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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Jun 30. 2016

그 대사,
일찍이 속말로 내뱉었던 고백

<아가씨> _ 박찬욱, 2016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사람 당황스럽게시리.


전날 밤 자신의 침소에 아이처럼 뛰어들어와 자장가를 불러주며 재워야 했던 겁 많은 아가씨가 이만치 '탁월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을 줄이야. 자신이 아가씨로 모시게 된 히데코와 처음 정식으로 인사하게 된 숙희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속으로나마 깊이 탄복한다. 히데코도 마찬가지다. 뭇 여성들의 환심을 한 몸에 사던 백작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아랑곳 않던 그녀인데, 자신을 올려다보는 숙희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두 눈만은 쉽사리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거둔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우기 시작한 건 아마 상대를 처음 똑바로 마주한 이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느 연인들의 시작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해 자주 들리는 지적들 중 하나는 부족한 감정선에 대해서이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거다. 국내 번역본 기준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원작 소설의 섬세함이나 영국에서 제작된 바 있는 3부작 드라마와 비교하여 그렇다고 한다면야 부당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해도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독립적인 한 편의 영화로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필자의 경우엔 두 사람의 관계의 진전이 빠르다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서로에게 언뜻언뜻 내비치는 욕망의 제스처들이 충분히 그려진 것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선'이 중요한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시선은 초장부터 다름 아닌 연인의 그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아,
너만 같이 있어주면.


완성된 영화에 덧붙이기 무색한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성애 커플이었어도 감정선에 대한 지적이 나왔을까? 첫 대면에서 숙희가 내뱉은 내레이션의 화자가 남성이었다면, 그가 히데코에게 첫눈에 '뿅' 갔다는 사실을 다들 두말없이 납득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비롯하여 퀴어 영화들에 대해서만 유독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진 시점이 언제인지 그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이고 납득 가능한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훨씬 부족한 개연성만으로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을 그려온 이성애 서사의 사례들을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냐는 거다.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 대화 몇 마디 만에 쉽게 열렬한 사랑에 빠지던 그 여남 커플들의 이야기 속엔 "염병" 같은 친절한 감탄사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여성끼리의 사랑이라는 점이 극 중에서 고민이나 논란거리로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점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굳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멀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말한다(씨네21 1058호). 동성애 연기에 부담은 없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주연배우들의 대답도 한결같다. "성을 구분하고 연기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질 땐 이유가 없다. 이끌림 혹은 교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나."(김민희, 한국일보 인터뷰) "<아가씨>의 힘은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장면이 없는 것이다. 성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아서 거부감 없이 벽을 허물 수 있는 것 같다. <아가씨> 같은 영화가 이 시대에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김태리, 데일리안 인터뷰)


물론 원작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고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 등을 접해본 일이 많지 않았던 관객의 경우엔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연정을 품으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이들의 사랑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한 이상 사후에 그들이 대체 언제, 왜 사랑에 빠졌는지 그 구체적인 계기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우린 자신이 특정한 성적 지향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열심히 해명해야 하는 시대는 지나온 것이 아닌가? 아직 아니라고 한다면야 뭐 더 덧붙일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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