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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Yi Oct 23. 2018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

BIFF 2018 TICKET BOOK

<펄>, <나비처럼 날아서>,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 <가버나움>, <이미지 북>, <3개의 얼굴들>, <커밍 아웃>, <라피키, 친구>, <행복한 라짜로>, <쏘리 엔젤>까지 10편의 첫인상.




2018/10/6

 _ Pearl

엘사 아미엘, 2018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고강도 근력 운동을 하는 신체에 대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관습적으로 그 신체의 주인공이 남성일 것이라 착각하도록 의도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 초반에는 여성 보디빌더라는 흔치 않은 주인공의 설정을 가져와 놓고서 결국 '모성'을 주제로 삼은 것인가 싶어 미리 실망할 뻔했는데, 전개될수록 익히 보아온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이야기로 흘러가서 다행이었다. 다만 이야기 자체가 장편으로 성립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였고 그래서인지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후반이 좀 지루했다. 톰 포드나 윈딩 레픈 감독 등이 연상되는, 감각적인 조명과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내러티브와 무관한 장면이 중간중간에 삽입되기도 했는데, 음... 그런 양식적인 미쟝센도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린 것인지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다.

여러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실제 보디빌더 선수이기도 한 주인공 배우의 신체가 스크린 가득 펼쳐질 때 그야말로 'Godlike'한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경험은 확실히 신선했다. 특히 여성의 신체는 성적인 맥락에서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웠다. 또한 여성 감독이기에 가능했을 배려나 문제의식이 느껴지는 장면들에서는 (늘 그렇듯) 무지한 남성 관객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기도 했다.




2018/10/6

나비처럼 날아서 _ Float Like a Butterfly

카멜 윈터스, 2018

복싱을 즐겨하며 문화적으로 강요된 성 역할에 거부감을 느끼는 주인공 프란시스가, 그에게 복싱을 가르쳐준 당사자이면서도 그의 성향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와 겪는 갈등이 영화의 주된 서사이다. '사랑하긴 하지만 좋아하기는 힘든' 부모를 향한 모순된 인정 욕구를 다루고 있는 성장 영화라는 점에서 <레이디 버드>가 떠오르기도 했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의 '성향'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최근에 본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펀 홈>도 생각났다.

무엇보다 영화 속 배경에 섬세하게 표현된 아일랜드 유랑민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점이 참 좋았다. 끝나고 진행된 GV에서 감독님도 직접 말씀하시길, 본인이 나고 자란 유랑민들의 삶,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그린 영화를 찍고 싶으셨다고 한다. 끝인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영화를 통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영화 중간에 나도 이렇게 전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 매번 영화제에 온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2018/10/6

모두를 놀라게 한 남자 _ The Man who Surprised Everyone

나타샤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브, 2018

놀랍도록 지적이고 예리한 퀴어 영화, 아니 퀴어/비퀴어의 경계에 있는 영화였다. 또는 퀴어를 향한 ‘반응’에 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단지 겉모습만 바뀐 채 아무런 말도, 다른 그 무엇도 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가까운 지인들을 비롯한 타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비추면서 사회 속 성소수자를 향한 심리적, 신체적 폭력을 우회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주인공이 그 타인들에게 '용인 가능한 약자'였을 때와 더 이상 용인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는지 대조시키고, 그 변화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잔인하게 시작된다는 것을 짚는 것도 날카로웠다.

시놉시스를 보면 시베리아 우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아이디어를 확장해서 성소수자의 약자성을 아주 미묘한 층위로, 종이 한 장 차이만큼만 덧입히듯이 주인공에게 부여한 설정이 언뜻 클리셰적으로 보이는 내러티브와 장면들을 전혀 다른 뉘앙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국어로는 조금 다르게 의역되었던 것 같은데 영자막 상으로는 (대충 번역해서) “다 보여주면서 ‘퍼레이드’까지 하고 다닐 건 없잖아?”라며 비아냥대던 한 마을 주민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숲에서 사냥꾼을 단속하는 일을 하던 주인공이 사냥감의 입장이 된 추격 신에서는 계속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런데 자꾸 주변의 몇몇 관객이 심각한 타이밍에 웃어대서 짜증이 났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한 것이 그렇게 비웃을 일인가? 성소수자가 비가시화된 이 사회에서 크로스드레서를 우스꽝스러운 희극의 소재로만 삼아 온 현실이 여느 때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내 주변의 웃음이 터진 관객들은 한국 사람들뿐이었는데 극장 안에 많이 있던 외국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을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도 바로 옆의 한 관객분은 점차 웃음이 잦아들더니 후반부엔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난 이 날카로운 영화가 성소수자 감수성의 어떤 미묘한 경계를 드러내는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관객 분의 잦아들던 웃음이 이 영화가 존재하고 상영되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행동 변화에 대해 아무런 부연 설명이나 납득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없었던 것에 비해서 초반에 그의 섹슈얼리티를 선언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 영화의 결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나중에 곱씹어보니 내가 젠더 플렉서빌리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8/10/7

가버나움 _ Capernaum

나딘 라바키, 2018

근래 본 어떤 영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었다. 제도 밖 슬럼가에 모여 살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도 각자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정치적 층위는 복잡하게 나뉘어진다. 빈민과 난민, 난민 중에서도 출신과 성별, 인종, 서류 유무가 모두 차이를 만든다. 아주 작은 공동체, 심지어 한 가족 내에서도 어른과 아이, 아이들 중에서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정치적 지위는 다르며, 그 권력 차로 인하여 끊임없는 차별과 폭력이 벌어진다. 이 영화는 그 미세한 차이에 따른 차별과 폭력의 양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에 기댄다거나 설명적인 내레이션 하나 없이, 흡입력 있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입체적인 인물들을 따라가는 극영화의 형식을 통해 그려내고 있었다. 어쩌면 상투적일 수 있는 법정극 + 플래시백 구도를 통해 이러한 정치적이고 복합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가버나움>의 가장 놀라운 성취라 생각한다.

주인공 자인 역의 아역 배우(크레딧에서 보니 그의 실명 역시 자인이었다)의 연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조숙한 아이’ 캐릭터를 자주 볼 수 있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연기뿐만 아니라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이 영화가 압도적으로 월등했다고 본다. 자인의 행동과 여정은 경우에 따라 아이 같았다가 어른 같았다가 하는 일 없이 아주 뚜렷한 계기로 작동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대단한 정의감이나 공정함을 좇아 움직인다기보다 그저 당장 가까이에 있는 자기보다 더 약한 약자를 보호하고자 한다. 아마도 수많은 어린 동생들 속에서, 또 슬럼가의 수많은 아이들이 당해온 폭력들을 목격하며 자랐기 때문에 생겨난 성품일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태생적인 부분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면한 문제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고자 곧바로 어떤 행동을 취한다. 그게 딱 아이 수준에서 떠올릴 법한 아주 어설픈 수준의 시나리오이다 보니 필연적인 실패로 귀결될지라도, 그는 동생의 조혼(早婚)을 막기 위해 비밀 작전을 짜고, 아기와 함께 돌아다니기 위해 바퀴 달린 카트를 구하고, 돈을 구하기 위해 고물 냄비를 가져다 판다. 그런 그가 스스로의 생존의 문제에 부딪혀 무언가 포기해야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을 때 보이는 무력한 표정과 눈물은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이 똑똑하고 행동력 있는 아이가 구치소에 갇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비칠 땐 정말 무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영화는 어떤 결론이나 판결을 강요하지 않는다. 행여 영화 후반부의 자인의 목소리를 영화의 주장으로 오해한다면 그건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 생각한다(영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한 외신 리뷰의 관점이 그랬다. 제1세계 백인.. 남성 평론가..). 자인의 어머니가 섬뜩한 표정으로 검사(배우 출신인 나딘 라바키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감독이 슬럼가 바깥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는 지점이라 생각한다.)를 쳐다보며 일갈할 때, 관객의 위치에서 여태껏 자인의 부모를 비롯한 슬럼가의 어른들을 향해 내심 어떤 판결을 내리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치밀어올라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눈물의 양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내가 부국제에서 흘린 눈물의 총량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도록 만든 영화였고, 이 영화에게 황금종려상을 주지 않은 칸영화제의 선택은 현실 속 정치적 위계가 작동한 부당한 결과라 생각한다.




2018/10/7

이미지 북 _ The Image Book

장 뤽 고다르, 2018

사실 난 마지막으로 본 고다르 감독의 영화가 <주말>(1967)인 ‘알못’이다 보니, 영화와 이미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 같은 조악한 품질의 화면과 음성들, 영화 초반에 등장한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직접 이어 붙였을 법한 푸티지의 나열에 대해서는 뭐라 말을 얹기가 참 어렵다. 그 레퍼런스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고전에 빠삭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서 초중반엔 계속 보고 있기 힘들어서(살짝 졸기도 했고) 그냥 나갈까도 고민했는데, 영화의 형식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여 60년대에 이미 <주말>만큼 나아갔었던 거장의 고민의 현재를 한번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다. 그래서 결국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끝끝내 전해진 그 희망 아닌 희망의 메시지로부터는 확실히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 감독은 오지 않고 프로듀서 분만 참석한 GV에선 특별히 들을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그 유명한 은둔자(영감탱) 고다르 감독의 작업 방식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고 참 재밌었다. 




2018/10/8

3개의 얼굴들 _ 3 FACES

자파르 파나히, 2018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전작 <택시>에서도 정치적 탄압을 받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 영화는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그 윤리적 차원에 대해 이야기하던 태도가 존경스러웠는데, 이번 영화에선 자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이란의 여성 예술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배우의 꿈이 좌절된 채 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진 소녀의 얼굴에서 시작되는 로드무비 형식의 여정은 현재 활동 중인 여성 배우, 그리고 과거(이슬람 혁명 이전)에 활동했던 여성 배우까지 세 사람의 이야기에 가닿는다. 끝내 카메라 앞에 나타나지 않은 한 사람의 얼굴의 부재가 현실의 참담함을 아프게 전하는데, 이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카메라가 섣불리 판단하거나 다가가거나 찍으려 들지 않는 태도가 영화의 주제와 공명한다.

차창을 프레임처럼 활용하는 방식이 전작 <택시>의 영향인지는 그 이전 작품들을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영화 초반에 차 밖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물을 여러 창들을 오가며 찍는 롱테이크 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미 그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마찬가지로 차창 프레임을 활용한 정말 아름다웠던 장면으로 차 내부의 시점에서 멀리 보이는 시골집을 오랫동안 비추는 롱테이크 신이 있었다. 해가 지면서 바깥의 풍경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자동차 스피커에서는 한 여성이 낭송하는 시가 들리는데, 불이 켜진 집 창 너머로 세 명의 여성이 춤을 추는 실루엣이 보인다(혁명 이후 영화 속에서 여성이 춤을 추는 일이 금지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 집 안에서 각각 미래, 현재, 과거의 이란 여성 예술인이라 할 수 있는 '세 얼굴들'이 어떤 대화를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영화는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감독 자신이 영화 속에 직접 들어가 놓고서 이렇게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니. 그는 영화와 카메라라는 형식의 한계, 그리고 남성 감독인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고민과 겸손의 태도를 견지한 채로 주제를 영화에 담아낸다. 정말 놀랍도록 존경스럽다.

죽어라 공부해서 예술학교에 1등으로 합격한 소녀의 꿈은 가문의 수치지만, 유명 남성 배우나 감독은 자기 아들의 대부로까지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 틈에서 예술의 꿈을 꾼다는 건 어떤 일일까. 막혀버린 길에 차가 멈춰 서지만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그때 영화에 등장한 여성들 중 유일하게 자파리('현재')만이 몸에 두르고 있던 밝은 색의 차도르(아랍권 여성들의 의복으로 알고 있는데, 영화 내내 다른 이들은 모두 검거나 어두운 색을 입고 있었다.)를 마지예('미래')가 입고 있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2018/10/8

커밍 아웃 _ Out

드니 페로, 2018

딱 영화제의 영화 소개 글에 적혀 있는 내용과 같은 영화였고 더 이상 말을 덧대는 건 불필요한 일일 것 같다. 마지막 영상에 등장하셨던 어머니 분의 말씀대로, “달리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니?” 

다만 원제 <Out>을 <커밍 아웃>으로 번역한 건 뭐랄까.. 영화가 한국에 와서 아웃팅 당한 느낌이다.




2018/10/8

라피키, 친구 _ Rafiki

와누리 카히우, 2018

기대만큼 좋았고 기대만큼 아름다웠다. 제3세계에서 온 소수자 인권 영화를 볼 때면 (비교적) 너무나 안락한 세계에서 다양한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는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이 위선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주인공들의 예쁜 사랑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엔 그런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조금 강한 수위의 린치 장면이 나와서 놀라긴 했지만 그때도 문화적 배경 등에 대한 (자칫 시혜적인 시선일 수 있는) 우려보다는 그들이 쌓아 올린 사랑이 무너질까 봐, 그게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또, 퀴어 로맨스 서사에서 다소 전형적이고 그야말로 역할을 위한 역할이 부여되기 쉬운 부모 캐릭터가 다양하고 입체적이었던 점도 참 좋았다.




2018/10/9

행복한 라짜로 _ Happy as Lazzaro

알리체 로바허, 2018

다른 이의 ‘선함’을 오랫동안 착취해 온 인간과 인간사의 본질에 대해 파고드는 신선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우화였다. 영화의 톤이 다소 고르지 못한 부분이나 설명적으로 주제를 전하는 대사들,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는 전개 등의 단점도 눈에 띄었지만, 희미한 미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라짜로의 얼굴이 모든 개연성을 뛰어넘어 영화를 납득시키고 있었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마더!> 때도 생각했지만 이런 영화들의 호불호는 가학적인 착취의 묘사에 대한 당위성을 얼마나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초현실적 장치를 통해 준-봉건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원이라고는 구할 수 없는 인간사에 대한 묘사와 끝끝내 ‘비(非)인간’으로 맺어진 영화의 주제에 충분히 설득됐다. 영화 초반까지는 의심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의 지시와 명령, 부탁 아닌 부탁을 아무런 불신 없이 실행으로만 옮기던 거의 기계에 가까워 보이던 라짜로가 처음으로 다른 인간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겪고 거짓과 모순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다움'(부정적인 의미)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일시정지해버린 그 순간부터 눈이 크게 떠졌고 영화의 주제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더!>나 <행복한 라짜로>는 기호적인 상징으로 뒤덮인 영화(라스 폰 트ㄹㅇ 감독 류의..)들과는 그 결이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주 직설적인 우화에 가깝기 때문에 현학적이고 장황한 의미를 함축한 상징적인 요소들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쓸데없이 긴 부연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명백하게 성경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문외한인 나 같은 관객도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크리스천 관객들 입장에선 영화를 어떻게 볼 지 궁금하긴 하다.




2018/10/9

쏘리 엔젤 _ Sorry Angel

크리스토프 오노레, 2018

영화 초반에서부터 문학, 음악, 미술 등의 레퍼런스들이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인용돼서 그것들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두 주인공의 서사와 로맨스를 따라가는 데에 큰 무리는 없었고 당시 프랑스의 두 세대 게이들의 삶, 문화, 철학, 그리고 당면한 비극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게이 커뮤니티에 닥쳤던 비극의 시기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 <120 BPM>처럼 이 영화 역시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흥겨운 춤과 음악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았던 행복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는 점이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가장 선두에 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파리 운동권 게이들의 <120 BPM>과,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중년의 파리지앵, 먼 지방에서 에이즈에 대한 위기의식보다는 그저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던 청년 게이를 등장시킨 <쏘리 엔젤>이 같은 시기를 상호보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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