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금비 Nov 12. 2023

'쓸데없는 짓'이 시너지를 일으킬 때

"기존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나의 수많은 '쓸데없는 경험'들이
언제쯤 생명력을 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변에서 말하는 소위 '쓸데없는 짓'들을 나는 나름의 '퍼즐조각'들을 모으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흩어져있는 그 조각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나타날 거라고. 그리고 그 막연한 예쁜 그림은 '직업'의 형태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하나의 그림을 타이틀 삼아 평생 동안 살 거라는 큰 착각을 하기도 했다.


브랜딩, 무대공연, 명상, 강사, 마케팅, 비건, 오디션, 쇼핑, 건축, 재능기부, 연기, 영어 과외, 술자리, 콘텐츠 크리에이터, 상담, 봉사활동, 디자인, 요가, 메이크업... 등등 지금까지 나를 나타내던 퍼즐 조각들이 즐비하다. 허나, 한 사람을 구성하는 조각들 치고는 카테고리가 너무 다양하다.


최근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프로그램 <알쓸별잡>에서 다룬 한 사례가 떠오른다:

한 제약회사에서 ‘어떤 사람들이 주로 신약 개발에 성공하는가’에 대해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그건 바로 이 사람 저 사람과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잡담러라고 한다. 자기 팀원들뿐만 아니라 우편배달부, 청소부, 옆 부서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중에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의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창의적인 융합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창의적인 융합'

하나에 끈덕지게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펼쳐가며 일하고 있는 잡다 N 잡러에게 'ADHD'와 같은 용어보다 훨씬 적절하고 있어 보이는 특징을 찾았다.(있어빌리티 +1)




퍼즐조각을 모으는데만 급급할 때도 있었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하루도 새로운 정보나 새로운 경험을 놓친 적이 없다.


식당도 최대한 안 가본 곳을 가려고 하고, 같은 식당이어도 최대한 안 먹어본 메뉴를 먹어보려고 하고, 매일 틀어놔서 대사를 다 외워버릴 것만 같은 [무한도전]이나 [크라임씬] 영상에서도 이전에 놓친 부분을 찾아내고는 즐거워한다.

주기적으로 보는 지인들과의 대화도 늘 새롭다. 만날 때마다 늘 비슷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매번 서로가 새롭게 깨닫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속해있는 커뮤니티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각 자리에서 듣는 이야기의 폭이 굉장히 넓다. 다양한 인간사를 듣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 오랜 기간 학생의 위치로 타지에 거주하면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느끼는 습관이 배어버렸나 보다.


브랜드 컨설팅일을 할 때도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게 즐거웠고 새로 연 팝업공간을 가는 것이 즐겁다. 연기를 할 때도 내가 다뤄보지 못한 세심한 감정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것이 희열이다. 강사일을 할 때도 대상이 초등학생부터 50대까지 다양하고 늘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게 긴장이 되면서도 기대가 된다.


이 정도면 강박 같지만 새로운 것을 하루 빼먹었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으니까 강박이라고는 안 하겠다.

뭐, 이 생활에 단점을 굳이 꼽아보자면 새로운 인풋이 워낙 다양하고 많아서 그런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잘 잊는 편이다. 정말 중요하지 않는 과거는 머릿속 휴지통에 금세금세 버려진다는 점? 사실 이게 장점일 때가 더 많지만.




내게 퍼즐조각 개수가 점점 쌓이는 만큼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너지도 참 다양하게 발현된다:


시너지 예시 1. 브랜딩 x 강사

새로운 브랜드를 마주할 때마다 내 머릿속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차있다: 이 이름은 왜 이렇게 지었을까, 어떤 콘셉트이길래 이런 실험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는가, 가게 위치는 왜 성수동이 아닌 금호동일까, 제품 패키지는 왜 이렇게 불편하게 디자인했는가 등등. 끊임없이 자문하고 자답한다.


이러한 직업병스러운(?) 자문자답 과정은 강사일을 할 때도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강의 주제와 수강생의 정보 및 니즈에 따라 수업명, 수업 분위기, 나의 말투, 옷차림, 필요 소품, 커리큘럼, PPT 디자인 등이 모두 달라진다. 매번 달라지는 강의의 콘셉트와 그에 따라 변하는 요소들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각각의 나만의 이유가 뚜렷하기에 대부분 각 강의를 안정적이고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시너지 예시 2. 무대공연 x 명상 x 강사

무대 위에서 마이크 없이 연극 공연을 올리려면 명확한 발성과 딕션은 필수다. 무대 가까이 앉아있는 관객들에게는 너무 크게 소리를 내지 않는 선에서 뒷줄에 앉아있는 관객들에게 대사와 감정을 또렷하게 전달하기까지 세네 번이라는 무대공연 경험이 필요했다.


이 경험은 명상 지도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는데, 특히 20명 이상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할 때 이 훈련의 결과가 톡톡히 나타난다. 명상 수업 특성상 눈을 감고 강사의 목소리만 듣고 수업을 따라가야 하는데, 가이드 중에 들리는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서 나는 소리, 딕션과 악센트, 말의 속도, 말의 어미처리에 따라 수강생들의 집중도가 확연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해서 무대 위에서 훈련해 왔던 표현법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


시너지 예시 3. 브랜딩 x 연기

브랜딩 과정 중 타깃 페르소나 설정은 필수인데, 브랜드의 고객이 되는 대표적인 캐릭터 하나를 만들어내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이름, 나이, 사는 곳, MBTI, 취향, 선호 브랜드 등 디테일하게 만들어갈수록 더 생생한 고객군이 형성된다.


연극/뮤지컬 공연 준비를 하면서 배우들은 각자 맡은 배역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해 보는 역구축을 한다. 각 캐릭터를 심도 깊게 이해하고 성격 및 배경 등 인물의 스토리를 꾸리는 데 있어서 이러한 페르소나 설정 과정들이 굉장히 유용한 시작점이 되어준다.


시너지 예시 4. 건축 x 콘텐츠 크리에이터 x 재능기부

종합예술 학문이라 불리는 건축 학교를 다닌 덕분에 웬만한 어도비 프로그램은 다 다룰 줄 알아서 그래픽, 영상, 3D 결과물을 내는 데 있어서 구현해 내기 수월하다. 건축과를 들어가면 모든지 할 수 있다는 그 선배 말이 맞았다.


덕분에 현재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콘텐츠나 스마트스토어에 올리는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데 있어 기술적인 두려움이 덜하다. 공연을 올릴 때나 학교 동문회에 쓰이는 포스터를 상대적으로 뚝딱 만들다 보니 재능 기부도 할 수 있다.(예전엔 재능기부가 꽤나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니 내가 얻은 게 더 많다는 사실!)




나의 수많은 '쓸데없는 경험'들이 언제쯤 생명력을 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최소한 더 이상 나의 경험을 하나하나 정의 내리면서 '직무역량'이라는 고루한 틀 안에는 가둬두지 않으려고 한다. 기존의 전형적인 틀로 조각의 모양과 역할을 기계적으로 찍어대지는 않으려고 한다. 맞지도 않은 조각들끼리 힘주어 끼워 맞추며 괜한 억지 그림을 만들지는 않기로 한다.


그저 자유로이 흩뿌려져 있는 나의 퍼즐조각들이 각자 알아서 형태와 성질을 바꾸며, 요래 저래 지들끼리 조합하는 과정 중에 반짝하고 일어나는 시너지의 스파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때가 왔구나' 하고 그저 뜻대로 이행하기로 한다. 융합하는 창의적인 현상 속 그려지는 '명화' 그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매일의 새로움을 찾는 걸 좋아하는 나는, 덕분에 매일 새로운 그림을 기대하며 관람하는 관객이 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배우 할 것도 아닌데 공연은 왜 계속 올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