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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Jan 08. 2017

2016년의 영화

개인적인 2016 한국영화, 외국영화 베스트 5


정확히 1년 전에도 브런치에 남긴 글이 너무 적다는 자조 섞인 한탄으로 글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더더욱 처참해서 할 말이 없다. (참고로 본 글에서 말하는 '올해'는 2016년이다. 늘 그렇듯이 글을 찔끔찔끔 쓰다가 해가 넘어가 버려서...) 그래도 감상이 다 휘발되어 버리기 전에 정리는 한 번 하고 넘어가야겠으니 기억을 쥐어짜내며 꾸역꾸역 남기는 결산 글. 이번엔 모처럼 한국영화, 외국영화 양쪽에 다 고르게 좋은 영화들이 많아서 순위를 매기기가 힘들었다. 특히 보통은 비교적 명확했던 한국영화 쪽에서 딱 다섯 편만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영화들이 많았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유난히 사적으로 사랑에 빠진 영화들이 많았던 한 해를 돌아보며... 


본 글에는 다수 영화에 대한 내용 누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16 한국영화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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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나를 아세요? 나의 무엇을 아세요? 그게 나인가요? 우린 그저 지금 이 순간, 마주치고 있을 뿐인 걸요

올해는 약간 고민을 하긴 했지만 결국 또 1위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이다. <북촌방향>을 보았던 관객이라면 주인공의 기억 속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각각의 동일성이 와해되어버렸던 그 골목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 후반부에서 "너가 누군지 알 것 같다" / "누군지 모를 텐데"라는 대화. 어쩌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북촌방향>의 이 부분만을 떼어다가 한 편의 장편 영화로 변주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이건 홍상수의 인식론적 고찰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고정적인 틀에 의존하는지, 그리고 그 틀이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상대가 방출하고 있는 무한한 기호를 얼마나 단편적인 조각들로 치환시켜버리는지에 대해 이 영화는 민정이라는 캐릭터의 '동그랗게 뜬 눈'을 빌려 문제제기한다. "저를 아세요?" 김혜리 평론가는 다른 영화에 대한 어떤 글에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아마추어 기호학자가 된다"고 했다(씨네21 1042호). 이 영화는 그 모호하고 복잡한 '사랑의 기호학'에 대한 현대적이고 명쾌한 해석이다. 그리고 올 한 해 내게 영화라는 언어로 가장 놀라운 기호를 던져준 작품은 여지없이 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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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아가씨 

착취와 억압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여성들의 연대와 지질하고 추악한 남성성의 대비 

"현대에 와서 아저씨들이 앞장서 오염시킨 그 명사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돌려주리라"(각본집 서문 중)라는 박찬욱 감독의 포부에서도 드러나듯이 <아가씨>는 국내 주류 영화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직설적인 페미니즘 영화다. 또한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노멀하게 그린 거의 첫 번째 한국영화다. 동성애에 대한 부분은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하고 싶다. 혹자는 철 지난 주제라 여길지 몰라도 남성들의 외설적인 시선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여성이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 탈출하는 이야기는 적어도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선 너무나 선명한 시의성을 갖는다. 얼마 전에 본 씨네21의 한 대담에서 몇몇 평론가들이 이 영화가 여성영화가 아니라고 언급한 것을 보고 의아했다. 방법론적으로 세련되지 못하다거나 너무 직설적이라는 식의 비판이라면 몰라도 이만치 명명백백하게 여성주의적인 시선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보고 여성영화가 아니라니, 그거야말로 남성 감독이라는 선입견에 갇혀있는 판단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지적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국내 남성 감독들 중 가장 페미닌한 영화를 찍고 있는 그의 성취는 존중해줄 만하다고,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듀나가 트위터(@djuna)에서 지적했듯이 이 영화를 만든 이들 중엔 "박찬욱보다 훨씬 막 나가는 여자들이 최소한 두 명 이상" 있었다. 즉, <아가씨>는 박찬욱의 작품이지만 동시에 정서경(공동 각본)의 <아가씨>이며 류성희(미술 감독)의 <아가씨>이자 조상경(의상 감독)의 <아가씨>이기도 하다. 약간 흥분해서 말이 또 길어져버렸는데 여하튼 올해 개인적으로 가장 깊이 애정하게 된 영화 중 한 편인 <아가씨>가 올해의 한국영화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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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우리들 

그 시절 그 작은 세계 속에서도 우린 어쩌면 그렇게 서로에게 잔인할 수 있었는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무서웠던 작품 한 편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을 고를 것이다. 관계 안에서의 작은 균열이 만들어낸 파문을 아프게 응시했던 <파수꾼>이나, 관계 맺음을 위한 노력의 공허함을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냈던 <소셜 네트워크> 등과 함께 '인간관계 스릴러'라는 장르로 묶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 한 방울 없이도 그 어떤 스릴러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현실적인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이 작품들 중에서 <우리들>이 유난히 더 잔인하고 안타깝게 다가온 것은 이 이야기가 '열한 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도 똑같이 겪었던 아프고 두려웠던 그 순간들. 정신없는 세상살이를 겪으며 지금은 좀 태연해진 줄만 알았던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이를 처음 겪으며 버겁고 난처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상기되면서 가슴속을 저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큰 미덕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이야기와 넘치지 않는 연출이라 생각한다. 이런 담백한 구성만으로도 관객들의 갑갑한 가슴을 끝까지 옥죄는 이 작품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니,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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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비밀은 없다 

그녀가 사라진 딸의 궤적을 쫓는 동안 우리가 목격하는 건 부조리한 이 사회의 앙상한 단면들 

이 영화를 극장에서 세 번이나 보았고 세 번 모두 영화에 한껏 마음을 뺏겼지만 여전히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너무 어렵다.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을 땐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끓어 넘치는 것 같은데, 막상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소개하려고 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다. 스릴러의 외형 안에 담긴 이질적인 요소들이 자아내는 불균질 한 힘, 독특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몽타주 장면들, 여느 기성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인물들 간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등등, 여러 말들을 적었다 지웠다 하며 뭐라도 말을 만들어보려다가, 그냥 이경미 감독의 인터뷰 구절에 신세를 지기로 한다. "내가 평소 이 사회에서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고, 불합리하다고 여겼기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여러 편견이나 현상을, 연홍이 맞닥뜨리고 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연홍이 ‘순결한’ 여자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여성도 불합리와 부조리의 씨앗을 갖고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가해자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시사IN 463호) 결국 <비밀은 없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의 근원은 마구 요동치며 이 극의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는 소수자성이다. 충무로에서 기어코 이런 영화를 완성시킨 이경미 감독이 정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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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4등 

투박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를 솔직하게 전달하면서도 이렇게 시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4등>에 대한 개인적인 감흥이 유난히 컸던 것이 단지 나의 전공과의 관련성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연말에 여러 평론가들이 꼽은 베스트 목록에 이 영화가 있는 걸 보고 놀랍고도 반가웠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투박하고 솔직하다. 그런데 이 '직설'의 결론은 단정이 아닌 질문이다. 영화가 시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많이 언급된 바 있는 수중 시퀀스들이 대표적이겠지만,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뒤흔든 장면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수영을 마치고 나온 준호의 시점 숏, 그의 시선을 따라 대회 결과를 잠깐 비춰줌으로써 영화는 멀끔한 완결성을 띤 '산문'으로 마무리되는 듯하다가, 거울에 비친 준호의 (관객들의 예상을 배반하는) 표정을 통해 다시 '운문'으로 돌아온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화면 한 켠에 자리한 '막대 걸레'는 거대한 물음표를 남긴다. 전국민이 교육학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교육은 전국민적 관심사이고 많은 이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이야기되는 주제 중 하나다. 이는 영화 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의 교육 관련 영화들의 경우 그 메시지가 '설명문'으로 전달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렇게 온전히 영화적인 언어로 말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난 것이 너무너무 기쁘다. 






2016 외국영화 베스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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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캐롤 _ Carol 

서로를 알아보고, 끌리고, 기다리고, 성숙하는... 사랑이 시작되는 그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과정 

<캐롤>은 올 한 해뿐만 아니라 내가 이제껏 보았던 모든 사랑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이며, 또한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영화 중 한 편이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영화의 플롯은 몇 개의 문장들로 어렵지 않게 요약할 수 있지만 그건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한, 말과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떨림과 섬세한 감정의 변화가 이 영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크레딧이 다 올라감과 동시에 다시 처음부터 보고 싶어 지는 경험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는데(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거나 놓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형식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롤과 테레즈는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나의 2016년 역시 <캐롤>을 만났기에 채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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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라라랜드 _ La La Land 

온전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그 어딘가를 찾아 꾸준히 리허설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찬가 

베니스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이런저런 상찬들을 들어왔기 때문에 좋은 영화일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건조하기 짝이 없는 취향을 가진 내가 클래식한 향수로 가득 찬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뺏기게 될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꿈과 환상의 나라(La La Land)'의 언저리에서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찾아 배회 중인 두 주인공의 노래에 유달리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은 아마 요즘 내 개인적인 처지가 어떤 길목에 정체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더욱이 이 영화엔 영화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Technicolor world"(사운드트랙 'Another Day of Sun' 가사 중)로부터 위로를 받아 온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하는 요소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네마스코프' 로고가 넓게 펼쳐지는 영화의 시작점에서부터, 고전 쪽에 문외한인 나 같은 초심자의 가슴도 두근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캐롤>, <아가씨>와 함께 올해 내가 가장 깊은 애정을 갖게 된 영화 중 한 편인 <라라랜드>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또 글을 올릴 예정이니 영화 내적인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거기서 더 하고자 한다(물론 글이 완성될지 여부는 아직 꿈과 희망의 영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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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헤일, 시저! _ Hail, Caesar!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 보이며 '시네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코언 형제 

주로 삶의 덧없음과 불확정성과 같은 냉소적인 주제를 기가 막히게 설계된 알레고리로 표현해 온 코언 형제가, 이렇게 솔직한 사랑 고백을 담은 영화를 내놓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최근작 <더 브레이브(True Grit)>나 <인사이드 르윈>이 안겨준 울림에서 그들의 변화가 감지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인 것은 또 처음인 것 같다(내가 아직 감독의 전작을 모두 챙겨보진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부정확할 수도). 그들이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화, 그리고 나아가 허황된 꿈과 탐욕, 모순으로 가득 찬 영화를 둘러싼 산업 전체이다. 물론 이 고백이 절대 평범치는 않다. 50년대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냉전과 맥카시즘에 대한 적나라한 블랙 코미디로서 치밀하게 설계된 고백이니 말이다.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골 때리는 전개의 막바지에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이 '시네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전해져 오는 뜻밖의 울림은 개인적으로 그 어떤 메타-시네마의 그것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다. 김혜리 평론가가 언급한 대로 이는 영화를 사랑해 온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세련된 격려"이다(씨네21 1051호). 결국 이렇게 또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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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자객 섭은낭 _ 刺客聶隱娘 

앞으로 나올 아트하우스 무협 영화의 하나의 기준이 될 법한 새로운 고전(instant classic) 

어디까지나 나의 게으름이 원인이지만 개인적인 한탄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 <자객 섭은낭>을 영화관에서 두 번 밖에 보지 못한 건 정말 원통한 일이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완전한 관람 환경에서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래비티>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현장에서 '체험' 될 수밖에 없는 영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설치 미술을 다른 형식으로 보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미술 쪽에 대해 1도 모르기 때문에 헛소리일 확률 높음).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는 설명을 덧대기가 무척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이건 위에서 이야기 한 <비밀은 없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다. 예컨대 <비밀은 없다>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영화를 가득 메운 역동적인 힘이 마구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라면, 반대로 <자객 섭은낭>은 감추고 비우고 멈춰 서있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채워지고 움직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하려니까 뜬구름 잡는 거창한 수사만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면 다른 것 없이 그저 빨리 영화제든 뭐든 기회가 생기는대로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숨 죽이고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얼른 다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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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헤이트풀8 _ The Hateful Eight 

끝내주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대사와 총질로 가득 찬,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는 세 시간 

이 영화는 내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 이어 두 번째로 본 작품인데(그래서 난 그가 꾸준히 미국의 역사를 주제로 다뤄온 감독인가 했더랬다), 그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던 특별전에서 그의 작품들을 몰아보았고 뒤늦게 열렬한 팬이 되었다. 개봉 당시 영화를 막 보고 나와서 끄적였던 위의 한줄평은 지금 와서 보면 그저 타란티노 영화의 일반론 이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없다. 사실 워낙 명료하게 주제가 드러나있는 작품이라 이미 여러 평자들에 의해 이야기되어 온 부분들에 이런저런 부연을 덧붙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꼭 언급해두고 싶은 부분은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기한 너무나도 멋진 캐릭터인 데이지 도머그에 대해서다. 물론 타란티노의 필모그래피에서 <킬 빌>이나 <펄프 픽션> 등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데이지 도머그라는 인물은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고 가장 입체적이며 가장 '지독한' 여성이다. 영화 초반에서부터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상대를 향해 씩 비웃음을 날리는 이 캐릭터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타란티노의 영화를 두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어떤 감독보다 '니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그는 흑인 노예제를 다룬 가장 멋진 영화를 만든 백인 감독이기도 하며(<헤이트풀8>의 백미 중 하나가 또 '링컨'과 관련된 부분이다), 마초적인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온갖 여성혐오적인 언사들을 쏟아내도록 하면서도 또 동시에 그 어떤 남성 감독도 웬만해선 여성에게 부여해주지 않던 매력적인 역할을 여성 캐릭터들에 부여해 온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런 그의 모순을 지지한다. 


올해의 리스트가 마무리되는 김에 여성주의 이슈와 관련하여 사족을 덧붙여 보자면, 한국영화 쪽의 <4등>과 외국영화 쪽의 <헤일, 시저!> 정도만을 제외하면 공교롭게도 리스트의 영화들 모두가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여성에게 극 중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영화 쪽에서도 2016년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말해질 수 없는 한 해였던 것 같다. 






아차상 

아깝게 순위에 포함시키지 못한 영화들. 전에 적어두었던 한줄평들만 옮겨 본다. 


한국영화(무순) 

곡성 _ 관객의 믿음을 가지고 노는 감독. 이게 다 낚시라는 걸 부러 드러내 보이며 시작하는데도, 도통 낚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부산행 _ 아무리 전속력으로 달리고 다른 이들을 끌어내리며 발버둥 쳐도, 그렇게 모두 좀비가 된다. 

철원기행 _ 한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여행보다 더 생경해져버린 우리.


외국영화(무순) 

본 투 비 블루 _ Born to be Blue _ 다소 거친 연주 속에 들려오던 Over the Rainbow의 익숙한 멜로디, 이 영화가 딱 그렇다.

사울의 아들 _ Son of Saul _ 흐릿한 초점과 답답한 화면비로 참상의 표면을 가림으로써, 그 끔찍한 내면에 집중하게 한다.

주토피아 _ Zootopia _ 억지 설명이나 교훈을 전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거의 모든 시퀀스에서 차별과 혐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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