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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Jul 21. 2022

[아일랜드 여행] 가볍고 작은 여행의 기쁨, 더블린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아일랜드, 더블린 ②


  ‘기네스만 마실 수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으로 떠나온 더블린이었기에(자세한 내용은 이전 편 '이번 주말에 기네스 마시러 더블린에 갈까?'를 참고해 주세요.),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미션을 완료한 이후, 다음 기네스를 마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특별히 정해 둔 일정이 없었다.

  대개 더블린은 유럽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볼 거리가 별로 없는 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더블린에서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면 첫 번째가 방금 우리가 다녀온 ‘기네스 스토어하우스’고, 그 뒤로 나열되는 몇 가지 것들 중에서 ‘이건 꼭 봐야지’ 하고 당기는 곳이 별로 없었다.

  16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가 유명하다지만 내가 다닌 것도 아니고, 앞으로 다니겠다는 포부를 품을 일도 없는 남의 학교를 구경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같은 이유로 영국의 저명한 ‘옥스포드’에 갔을 때도 영화 <해리 포터> 연회장 장면의 모티브가 된 ‘그레이트 홀’ 외에는 별 감흥을 받지 못한 바 있다.).

  더블린에도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이 있지만 짧은 주말 여행에서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람에 투자할 여유가 없는데다 날씨가 너무 좋아 실내로 들어가기가 아까웠다. 하여, 우리는 정처 없이 더블린을 걸어 보기로 했다.



: ) 생동감 넘치는 젊은 더블린

  

  이제는 독립된 국가이지만 한때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또 지리적 특징과 기후가 비슷하기 때문인지 더블린은 영국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영국에 비해 더블린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예쁨이 있었다. 아마도 똑같이 오래된 건물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건물의 문이나 벽 등을 각자의 개성을 담아 다양한 색으로 칠한 집들이 많기 때문인 듯했다. 생동감 있는 색깔을 입은 더블린은 젊었다.


< 알록달록한 컬러로 생기 넘치는 얼굴의 더블린 거리 >


  차도와 나란하게 정비된 자전거 도로 위로 바람을 가르며 싱그럽게 달리는 자전거도 더블린의 생동감에 한 몫을 더했다. 실제 자전거를 타는 이의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의 두 발로 경쾌하게 달리는 더블린 사람들은 젊어 보였다.

  조금 더 걸어 진짜 더블린의 젊음이 집약되어 있다는, 더블린의 아주 힙한 펍(Pub), ‘템플 바(Temple Bar)’가 있는 거리로 향했다. 어딘가 우리나라 홍대 느낌이 나는 거리에는 주말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더블린을 대표하는 펍, ‘템플 바’도 많아 우리는 살짝 당황했다.


< 더블린의 '젊음의 거리', 템플 바 스트리트 >


  처음에 우리는 ‘템플 바’가 더블린의 유명한 펍 이름인 줄 알았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템플 바’는 트렌디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의 펍과 바, 카페들이 모여 있는 거리의 이름이다. 그 거리의 이름을 따서 지은 ‘템플 바’라는, 빨간 외관이 인상적인 펍이 특히 유명하지만, 실제 템플 바 거리에 가 보면 그 ‘빨간 템플 바’를 찾기 전에 ‘템플 바’라는 이름을 붙인 다른 펍들 많이 볼 수 있다. 서울의 ‘마포 먹자골목’에 가면 ‘마포 원조’를 붙인 수많은 고깃집들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 듯하다.

  우리는 마침내 사진에서 보던 빨간 ‘템플 바’를 찾았고, 주말을 맞아 템플 바 거리로 쏟아진 젊은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어색하게 기념 촬영을 마쳤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고 서 있는 등 뒤편에서 ‘디리닷다 두둠칫’ 라이브 음악이 흘러 나왔다. 흥겨운 ‘템플 바’ 안으로 나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밝은 오후에도 어둡고, 흔들리는 ‘템플 바’ 내부는 어른들의 세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우리가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 빨간 외관이 인상적인 '템플 바', 많은 이들이 이 건물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한다. >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는 발걸음을 아쉽게 옮기는데, 몇 걸음가지 않아 또 다른 라이브 펍이 보였다. 이번에도 절반의 부러움과 절반의 호기심으로 염탐하듯 안을 기웃기웃 살피다가 신선하고 기묘한 발견을 했다.


  “우와! 저기 펍 안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은 다 젊은 사람들인데,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은 할아버지야!!”


< '젊음'과 '나이 듦'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던 아이리쉬 펍 >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나이든 기타리스트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악에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은 흥에 취해 있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춤을 추는 그들의 표정에서 즐거움과 함께 숙련된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젊음’과 ‘나이 듦’이 분리되지 않고, 또 젊음이 나이로 구분되지 않고, ‘음악’과 ‘마음’만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더블린의 ‘진정한 젊음’의 순간을 스쳐 지나며 어쩐지 먹먹하고 뭉클해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조화로움이 가능한 이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기네스’라는 후광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성큼 내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 ) 새똥 마저 행운이 되는 더블린 오후의 여유


  길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걸음은 과거 바이킹 족의 요새였던 ‘더블린 성’을 지나, 그 뒤쪽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목적지가 없는 걸음이었기에 무슨 공원인지도 모르고 들어선 공원의 잔디와 꽃이 아름다워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나중에 찾아본 바로, 그곳은 ‘체스터 비티 도서관’ ‘코치 하우스 갤러리’ 가운데 자리한 ‘더브 린 공원(Dubh Linn Garden)’이었다.).


< 더블린 성 근처의 '더브 린 공원 >


  아이들과 남편은 잔디 위에서 게임도 하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며, 이전까지 볼거리가 넘쳐나 늘 일정이 빡빡하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좀처럼 갖지 못했던 한가로운 여유를 즐겼다.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진 나는 저녁에 마시기로 한 기네스 한 잔을 위해 잠시 가족들과 떨어진 벤치에 앉아 따끈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때,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장난을 친 것인가 했지만 주위를 둘러 보아도 그럴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더블린의 따뜻한 봄 오후 햇살과 싱그러운 초록색 잔디의 기운을 받으며 쉬고 있는데, 무릎 위에 올려 둔 백팩 앞주머니 끝부분에 500원짜리 동전만한 둥근 액체의 흔적이 반짝거렸다. 고개를 기울여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뒤, 나는 황급히 벤치에서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 나 새똥 맞았어!!!!!”


  아까 ‘딱’하고 들렸던 소리는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나의 가방에 새똥이 떨어지는 소리였던가 보다. 나의 소란스럽고 황망한 외침에 잔디 위에 엎드린 아빠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있던 아이들이 일시에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 가방에서 누렇고 넓적한 새똥의 흔적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하하. 엄마 새똥 맞았다!!!!!!! 아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내가 맞은 새똥이 아이들에게 재미난 여행의 추억이 된다면 나름 보람차고 유의미한 새똥이라 여겨야 할까.

  한국에서는 한번도 맞아본 적 없는 새똥을 해외에서 두 번 맞았다. 한 번은 수 년 전 암스테르담으로 출장 갔을 때 중앙역 근처에서, 그리고 남은 한 번은 지금 더블린에서.

  암스테르담에서의 새똥은 나의 머리카락부터 코트까지 긴 획을 긋는, 정말 직접적이고 장대한 새똥이었다. 그때 함께 있던 동료들은 해외에 나와서 새똥을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며 ‘복권을 사도 될’ 길운이라는 덕담으로 위로해 주었더랬다. 복권을 살 수도 없는 해외에서 그런 길운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그 덕분인지 늘 시리고 우울하다는 암스테르담의 겨울 날씨가 내가 있는 사흘간 정말 기가 막히게 좋았다. 암스테르담으로 파견 나가 살고 있는 동료가 나의 새똥의 운을 부러워할만큼.  

  두 번째 새똥 역시 복권도 사지 못하게 해외에서 맞아버린 이 ‘운 없는’ 운은 과연 어디서 빛을 발할까. 날씨에 쓰이기엔 이미 더블린의 날씨는 새똥을 맞기 전부터 기가 막혀서, 새똥을 맞고서도 다시 잔디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한가로운 오후의 쉼을 더 누리고 싶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남은 해의 길이만큼 더블린 거리를 목적지 없이 조금 더 어슬렁거리다가 지는 해와 함께 마신 기네스 한 잔은 역시나 부드럽고 쌉싸름한 행복의 맛이었다. 이 맛을 알리 없고, 정처 없는 걸음의 가벼움도 모르는 아이들의 여행 만족도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아이들 역시 거리 구경 중에 잠시 들른 기념품 샵에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여유롭고 행복한 더블린의 토요일 저녁이었다.


< 더블린 가운데를 흐르는 리피 강 >




: ) 아득한 천장, 낡은 종이 냄새, 은은한 햇살의 ‘롱룸’


  다음 날 오전은 목적지를 만들어 보았다. 더블린의 유명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었지만, 그 안에 있는 도서관 ‘롱룸(The Old Library Exhibition)’을 보고 가지 않으면 나중에 영국 혹은 한국으로 돌아가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았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도서관 '롱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힌다는 ‘롱룸’은 롱룸 안에 보관된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와 함께 묶어서 관람할 수 있는 오래된 서고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켈스의 서’를 잠시 설명하자면, ‘켈스의 서’는 약 1,200년 전에 제작된 라틴어로 된 기독교 복음서로써, 얼핏 보면 그림책 같기도 한 아주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말하자면 캘리그라피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국보이자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하며, 도서관 ‘롱룸’은 이 ‘켈스의 서’를 보관하고 있는, 과거에는 도서관이었으나 이제는 전시관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 켈스의 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켈스의 서와 롱룸(The Book of Kells and the Old Library Exhibition, 두 공간을 묶어서 이렇게 부른다.)’에 입장한 유럽의 여행객들은 그 책을 아주 유심히 바라 보며 서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그 분야의 역사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 눈에는 그저 오래된 예쁜 책, 유리 장식장 안에 보관되어 넘겨 볼 수도 없는 책, 넘겨본다 한들 라틴어로 돼 있어 읽어 볼 수도 없는 고서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롱룸’에 온 이유는, 딱 하나, 이 롱룸이 영화 <해리 포터>에서 우리의 똑순이 헤르미온느가 책을 보던 도서관의 모티브가 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해리 포터> 촬영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서관 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도서관에서 배우들이 직접 촬영을 한 것은 아니고 이 공간을 따로 촬영한 뒤 컴퓨터 그래픽으로 영화 속 도서관을 구현해 냈다고 한다.


< <해리 포터> 영화 속 도서관 장면 >


  이런 유구한 역사와 유명한 영화와의 관계라는 스펙을 업고도, 적지 않은 입장료(16유로, 한화로 약 2만원)에 비해 공간이 좁아 볼거리가 별로 없다는 이전 여행자들의 경험담이 여러 차례 발견되어 처음에는 더블린에서의 ‘해리 포터 성지순례’는 포기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리 포터> 덕후 딸을 데리고 더블린까지 와서 우리만 기네스를 즐기고 딸의 즐거움은 모른  하기가 미안해서 실망할 각오를 하고 방문할 것을 결정한 롱룸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우, 아주 매우 만족한 결정이이었다.

  롱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정말 아름답고 고풍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도서관이었다.


< 롱룸의 높은 아치형 천장 >


  입장하는 순간 아치형의 높은 나뭇결 천장이 압도하듯 눈길을 사로 잡았다. 그 높은 천장 끝까지 닿은 책장과 책장 끝까지 채워진 오래된 책들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도서관을 수놓고 있었다. 고개가 꺾일 만큼 뒤로 머리를 넘긴 채 나도 모르게 홀리듯 도서관 안으로 몇 발자국 더 걸어 들어가면 코끝에 낡은 종이 냄새가 스며들었다. 세월의 냄새. 무구히 흘러간 시간을 냄새로 표현하면 이런 냄새가 날까.


< 롱룸 양 옆으로 펼쳐진 책장 >


  가운데 긴 통로 양 옆으로는 높은 책장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로 난 긴 창문으로 햇빛이 내리 쬐었고, 햇빛에 쉽게 상할 고서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문 마다 세심하게 늘어뜨린 연한 베이지의 블라인드는 햇살의 강렬한 기운을 한풀 죽여 도서관을 더욱 은은하게 비추었다. 책장의 가장 높은 칸까지 손길이 닿을 수 있게 사선으로 놓인 폭이 좁은 사다리는 과거의 지성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촘촘한 고리. 그 고리 사이를 오가며 짧은 수명의 인간은 영원 같은 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득한 천장, 낡은 종이 냄새, 은은한 햇살, 그 햇살 속을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걸어다니노라면 현실이 아닌 꿈 속을 걷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공간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닐까.

  동시에 이전 여행자들의 ‘볼거리가 별로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앞서 꿈결처럼 펼쳐낸 비현실적인 공간에 대한 감상, 이것이 ‘롱룸’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의 발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도서관의 가운데 통로뿐. 양 쪽의 책장 사이사이로 가까이 들어가 책을 자세히 볼 수도 없었고, 책장을 펼쳐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큰 의미가 없는, 입장료만 비싼 어느 관광 명소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 유명세에 걸맞게 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


  다행히도 우리 가족에겐 그것보다는 조금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되어준 롱룸의 중앙 긴 벤치에 잠시 앉았다. 딸은 가져온 책을 꺼내서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현재의 책을 읽었고, 나는 햇살이 보드랍고 그윽하게 세월을 어루만지는 오래된 책장을 꽤 오래 바라 보았다. 이 곳에 보관된 책들과 비교할 수도 없게 미천하고 소박한 글이지만, 내가 지어내는 글과 책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이렇게 오래, 정성스럽게 남을 수 있다면.


< 세월의 냄새를 품고 점점 그윽하게 익어가는 고서들 >



: ) 우연한 버스커 '앨리 셜록'과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펍


  예상보다 뜻 깊었던 오전 일정을 마쳤으니 다음은 다시 ‘기네스 타임’. 아이리쉬 펍에서 점심을 먹으며 기네스를 마시기로 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더블린’하면 생각나는 책, <더블린 사람들>을 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즐겨 찾곤했다는 펍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펍을 찾아 가는 길, 거리에서 ‘버스킹(Busking)’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유럽 어디를 가나 거리 음악가들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특히나 더블린이 버스킹으로 유명하다고 하더니, 역시 영화 <원스(Once)>가 탄생할 만한 도시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지나쳐온 여러 명의 버스커들에 비해 유난히 많은 관객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버스킹을 위해 마련된 장비나 곁에서 촬영을 도와주는 사람,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쓴 푯말까지 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버스킹으로 꽤 자리를 잡은 사람인 듯 했다.


< 더블린 거리의 명물, 버스킹 >


  펍으로 향하던 발을 멈추고 우리도 가까이 다가가 자리를 잡고 잠시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정해진 일정도, 예약한 식당도 없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가벼운 발걸음이 참 좋았다.  

  시원시원한 가창력으로 멋지게 마무리한 노래가 끝나자, 주변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우렁찼다. 노래를 부르는 사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뭔가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한 분위기에 남편이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다.

  ‘앨리 셜록(Allie Sherlock)’.

  이럴 수가! 그녀에 대한 설명이 위키피디아에 나왔다. 그녀가 버스킹 한 유투브 영상이 줄줄이 나오고, 유명한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현재 20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꽤 알려진 아일랜드 버스킹 가수였다. 와, 이런 가수의 노래를 직접 듣는 행운을 얻다니! 더블린의 공기가 더욱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이었다.

  근사한 경험에 대한 답례로 얼마의 돈을 기타 가방에 넣고 펍으로 다시 향했다. 이제는 꽤 유명세를 얻었음에도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는 팬들에게 너무나 밝은 얼굴로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는 Allie Sherlock, 그녀를 꽤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여담이지만, 다음날 영국으로 돌아와 호기심에 유투브 검색을 하니, 우리가 직관한 버스킹 공연 영상이 올라와 있었고, 그 영상의 조회수가 하루만에 10만뷰가 넘어 있었다.).   


< 밝은 웃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던 더블린의 유명 버스커 '앨리 셜록' >



  더블린을 대표하는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즐겨 찾았으며, 그의 소설(<율리시스>) 속에 등장하기도 했다는 펍 ‘데이비 번스(Davy Byrnes)’는 아주 깔끔하고 친절했다. 이 정도의 작가와 연이 있는 펍이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펍’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만도할텐데 예상외로 펍은 매우 점잖았다. 펍 내부에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긴 하지만 여차하면 모르고 지나칠수도 있을만큼 그를 대놓고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인상적이라고 할까.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직원들도 친절하니 굳이 ‘제임스 조이스’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사람들의 발길이 모일 것 같기도 했다.


< 제임스 조이스의 펍, 데이비 번스 >


  나중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담담하게 유명세를 지키는 펍은 자체적인 창작상을 만들어 아일랜드의 젊은 작가를 발굴 및 지원하고 있고, 이 펍이 나오는 소설 속의 특정 날짜(6월 16일)에는 수많은 제임스 조이스의 팬들이 모여들 정도로 제임스 조이스와의 연을 두텁게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은 펍 이곳 저곳에 더 많은 제임스 조이스와의 인연이 숨어 있었지만, 아직 <더블린 사람들>도 읽어보지 않은 내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도시를 방문하기 전 관련된 영화나 책이 있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접해보고 가는 편이라 더블린에 가기 전 <더블린 사람들>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내가 들어온 <더블린 사람들>은 꽤 우울한 시기의 더블린을 담고 있었기에 이 책이 오히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인 현재의 더블린을 오해하는 색안경이 되지 않을까 하여 잠시 뒤로 미루었다.


< 이제는 읽어보자! <Dubliners(더블린 사람들)> >


  의미 있는 펍에서, 친절한 직원들의 호의 속에, 기분 좋은 ‘기네스 타임’을 마치고 거리로 다시 나와 느릿느릿 걷는 발이 서점으로 향했다. 현재의 더블린의 아름다움과 멋을 알았으니 미뤄 두었던 과거의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의 암울했던 더블린을 접해 볼까. 제임스 조이스의 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더블린의 한 서점에서 다양한 버전의 <더블린 사람들> 중 손에 쏙 들어오는 적당한 사이즈의 책을 한 권 샀다. 현재의 생기 있고, 젊고 예쁜 더블린이 되기 전, 더블린은 어떤 고단한 시간을 겪었는지 거꾸로 되짚어 보는 것도 재미 있는 시간여행이 되리라.




: ) 마지막 ‘기네스’를 위해


  지금껏 했던 여행 중 가장 여유가 있었던 더블린 여행의 끝은 그렇지 못했다.

  백팩만 하나씩 메고 갔으니 미리 붙여야 할 수화물도 없었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많이 자유로워지긴 했으나) 아직 코로나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유럽 내 각 도시의 공항들이 대체로 여유가 있었기에, 더블린 도심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뭉그적거리다가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약 1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을 남겨 놓고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

  ‘어쩌면 비행기를 놓칠지도 모르겠다’는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준 택시기사의 염려스러운 말에 갑자기 초조해진 마음으로 들어선 더블린 공항은, 아니나 다를까, 몇십 겹으로 겹쳐 줄을 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당혹감을 누르며 우리는 이미 온라인 체크인을 마쳤으니 이 긴 줄은 우리와 상관 없는 체크인 줄일 것이다 기대하였으나, 도로 위의 교통경찰관처럼 팔을 크게 휘두르며 공항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공항직원은 슬프게도 이 줄이 검색대를 향하는 줄이라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히 일러주었다.  


< '늘 혼잡'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더블린 공항 >


  좀처럼 쉽게 줄어들지 않는 줄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더블린 공항에 대해 검색을 했다. 검색대를 향한 이렇게 긴 줄이 더블린 공항의 고질적 문제라고 했다.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 미리 알아볼 생각도 못한 더블린 공항의 고질병의 중심에 서서, 왜 우리는 늘 공항에 3시간씩 일찍 가던 염려증과 강박증을 더블린에 와서 벗어 던졌나 후회를 했다. 느지막이 출발하고서도 시간이 남으면 공항에서 마지막 기네스로 더블린과 쌉싸름한 작별의 시간을 갖자는 턱없는 꿈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자유롭고 가벼웠던 더블린의 감상에 우리는 너무 취해있었나보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만약 비행기를 놓치면 묶을 호텔까지 검색해야 할 정도로 초조했던 긴 줄이 점점 줄어 우리가 검색대를 통과한 시각이, 비행기 출발 20분 전. 검색대 통과 후,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미친듯이’ 탑승구를 향해 뛰었다. 엄마 아빠의 초조한 기운을 아이들도 느꼈는지 투정하는 말 하나 없이, 오히려 뒤쳐지는 나를 돌아보며 사력을 향해 뛰어 비행기 출발 시각 8분 전에 탑승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탑승구 앞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사람들이 비행기에 다 탄 이후의 휑함이 아니라, 아직 비행기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어쨌든 비행기 문이 닫혀 버린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니, 일단 진정하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생수를 사서 찢어질 것 같은 목에 시원한 물을 콸콸 쏟아 넣었다. 그 물이 목을 채 다 넘어 가기도 전에 전광판에 적힌 탑승 시간이 바뀌었다. 7시 30분이던 우리의 비행기가 9시로 지연.

  아니! 이럴 거면, 진작 지연 안내를 해 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이렇게 ‘미친듯이’ ‘목이 찢어져라’ 뛰어 오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두 시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긴장하고 초조해 했던 의미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순간의 황망함이 몰려왔다.

  그러나 비행기를 놓치지 않은 안도감이 너무나 큰지라 황망함은 곧 사그라들었다. 복권도 사지 못하게 해외에서 맞아버린 어제 오후의 새똥의 운이 지금 이 공항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연된 비행기 시간 덕분에 비행기도 놓치지 않고, 더하여 기네스 한 잔을 마실  시간까지 벌었으니 금상첨화인가, 전화위복인가.

  이렇게 생각을 바꾸자, 황망함의 자리에 마지막 기네스를 마실 수 있다는 기쁨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 마지막 기네스를 마실 기회를 주기 위해 새똥의 운이 비행기를 붙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마저 들었으니, 이쯤되면 기네스 중독을 인정해야겠다.


< 어쩌면 새똥의 행운이 붙잡아 준 마지막 기네스 >


  탑승구 근처의 바(Bar)에서 우리 외에도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먹을 만한 샌드위치는 이미 동나고, 건조하고 퍽퍽한 소시지 빵과 칩스(Chips)로 대신하는 저녁이 그래도 즐거운 것은 순전히 공항 라운지에서도 특유의 촘촘하고 뽀얀 거품을 잃지 않는 기네스 한 잔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계획과 큰 기대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간 더블린 덕분이었다.  


  마침내 탑승한 영국행 비행기 안. 까만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더블린을 향해 ‘안녕, 더블린’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옆 자리에 앉아 함께 손을 흔들던 일곱 살 아이의 눈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더블린이 너무 좋아서 안 가고 싶어. 흐흐흑.”


  어른에겐 ‘기네스’가 있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별 것 없었던 이곳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 걸까?

  아이는 공원에서 온 가족이 뒹굴며 놀았던 것이 즐겁고, 길을 가다가 문득 들른 소품샵과 서점이 좋았다고 했다. ‘이탈리아’처럼 거창하게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큰 의미가 있지만, 때론 이렇게 한가롭게 노닐고 거니는 가볍고 작은 여행이 크게 울릴 때가 있다. 아이의 눈물에 나도 덩달아 뭉클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때 다시 한 번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안녕, 가볍게 떠나와서 더욱 특별했던 우리들의 더블린."


< 일요일 밤,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더블린 >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아일랜드, 더블린 ② - 가볍고 작은 여행의 기쁨, 더블린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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