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무대 위의 나는 정말
‘살아있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혼자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대사를 웅얼댄다. 감정이 담긴 대사를 던질 때는 주변을 쓱 살피다가 아무도 없을 때 표정 연기와 함께 입을 뻥긋 댄다. 누가 보면 오해를 살 일이지만 이렇게 해야 다음 주 무대 위에서 대사를 갑자기 잊어버리는 사태를 최대한 막을 수 있다.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얻은 게 참 많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순간의 내가 좋다. 대체 얼마나 더 무대에 오를 거냐고 묻는다면 답은 ‘모른다.’ 주변에서 꾸준하게 공연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며 “프로로 제대로 데뷔해 봐라!” 하며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한편, “설마 이 고생스러운 길을 택하는 건 아니지..?”라며 우려 섞인 질문을 사람들도 있다. 난 그저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잡아 그때그때마다 열심히 준비하다 보니 4개의 공연을 올린 사람이 되었고, 다음번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오면 또 그때의 내가 결정하겠지 싶다.
현재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새 또 뭐라도 하고 있겠지.
초등학교 4학년 때 반 행사가 있으면 앞으로 나가 SES, 핑클 언니들 춤을 추고, 6학년 때는 방과 후에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춤 연습을 하다가 학교 축제할 때 신화 오빠들 춤을 추기도 했다. 교내외 할 거 없이 동요 대회를 나간 적도 있고, 방학 때는 친구들끼리 노래방에서 일주일에 최소 3번, 한번 가면 서너 시간은 기본으로. 고1 때는 제2외국어로 전교생 앞에서 연극과 노래 발표를 하는 축제도 있었는데, <빨간 모자>의 늑대 역할을 맡아 일본어로 연극을 올린 기억도 난다. 중학교 때 종종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샤> 덕분인지 축제 이후에 나는 ‘그 일본인처럼 말하는 애’로 통했다.(내가 성대모사를 잘한다고 말했던가~?)
고등학생 시절, TV에 나온 한 뮤지컬 배우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춤, 노래, 그리고 연기까지 하면서 살다니? 그게 가능하다고?’ 하며 그때부터 내 가슴에 ‘뮤지컬’이라는 단어가 꽂혔다. 나의 첫 뮤지컬 관람은 약 10년 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본 뮤지컬 ‘맘마미아’였는데, 정말 2시간 반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바로 눈앞에서 배우들의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고, 그들의 완벽한 노래와 단체로 추는 군무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당시 건축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있던 나는 뮤지컬 배우의 그림자라도 밟아보자 하며 무대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고, 한때 브로드웨이 무대를 디자인하는 건축 회사만을 골라 투어 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 내 실질적인 앞길에 대한 고민이 커('그래서 나 뭐 하지?') 뮤지컬과 같은 사치스러운 꿈은 가슴 한켠에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미뤄져 잊혀 있었다. 가끔 가는 노래방에서만 지인들 앞에서 독무대를 연출하는 정도?
하지만 서른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느낀 삶의 허무함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삶의 동력을 준 계기가 되었다.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거 다 해!’하며 덜컥 한 직장인 뮤지컬 동호회에 가입했다. 평소에는 퇴근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거나 친구들 만나서 일에 대한 푸념을 술로 푸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연기와 노래를 하러 사당에 가는 날엔 에너지가 넘쳤다. 기초반 7주 과정을 마친 날, 공연장을 빌려 초대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그동안 연습한 뮤지컬 장면들을 연기하고 노래했다. 정말 그때의 긴장감과 희열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무대 위의 나는 정말 ‘살아있었다.’
첫 동호회 활동을 마치고 회사일과 연애에 집중한다고 잠시 쉬기는 했지만, 퇴사와 이별 후에 함께 찾아온 엄청난 슬럼프에서 겨우 빠져나올 때쯤(명상 덕에 빠져나왔던 그때다!)에 그 ‘살아있음’을 다시 찾기 위에 새로운 아마추어 뮤지컬 극단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중간 이상의 실력을 인정받은 덕에 극단 내 창작 작품 오디션도 참가하게 되었고 조주연 배역도 얻어버렸다. 그 작품으로 <포르셰 코리아 x 서울 문화 재단> 지원을 받아 대학로에서 연극도 올리게 되는데, 그날부터 내 이름을 검색하면 ‘연극배우’로 뜨는 재밌는 이력이 만들어졌다.
그 후 중극장에서 뮤지컬도 올리고, 소극장에서 연극도 올렸다. 짧게는 4개월, 길게는 반년 동안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 내내 거의 그 작품만 생각할 정도로 고민하는 그 과정자체가 즐겁다. 연출과 동료 배우들과 함께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똑같은 장면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연기를 해보며 수많은 연습을 반복적으로 한다.
게다가 공간 대관, 무대 세팅, 조명 세팅, 음향 세팅, 의상소품 준비, 프로필 사진 촬영, 포스터 제작, 캐스팅 보드와 티켓 제작 등 하나의 공연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서 배우가 자신의 배역 연기를 제대로 하는 것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애정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로 배우로 전향하고 싶은 배우들도 있고, 본업을 가지고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하는 배우들도 많다.
그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결과물은 단 3일 동안 몰아치듯 무대 위에 올라간다. 직접 대관한 공연장에 우리의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티켓부스를 지키고 입장 관객들을 안내한다. 내 회차가 있는 시간에는 배우 대기실에서 긴장을 푼다고 배우들과 낄낄대지만 현실은 덜덜 떨면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연습 중 최고버전은 아니더라도 실수 없이 연습한 만큼이라도 하자라는 마음으로 공연을 한다.
무대 위에선 너무 큰 긴장감에 실수 한번 안 하던 사람도 대사 한 문단을 왕창 까먹을 수도 있고, 음향이나 조명 감독님이 실수를 하실 수도 있고, 관객석에서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수도 있다. 참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두 시간 동안 배우와 스탭 모든 사람들이 순간순간 몰입하며 멘탈을 잘 잡아야 한다. 정신줄을 꽉 잡으며 최선을 다해 연기를 마치고 커튼콜에서야 비로소 안심하며 배시시 웃을 수 있다. 커튼콜에서 그제야 보이는 관객들의 웃음기, 눈물기 어린 눈망울들을 보자면 정말 마음이 벅차다. 지금까지 쏟아낸 노력의 보상을 받는 시간이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것은 참 짜릿한 일이다. 맡은 배역에 대해 연구하고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이런 상황에 나였다면?’이라는 질문을 통해 나에 대해 알아가기도 하고, 인간의 다채로운 성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폭넓은 시각도 갖게 된다. 몸짓 하나 억양 하나의 차이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는지 아는 커뮤니케이션 스킬도 늘었다. 평균 2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실수 없이(늘 한 두 번쯤은 나긴 하지만;) 한큐로 진행해야 하니 집중력도 올라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닌 무대 공연은 팀워크가 생명이라 동료 배우들 간의 소통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대부분 소극장에서는 마이크 없이 연극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맨 뒤에 있는 관객에까지 잘 전달하는 또렷한 딕션과 발성훈련도 필요하다. 관객이 웃고 우는 반응을 제대로 이끌려면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센스도 필요하다.
사실 이런 훈련덕에 내가 하고 있는 [명상지도강사], [디지털 마케팅 강사], [뮤지컬 강사] 등등 강사 일을 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사장님을 부를 때도 내 발성이 아주 유용할 때가 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렇게나 다방면으로 도움이 되는 연기인데, 왜 필수 교육이 아닌지 잘 모르겠다.
배우 할 것도 아니지만 공연을 계속 올리는 이유는 이렇게나 많다. 공연을 올리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면서 연기실력도 늘고, 전체 과정을 총체적으로 보는 연출의 시각도 가져도 보고, 포스터도 내 입맛대로 디자인해서 많은 이들에게 보이기도 하고, 극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대부분 타인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성향들이라 대화하기도 편하다. 그동안 함께 활동하며 얻은 소중한 인연들이 정말 많다.
다양한 필드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그리고 운 좋게도 그들 덕에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되는 기회도 가졌다. 이후에 [디지털 마케팅 강사], [뮤지컬 강사],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강사] 기회를 얻게 된 것도 배우 활동을 하다 알게 된 인연들을 통해서였는데, 나와 붙어있던 긴 시간 동안 내 성향과 역량을 잘 파악해 준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공연 준비를 통해 구구절절 내가 얻게 된 이득을 나열해 보았지만 사실 이런 것들 다 떠나서 제일인 것은:
좋은 공연을 올리자는 목표 하나로 한마음으로 한데 모여 몇 개월 간 연습실에서 사부작대는 동료배우들과 연출진들을 바라보자면, 그 순간순간에 서로 함께해 주는 그 자체가 감사하고 사랑스럽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마찰도 지나서 보면 그저 뜨거운 열정이 지핀 작은 불꽃들이었을 뿐이다. 배우들 개개인마다 어떤 열망이 있어 모이게 됐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와 공통된 시간을 공유해 준 그 사실만으로도 참 영광인 일인 것이다.
나열하면 나열할수록 이렇게나 나만의 다채로움을 기분 좋게 발산시키고 여러모로 나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는 이 예술활동을 나는 계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