외관이 인상적인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모차르트의 집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중 몇몇 유명한 곡들로 구성한 미니 오페라를 보면서 저녁 식사를 하는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 - 음악과 음식이 썩 훌륭한 편은 아니나 모차르트의 도시에 왔으니 한번쯤 경험해 볼 만한 정도는 된다. 특히 남자 배우가 유쾌하다.


<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에서 오페라 공연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 >


  한국 유학생이 많아 한식당까지 있다는 ‘모차르트 음악대학(모차르테움)’. – 한식당 이름이 ‘히비스커스(Hibiscus, 무궁화)’다. 친구는 밥 양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여러 한식당을 다녀본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꽤 훌륭한 편에 속했다.


< '모차르트 음악대학'을 향한 목적이 이 한식당이었던지라, 김치찌개 사진 밖에 없다. 하하하. >


  모차르트를 컨셉으로 만든 ‘카페 모차르트(Café Mozart)’. –잘츠부르크 주변 3개의 산 봉우리를 형상화했다는 디저트 ‘녹켈른’은 설명만큼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역시 머랭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작 모차르트가 자주 갔던 카페는 ‘카페 토마셀리(Cafe Tomaselli)’라고 하니, 카페 모차르트, 이곳의 정체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카페 이름 때문에 여행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카페 모차르트의 명물 녹켈른, 잘츠부르크 주변의 알프스 산을 형상화한 것


  모차르트 그림으로 포장돼 있는 ‘모차르트 초콜릿’ – 잘츠부르크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어디가나 있을 듯 한 초콜릿. 빈에서 사 먹었는데 정말 ‘비추’다.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 사 갔으나 아이들조차 먹지 않았다. 기념으로 사고 싶다면 3~4알짜리 소규모 포장을 사자. 


< '모차르트 초콜릿'은 사진조차 찍지 않아서 나무위키에서 가져 왔다. (출처 : 나무위키) >


  그리고 기타 등등, 정말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였다. 친구와 나는 앞서 말한 거의 모든 ‘모차르트’를 경험했다(국경을 넘어야 하지만 거리상으로는 '빈' 보다 더 가까운 독일 뮌헨에서 당일치기 여행을 오기도 하는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친구와 나는 3일을 보냈기에 웬만한 명소는 다 돌아보았다.)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 숨결을 타고 ‘모차르트의 집’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들은 오페라 음악이 좋아서 이다음에 제대로 된 오페라 공연을 한번 보고 싶다는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팝 음악을 주로 듣는 사람을 클래식한 사람으로 전향시킬 정도의 강한 숨결은 아니었다.

  온 마음을 모차르트에게 내어 주기에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 외에도 유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았다.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그리고 그 이상의 아름다움


  잘츠부르크 시내를 다니는 투어 버스 옆면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의 인물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곳 잘츠부르크의 도심, ‘모차르트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라벨(Mirabell)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귀여운 악동들이 ‘도레미송(Doe-Ray-Mi Song)’을 부르며 뛰어 놀았기 때문이다.


< 출처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


  말괄량이 수녀와 일곱 명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서로 화합하듯,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저마다의 색과 향기로 어우러지는 미라벨 궁전의 정원을 거닐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노래가 흘러 나왔다.


  “Doe, a Deer a female deer. Ray a drop of golden sun~~”


< 미라벨 궁의 정원, 영화에 나온 각도는 아니지만 이곳이 정원의 중심부다. >
 미라벨 궁 정원의 이곳 저곳


  그뿐만이 아니다. 잘츠부르크 외곽에 자리한 ‘헬브룬 궁전(Schloss Hellbrunn)’에도 <사운드 오브 뮤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첫사랑을 알아가는 소녀의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했던, 대령의 첫째 딸 ‘리즐(Lizzle)’이 몰래 사랑하는 이(랄프(Rolf))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랄프는 나중에 도망치는 리즐의 가족을 고발하여 리즐에게 상처를 남긴다. 역시나 첫사랑은 아프다.)


  “I am sixteen going on seventeen~”


< 출처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


  그 장면을 촬영했던 정자(파빌리온)가 헬브룬 궁전의 정원 한 편에 자리하고 있다. 리즐이 벤치위를 뛰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던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앞에만 서 있어도 이제는 잊혀져 가던 오래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감동이 다시 새록새록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의 감동을 애써 끌어오지 않는다면 별다른 감흥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파빌리온을 만날지니, 필히 상상력과 기억력을 대동하고 방문하시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에 나온 파빌리온

 

 그외에 마리아가 가정교사로 부임하던 첫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달려가던 노란벽 길도 너무 아름답다.

< '마리아'가 가정교사로 부임하던 날 노래를 부르며 뛰어갔던 길. 노란벽이 인상적이다. >



  그러나 사실, ‘미라벨 궁전’과 달리, ‘헬브룬 궁전’의 백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가 아니라 궁전 정원 곳곳에 감춰둔 ‘깜짝 분수’가 아닐까 한다(다시 말해 미라벨 궁전은 ‘도레미송’이 전부라는 거다. 흠흠).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여름 별궁이었던 헬브룬 궁전을 건설하던 17세기는 정원에 깜짝 분수를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시대가 변하며 다른 궁전들은 장난 같은 분수를 대부분 철거하였기에, 이제는 이 헬브룬 궁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깜짝 분수’. 정원 곳곳에 분수를 숨겨 두었다가 사람들이 지나갈 때 분수를 작동시키는데, 분수의 위치가 벤치 주변 혹은 건물의 출입구 앞, 조형물 앞 등 사람이 많이 모이거나 지나가는 곳에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어 당시의 대주교도 귀족 손님들을 불러다가 익살스럽게 분수를 뿌리며 여름의 더위를 식혔다고 한다.


< 건물 입구에 몰래 설치된 헬브룬 궁전의 '깜짝 분수' >


  ‘깜짝 분수’의 묘미를 백퍼센트 살리기 위해 이 분수만은 궁전 입구에서 미리 신청하는 ‘가이드 투어’로 이루어지는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해서라기보다 가이드가 사람들을 이끌고 다녀야 마침맞을 때 깜짝 분수를 작동시켜 관람객의 반응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우리 역시 분수의 묘미를 충분히 즐겼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조작하는 분수는 관람객들이 충분히 젖을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분수를 피하며 몸을 사린다면 분수를 작동하는 사람도 몸을 사리다가, 분수가 이제 끝났나 하고 관람객이 지나가는 순간 다시 물줄기가 쏟아진다. 물론 우리가 여행하던 시기가 7월, 더위가 한창인 여름이었기에 더욱 최선을 다해 분수를 뿜어냈을 수 있다. 덕분에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어린애처럼 즐겁게 물놀이를 즐겼다. 친구와 여행하는 동안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이 헬브룬 궁전에서만큼은 물줄기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날 아이들 생각이 꽤 많이 났다.


 한 무리의 가이드 투어 그룹과 물을 뿌릴 마침맞은 순간을 포착한 분수 조종사
 아무리 때를 기다려도 물줄기는 오고야 말았고, 마지막 사진의 친구는 쫄딱 젖었다.



  헬브룬 궁전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더 외곽으로 향하면 ‘운터스베르크(Untersberg) 산’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경계에 있는 이곳 역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영화의 엔딩에서 마리아와 대령 가족이 국경을 건너기 위해 산맥을 넘는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사실은 여행을 다녀온 뒤에 알았다. 우리는 아무 정보도, 준비도 없이 그저 ‘잘츠부르크 카드(여행자를 위한 데이(Day) 카드로, 정해진 기간 동안 유명관광 명소와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가 있으면 무료로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고 하여 운터스베르크 산을 찾았다. 그것도 헬브룬 궁전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친구가 우연히 찾아낸 정보였다.


<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본 운터베르크 산 >


  운터스베르크 산은 아무런 부연설명 없어도 그 자체로 멋스러운 산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는 스릴 있었고, 산 정상에 오르자 저 멀리까지 길처럼 쭉 뻗은 산맥이 웅장했다. 산맥 사이로 흘러가는 안개가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그 안개가 모였다 흩어지며 산 아래 경치를 가렸다 펼치면, 저 멀리 잘츠부르크가 보였다 사라졌다. 국경의 마을들이 안개를 타고 바다처럼 출렁였다. 스위스 정도는 가야 알프스를 경험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만날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알프스의 높은 산세와 아름다운 전경이 맑은 공기만큼 기분을 맑게 했다.


< 운터베르크 산 전경.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샌들을 신고도 문제 없이 여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 나열하지는 못하지만 이외에도 대령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집을 떠난 마리아를 만나기 위해 아이들이 수녀원을 찾아가는 장면을 촬영한 ‘논베르크(Nonnberg) 수녀원’, 누구나 알 만한 노래 ‘에델바이스’를 부르며 무대 뒤로 사라져 가족 전체가 망명길에 오르기 직전 잠시 은신했던 공동묘지(촬영세트)의 모티프가 된 ‘세인트 피터(St. Peter) 공동묘지’ 등등 잘츠부르크 곳곳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장소들을 돌아보며 깨달은 것은 그곳들이 영화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모두 ‘유명한 영화의 촬영지’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운드 오브 뮤직>도 잘츠부르크를 찾아 온 것이 아닐까.



 올라가는 길이 고요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논베르크 수녀원
 세인트 피터 공동묘지  





잘츠브루크의 진짜 상징, ‘호엔잘츠부르크 성’

 

  ‘모차르트의 도시’네, <사운드 오브 뮤직>을 찍었네 해도, 일단 잘츠부르크에 들어서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다. 잘츠부르크 도시 중심에 우뚝 솟아 잘츠부르크를 호위하는 성, 호엔잘츠부르크 성(Festung Hohensalzburg)’. ‘호위’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궁전이 아니라 11세기에 도시 방어를 위해 지은 요새(Fortress)다.


< 잘츠부르크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호엔잘츠부르크 성' >



  성 내부는 현재 박물관과 전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한번 돌아보는 것도 잘츠부르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소금으로 만든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주변 마을’ 모형이 퍽 인상적이었는데, 과거 암염을 채굴해 번성했던 잘츠부르크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주는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에 쓰인 ‘소금’은 ‘잘츠부르크’ 이름에도 이미 녹아들어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잘츠(Salz)’가 오스트리아어(독일어)로 바로 ‘소금(Salt)’이란 뜻. 이로써 모차르트의 도시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에 이어, ‘소금의 도시, 잘츠부르크’ 되시겠다.


< '소금'으로 만든 '잘츠(Salz)'부르크 >


  그러나 시간이 많이 없다면 성 외부만 둘러 보아도 높이 올라온 보람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의 침략을 살피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앉아 사람들을 보호하던 성채가 이제는 ‘파노라마 전망대’가 되어 잘츠부르크 전체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성에서 바라보는 잘츠부르크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 이 풍경을 언제나 긴장하며 바라봤을 과거의 병사들이 안쓰러울 정도다.


< 호엔잘츠부르크 성 위에서 바라보는 잘츠부르크 전경 >
 호엔잘츠부르크 성 내외부


  이렇게 멋진 전망 앞에서 맥주가 빠질 수 있나. 출구로 향하는 길에 발견한 야외 레스토랑에 빈 테이블이 보이기에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포기하고 냉큼 자리를 잡았다.

  성벽 난간에 팔을 걸어 머리를 괴고, 성 아래 굽이치는 ‘잘차흐(Salzach) 강’의 윤슬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여름 늦은 오후의 맥주 한 잔. 안주 겸 저녁식사로 시킨 오스트리아식 소시지 요리가 내 취향이 아닌 것도 아무 상관 없었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친구가 주문한 콜라에 달려드는 벌도 괜찮았다. 시중을 들어야하는 아이들도 없고, 반드시 가야하는 목적지도 없이 친구와 나란히 앉아 즐기는 여행의 여유와 운치, 그리고 기쁨이 지금 이곳에 있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그럼 네가 꼭 가고 싶다고 했던, 그래서 오늘 저녁에 가려고 했던 수도원 맥주는 언제 먹으러 가?”

“내일 저녁? 아니면 모레 점심?! 맥주야 언제 마셔도 좋으니까.”



< 잘차흐 강이 흐르는 잘츠부르크 전경 >
< 한여름 늦은 오후의 시원한 맥주 한 잔, '아, 아름다운 날이었다.' >



수도원 맥주 양조장


  술도 마시지 않는 친구를 끌고(사실은 길찾기 담당이었던 친구를 따라) 수도원 맥주를 마시러 간 것은 호엔잘츠부르크를 방문한 바로 다음날 저녁이었다.

  더위가 한 풀 꺾인 초저녁의 넓은 야외 정원에는 흰 도자기 잔을 앞에 놓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맥주와 음식을 살 수 있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선선한 해 질 녘 바람이 불고, 주변에 퍼지는 웅성웅성 즐거운 소란이 마치 여름날의 축제를 연상시켰다. 이런 곳에 ‘수도원’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 잘츠부르크 수도원 맥주 양조장의 야외 정원 >

  유럽에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양조장이 여럿 있다고 한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이 잘츠부르크의 수도원 맥주 양조장도 꽤 유명한 수도원 양조장 중 하나라고.

  ‘수도원’이라는 타이틀이나 유구한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 분위기의 술집이라면 사람들이 몰려 들었을 것 같지만, ‘수도원 양조장’이라는 특징만큼이나 이곳의 독특한 맥주 구입 방식이 사람들을 더욱 열광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도 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아까 야외 정원의 모든 테이블 위에 단아하게 올려져 있던 흰 도자기 맥주잔이 길게 진열된 선반이 보인다. 키가 큰 잔(1L)과 작은 잔(500mL) 중 자기에게 적합한 잔 하나를 골라, 중앙에 예사롭지 않게 서 있는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잔을 씻는다. 씻은 잔을 들고 계산대로 가서 맥주잔 사이즈에 맞게 맥주 가격을 지불한 후, 맥주를 내려주는 곳으로 가 테이블 위에 잔을 놓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나무 드럼통의 꼭지를 틀어 나의 잔에 신선한 맥주를 콸콸콸 내려준다. 보통 맥주에는 ‘따르다’는 말을 쓰지만, 큰 드럼통에서 바로 받는 이곳의 맥주는 ‘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 수도원 맥주를 구입하는 단계 >


  이 독특한 수도원 양조장의 맥주 맛은 어땠을까? 에일(Ale) 맥주는 본디 탄산이 약하지만, 이 수도원 맥주는 그것을 감안해도 조금 더 탄산이 약한 느낌이었다. 맥주 맛 자체도 쓴맛이 강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단정한, ‘수도원’을 닮은 맛이라고 할까. 오묘한 매력이 있는 맥주 맛에 - 절대 맛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 나의 맥주 정량이 500ml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째 도자기 잔을 향해 걸었다.


 여름의 야외 정원에서 마시는 맥주는 더욱 맛있다.


  여기까지 와서도 탄산음료를 마시는 친구를 앞에 두고 어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굳이 두 번째 맥주를 구하는 이유는 많았다. 아직 음식(로스트 치킨)이 남았고, 아직 까만 밤이 오지 않았고, 아직 취하지 않았고, 아직 친구가 맥주 맛을 보지 못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였지만 잘츠부르크의 마지막 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야외 정원에서라면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맥주 한 모금 정도는 추억으로 담아갔으면 했다.


< 맥주 두 잔에 담길 추억 >





그러나 가장 그리운 것은


  크기는 작지만 잘츠부르크에는 가 볼만한 곳들이 알차고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앞서 언급한 곳들도 글로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이 한가득이고, 그외에 아예 꺼내지도 못한 곳들도 있다. 잘츠부르크가 오스트리아에서 빈 다음으로 손에 꼽힐 도시일만 했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가장 그리운 순간은 그보다 작고 소소한 것이다.


  잘츠부르크 여행 첫날 저녁,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아름다운 전경을 내려다보며 저녁을 먹은 친구와 나는 성 아래로 내려와 잘차흐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걸었다. 그러다 강변으로 내려가는 샛길을 발견했고, 그 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갔다.


< 잘차흐 강가에서 바라보는 호엔잘츠부르크 성  >


  강변엔 동글동글한 자갈이 강을 따라 해변처럼 쭉 이어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강변에 앉아 쉬는 사람이 많았다. 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도 다리 위쪽의 공기보다 강바람이 부는 자갈밭이 훨씬 선선했다.

  친구와 나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왼편으로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올려다보였고, 오른편으로는 길게 뻗은 강물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근사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 후에, 우리는 나란히 강물을 바라보고 앉았다.


<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친구와 나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


  친구와 친구가 만나면 이야기는 절로 흐른다. 이런저런 짜증나는 이야기, 우스운 이야기, 시답잖은 농담들을 거쳐 가벼운 고민과 깊은 걱정, 그러다 문득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점점 날은 어두워지고, 노을은 짙어지고, 공기는 싸늘해졌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그래도 우리는 일어날 줄 몰랐다.



  짙어가던 노을이 거의 사그라지고, 우리가 앉아 있는 자갈조차 잘 보이지 않을 때쯤 우리도 그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몸을 일으키며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너랑 같이 여행 와서 이렇게 밤까지 밖에 있어보네.”

  “응? 그럼 너 혼자 여행할 땐 어떤데?”

  “나 혼자 다닐 때는 뭐… 저녁만 먹고 나면 칼같이 숙소에 들어가지. 낮에는 혼자서도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어두워지면 혼자 밖을 돌아다니기가 좀 그렇더라고.”


  친구는 서른을 넘기고 몇 년간 한창 여행을 다녔다. 친구들과 다닐 때도 있었지만 혼자 여행을 다녀올 때가 많았다. 직장인이 되면 내가 번 돈으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그때는 함께 떠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떤 친구는 결혼을 했고, 어떤 친구는 시간이 맞지 않고, 어떤 친구와는 취향이 맞지 않고, 어떤 친구는 경제적 여유가 없고… 다양한 이유로 누군가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나의 친구 역시 그랬다고 한다. 친구가 한창 여행을 다닐 때 나는 결혼과 출산, 육아로 정신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친구가 떠난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시간이 나면 무작정 떠난 도피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그날 잘차흐강 가에서 나는 처음 알았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기에, 또 서로를 이해하기에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었나 보다. 친구의 ‘혼자 떠나는 여행’이 자유롭고 가벼운 싱글의 특권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혼자라도 떠나야 했던 여행에서 밤이 되면 숙소에 오도카니 앉아 친구는 무슨 생각을 되뇌었을까. ‘너와 함께 와서 밤을 여행한다’는 친구의 말이 아파서 잘차흐강에서 불어오는 식은 강바람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느새 잘츠부르크에는 밤이 완전히 내려앉아, 우리가 강가로 내려왔던 길이 어딘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발 아래 놓인 것이 무엇이 돌이고, 무엇이 잡초인지 발로 더듬어야 간신히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우리 주변을 지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우리를 보고 있는지 스쳐지나가는 것인지도 분별이 되지 않을 만큼 어두운 강변 길을 걸어, 무사히 가로등이 밝은 도로 위로 올라왔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시간은 아름답지만 불안과 두려움도 동반된다. 아마도 나 역시 혼자 왔다면 이전 여행에서의 친구처럼 지금 이 시간 숙소에 앉아 캔맥주로 밤의 서운함을 달랬겠지. 여행지의 밤, 둘이라서 좋은 것은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만에 하나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서로를 지켜줄 능력이 전혀 없는 연약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던, 잘차흐강 가 자갈밭 위의 밤의 산책. 내게 잘츠부르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가장 그리운 순간이다.  



< 잘츠부르크를 생각하면 가장 그리운 '친구와 나의 시간' >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오스트리아 여행, 잘츠부르크 – 혼자, 그리고 둘이.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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