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5%의 알코올을 추가하면 즐거울 수 있지

맥주,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by 중앙동 물방개

처음 마신 순간부터 맥주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2008년 친구와 유럽 여행하면서 체코와 벨기에를 갔는데 프라하에서 코젤다크를 생으로 마시니 목구멍이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매사 돌부처 같은 친구의 안면 근육도 그때만큼은 달랐다. 지금은 한국에서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지만, 현지에서 코젤다크를 드래프트로 마시는 맛은 확연히 다르다. 한국 호프집의 차가운 탄산 알코올 보리차가 맥주 전부가 아니라는 점, 해가 아직 중천에 뜨지도 않았는데 식당에서 많은 이가 물처럼 맥주를 주문해도 점원이 이를 당연히 생각했다. 과연 이런 맛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군.


외국 여행하면 마트를 꼭 가는데 브뤼셀의 한 마트에서 낙원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현란한 맥주들이 잘 바른 벽지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벨기에 맥주를 하나씩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친구가 더는 못 기다리겠다며 먼저 마트를 나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행 가방 안에는 람빅, 수도원 맥주 등 한국에서 사기 어렵거나 비싼 벨기에 맥주가 자리를 차지했고 맥주를 위해 가져왔던 옷 몇 벌을 버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 이런 적도 있다. 2006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백패커 생활을 하면서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이 자기만 마시기 눈치 보였는지 6개들이에서 맥주 하나를 뽑아 건넨다. 포엑스 한 병과 이름을 맞바꾼다. 친구들은 자주 취해 있었고 바틀샵은 언제나 지척에 있었다. 절약 정신으로 자주 사진 않았지만 가끔 세일 맥주를 손에 넣기도 했다. 포엑스, VB, 쿠퍼스 등 그 지역을 대표하는 호주 맥주를 보면서 정말 세련된 지역 브랜딩이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한국에도 지역마다 브루어리가 최소 하나씩 있지만, 미국에 비해선 아직 어림없고 지역 주민에게 거주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거나 브랜딩을 하기 위해선 논개 대회나 산천어 축제를 하기보단 지역 맥주를 만드는 게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에 한 회사에 입사하고 퇴근길에 수입 맥주를 하나씩 사서 집에서 마시며 비어저널을 썼다. 개중엔 한 병에 만원을 호가하는 맥주도 있었지만, 고생한 나를 위한 오늘의 인센티브라는 명목으로 호기롭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때 마신 맥주는 운영하던 맥주 페이지와 블로그에도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유수한 맥주 회사로부터 협찬을 받아서 좀 더 맥주를 마셔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작했지만, 일이 많아지면서 결국 7년째 방치상태다)


소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술을 좋아한다. 위스키, 와인은 맥주만큼은 아니더라도 집에 구급상비약처럼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그럼에도 왜 맥주를 좋아하는가 자문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맥주의 평균 도수는 5%다. 여러 술을 15년 가까이 마셨는데도 맥주를 마시고 정신을 잃거나 다음날 심각한 숙취로 하루의 반나절을 날려본 적이 없다. 13.5%인 와인은 발효주 특성상 숙취가 심하기도 했고 위스키는 제법 브랜드별로 많이 마셔보긴 했으나 어쩐지 넉넉하고 편하게 즐길만한 위인은 못 된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첫 모금의 강렬함도 어쩐지 쉬이 친해지기 어려운 요인이다. 어쨌든 맥주는 그날의 기분이나 상태에 따라 도수와 맛을 선택할 수 있고 긴장을 풀어줄 약간의 알딸딸 함을 부여하는 데에 가성비가 좋다. 일정량 이상 마시면 배부르기도 해서 다이어트에도 좋고(?) 화장실 가면 뭔가 다 빠져나간 듯한 기분도 든다.


실제 맥주를 만들어 보면 같은 레시피와 재료로 맥주를 만들어도, 궁극적으로 다른 맥주가 탄생한다. 어떤 순간에 홉을 넣는지, 몇 번 넣는지 어떻게 식히는지 모든 과정과 행동이 변수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사나 악마가 될 수 있는 수련원 교관처럼 맥주 또한 만드는 이의 신념에 따라 수만 가지 다른 맥주가 탄생한다. 모두 같은 목적지를 가기 위해 한낱 한시에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지만, 각기 다른 비용을 지불한 여행객과 비슷하다고 할까. 맥주를 마시다 보면 쓰인 홉의 종류나 브루어리가 써놓은 맥주에 관한 설명만으로 예측 가능한 맛이 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번번이 예외는 등장하며 그 재밌는 예외가 현요한 순간을 만든다. 새로운 맥줏집에 가서 처음 보는 라인업을 볼 때 떨리는 마음과 첫 모금을 머금을 때의 즐거움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


*오늘의 맥주(글쓰면서 마신 맥주): 속초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인 크래프트 루트와 문래 비어바나의 합작품 '크래프트 둔켈 바이젠 복' 맥주 순수령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겐 난리 날법한 혼합 작품, 2020년 12월 중순 크래프트 루트에 가서 사 온 캔을 마시고 있다. 복(bock) 답게 도수는 7.5%, IBU는 20, 둔켈 맥주의 특징이 전반적으로 깔려있지만 모금을 넘길 때는 바이젠의 향이 느껴지고 다 넘기고 나면 피니쉬는 복이다. 도수가 높은 만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첫 잔으로는 마시지 않는데 그래도 크래머리에 가면 복 맥주를 꼭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