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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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의 교복은 아래위로 빨간색이다. 왜 하필 빨간색인지. 그것도 농익은 자두의 선연한 핏빛. 교복 색만으로는 좀처럼 이 학교에 들어올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붉은 돼지 군단. 다른 학교 학생들은 우리 학교 학생들을 이렇게 부른다.

그때마다 정신승리를 해야 하는 건 우리의 몫.

우리 교복의 빨간색은 한국에서 박해를 받고 돌아가신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고 입학식 때 교장 수녀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우리 학교는 오십 년의 유서 깊은 카톨릭 재단의 사립 고등학교라고. 성심원이라는 보육원도 운영 중인.


하지만 오늘 새벽, 오 마이 갓! 이 놈의 교복 색이 제대로 일을 쳤다.


우리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밤새 들어온 사건, 사고를 들으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빼놓지 않고 뉴스가 거실을 울린다.

귓등으로 뉴스를 들으며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산시 도정동’ 이라는 말이 들렸다.

오 마이 갓!

도정동이라고?


뭐?

난 숟가락질을 멈췄다.


-부산시 도정동에서 오늘 새벽 여고생이 칼에 목이 찔린 채 아파트 뒤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성범죄로 보고 국가수에 감식을 의뢰하였습니다.-

낯익다. 화면 속의 저 아파트.


오 마이 갓!

내가 살고 있는 대륭 아파트잖아. 몸이 덜덜 떨려왔다.


학교에 가려면 노란색 셔틀 버스를 타야 한다.

아파트 앞에는 다 합쳐서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셔틀버스를 기다린다.

늘 보는 얼굴들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낯설다. 경직된 얼굴로 모두 내 교복을 쳐다보는 그런 느낌?

그랬다. 불과 세 달 전에는 우리 학교 일학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놀이터.

그 곳에는 뭐 하러 간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가 안경이며 가방 등 그 애의 흔적이 발견된 최종 장소였다.

집에 가고 있다는 전화를 끝으로 밤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 경찰에 알렸다고 한다.

사진 속의 그 아이는 얌전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고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반이 다르기도 하고 그 애가 워낙 조용한 아이였던 탓인지 그 사건을 듣고서도 솔직히 그 애와 마주친 기억이 날 듯 하면서도 나지 않았다.

그 사건은 미결로 마무리 되었고 다시 볼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전교생은 그 아이를 위해 미사를 드렸다.


담임은 아침 자습 시간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 반장이 교탁에 나가서 애들을 감독했다. 반장은 담임을 닮아 사나웠다. 뒤 애가 등을 두드렸다.

쪽지가 왔다. <백합반 김민희래. 새벽 두 시에 독서실에서 혼자 오다가 ㄷㄷㄷ ㅠ.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야, 거기 뭐야. 적는다. 반장이 눈치를 채고 소리를 쳤다.


명상의 시간이 시작되도록 담임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 조례를 하기 전에 십분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명상을 하도록 만들어진 시간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서를 순화하는 게 그 시간의 목적이었다. 오늘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첼로의 묵직한 가락을 따라 그 애의 최후가 펼쳐졌다. 교복을 열어젖힌다. 단추가 떨어진다. 분명 소리쳤을 텐데 왜 아파트 사람들은 아무 소리를 못 들었지? 듣고도 모른 척 한 건 아니겠지? 쓰러뜨린다. 빨간 치마 속에 손을 넣고......


좆같은 교복 색깔.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학교를 탓했다. 빨간 색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건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 아닌가. 물론 교복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빨간 색이 그 놈을 더 흥분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다간 다음에 또 누가 죽어 나갈지 모를 일이다.


죽은 아이의 반은 언제나 북적댔다.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그 반 앞을 일부러 들렀다. 그 반 애들 표정은 하나같이 침통했다. 백합반에 친구가 있는 애들은 그 반에 다녀올 때마다 정보 하나씩을 가져왔다.

사물놀이 반이었대. 환경미화부 부장이었대. 엄청 착하고, 귀여운 애였대. 애들 다 걔 좋아했다더라.


우리들은 실종된 아이와 죽은 아이 간의 공통점을 밝히느라 분주했다. 둘 다 일학년이다. 실종된 애는 일반 30번이었고 죽은 애는 삼반 42번이었다. 그럼 혹시 오반 54번? 다행히 오반에 54번까지는 없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늘 일본 추리물 만화를 대여해주는 아이였다. 이제 곧 죽은 애 영혼이 와서 다음 애를 지목할 거야. 밖에 성모상 있지? 너네 그 성모상 바뀐 거 모르겠니? 애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표정이 바뀌어.


수녀 선생님들은 의도적으로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온화한 표정을 자랑하는 수녀님들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으로도 그들의 심란한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영어 시간은 차라리 살얼음이었다. 장명근은 뒷자리에서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진희를 불러내어 진희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빌 때까지 출석부로 어깨와 머리통을 내리쳤다.


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자율학습이 되었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교를 떠났다. 교실은 듬성듬성하게 비어 있었다. 그나마 아홉시 반이 되면 운동장에 들어서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창밖이 훤해졌다.


“교복 색깔 좀 바꿔요.”


“진짜 좀 바꿔줘요.”


우리는 만만한 철학에게 하소연을 했다. 철학은 대학을 졸업하고 갓 부임해 온 총각이었다. 첫 시간에 자신은 원래 신부가 될 생각으로 철학과에 들어갔다고 했다. 우리는 야유했다.

안 어울려요.

평소 잘 까부는 진희가 소리쳤다.

그는 동의한다며 만약 신부가 되었다면 신부 서품을 받는 날 그 옷을 입은 채로 나이트에 가서 춤추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첫 시간 이후 우리에게 일약 구세주로 떠올랐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애들은 그에게 다시 신앙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를 설득했고 아이들의 말이라고 그냥 하찮게 들어 넘길 줄 모르는 그의 성품 때문에 논박이 오갔고 철학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왜요?”

우리는 동시에 물었다.

“만약 여기서 교복을 바꾸면, 교복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우리가 인정하는 꼴이 되는 거잖아요. 그걸 윗분들이 원하겠어요?”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중간고사 때는 시험 기간 내내 교실에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시험 때는 교실에 오래 남아 있는 아이는 몇 없었다. 여섯 시쯤 되자 교실은 휑해졌다.

출출해져 매점에 갔다. 듬성듬성 불 꺼진 복도를 지나 지하 일층의 매점에 도착했다. 빵과 우유를 사고 의자에 앉았다.


아니, 건너편에 누군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이리 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혜경이.

나와 같은 독서실에 다니는 아이. 같은 반이지만 우리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왠일로 아는 척?

나는 혜경이 쪽으로 가지 않고 다른 의자에 앉아 빵 봉지를 뜯었다. 그러자 혜경이가 내 앞으로 와 앉았다. 매점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처음 듣는 혜경이의 목소리였다. 낮고 허스키했다.


“뭘?”

“목산 고등학교 다니는 내 친구가 있는데.”

목산고라면 부산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학교였다.

“어.”

“우리 학교 선생이 따 먹었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조금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긴 했다.

“철학?”

“아니.”

“그럼?”

“미술. 그 사람 집에서 했는데 집어넣으면서 울었대. 비밀이야. 더 웃긴 거, 그 새끼가 절대 교복 못 벗게 했대.”

싸이코 새끼. 난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밀하고 축축한 곳. 그 애는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갑자기 뭔 소리야?”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같은 종류야. 색깔만 다른 사탕이라고나 할까.”

혜경이로 말하자면 여러모로 미스터리한 구석이 많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와 독서실에 다니는 목적이 다니다. 나는 코 박고 공부하는 스타일이라면 그 아이는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왜?

그도 그럴 것이 독서실에 도착하면 사라진다. 그리고 열두시 경 돌아온다. 어디에서 오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잔다. 책상 위에서. 그래놓고 새벽 두 시 경에 집으로 출발하는 셔틀버스에 탑승한다. 그게 다이다.

나와 또 다른 점 하나.

그 아이는 예쁘다. 늘씬늘씬한 스타일이다. 얼굴도 작고. 차가워보여서 그렇지.

아! 노는 애들하고 다른점이 있다. 노는 애들은 대개 교복 치마를 미니스커트 정도로 짧게 올려 입는데 혜경이는 그렇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한마디로 앞다르고 뒤다른 아이이다. 학교에서는 그 애가 모범생인 줄 알 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아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친구? 갑자기 친구하자고? 지금까지 전혀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정말 알 수 없는 아이.

조심해야해.

아빠가 그랬다.

뜬금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 계획이 있는 거라고.

"웃기시네"


독서실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탈 시간. 다시 혜경이를 만난다. 가볍게 무시.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는 내게 해맑게 웃어온다.

우리가 버스를 탈 때 노골적으로 우리를 시선으로 훑는 사람. 아우 더러워. 버스 기사 아조씨. 사실은 내가 아니라 혜경이의 다리를 훑는 거지만.

아무튼 더럽다.

독서실에 가려면 바닷가 도로를 건너야 한다.

이 미친 또라이 버스기사 아조씨는 이 구간에서 문을 열어젖힌다. 이상하게 나도 싫지 않다. 이상하게 나도 따라서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쐬게 된다.

제발, 노래는 스킵해주세요!

가끔가다가 이 아조씨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는데 정마아알 음치이다. 다행히 오늘은 그건 아니네.

아조씨는 문을 열고 나도 창문을 연다.

사방이 바닷바랍이다. 휘이이잉.

머리가 춤을 춘다.

시원하다.

아 ! 좋다, 좋아!

이 맛에 독서실 다니지. 독서실 다니는 나만의 작은 소확행이라고나 할까.

바닷가 구간을 지나고 시내로 접어들자 아조씨는 문을 닫는다. 홱.

다시 찾아온 조용함.

라디오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부산 청안동 이선명 학생이 신청했습니다. 아 오늘 학생회장이 되었다구요. 축하해요. 저희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선명 학생에게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바로 내 사연.

학생회장?

개 뻥쳐서 얻어낸 선물.

이렇게 개 뻥쳐서 얻어낸 선물로 내 방은 가득차 있다.

상품권에서부터 곰 인형까지. 없는 게 없다.

아무튼지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독서실에 도착했다.

사람 머리통들밖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독서실.

"그럼 즐공!"

어느 새 사복으로 갈아입은 혜경이가 내게 인사하고 유유히 독서실을 빠져나간다.

저 이중생활자.

미니스커트에다가 어깨살이 보이도록 내린 느슨한 티.

나는 나만의 싸움을 시작해야지.

'나는 책상에서 세상을 본다.'

이게 나의 모토.

지금은 육지거북이처럼 땅에 코박고 돌아다니지만 고 3이 끝나면 저 바다를 건널거야~

그리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다시 찾아야지.

내 전성시대는 초등학교 때였다.

모두 비웃겠지만.

그땐 정말 학생회장이었는데. 개뻥이 아니라, 진짜로.

그리고 인기 정말 많았는데.

역변.

역변의 아이콘.

그것은 바로 나.

지금 나는 예전의 밝음이 없다. 반짝반짝하지 않다.

어느 정도는 내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외향적이게 생활하면 그때부터 친구들 만나야지, 관리해야지, 신경써야지, 공부 이외에 신경쓸 일이 많으니까.

하지만 바다거북이처럼 그냥 내 먹을 먹이만 먹고 빵 속으로 파고들고 그렇게 살면 내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되니까, 그러면 시간 절약이 되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내향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 부산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사실 나는 부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여기에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격도 확 변하고, 성적도 확 올라가고......

중학교 때 전학 왔으니까 그렇게 산 지 벌써 6년째네.

아무튼 지금 난 공부할 때.

다시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은 대학 입학한 후로 미루고 오늘 공부할 것들을 훑어본다.

일번으로 세계사 복습하고 그 다음엔 수학 문제집 풀고, 그리고 가볍게 영어 문제집 풀어주면 되는군.

자, 그럼 어디 공부를 시작해 볼까.

아관파천.

아관파천이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로 일년간 피신한 사건. 1896년.

1896.1896 아관파천. 러시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줌이 마렵다.

화장실로 가는데......

화장실로 가는 길은 어둑하다.

여자 화장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사람은?

응?

혜경이다.

그리고 뒤 이어 쭈뼛쭈뼛하며 따라나오는 남자애.

이것들이 화장실에서 뭐하다 나오는 거야?

내게 해맑게 웃어보이고 자리를 떠나는 혜경이.

남자 아이가 황급히 3층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거 확 독서실 관장님한테 불어버릴까?'

'아오. 신경질 나.'

손을 씻으며 난 거울을 들여다본다.

저들은 여자화장실에서 뭘 했을까?

언젠가 화장실 옆 칸에서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끈적끈적하게 입술이 맞붙는 소리.

"야, 누구 왔나 봐."

"아. 못참겠어."

"얼른 끝내."

"알았어. 알았어."

놀랍게도 둘 다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아오.

얼른 여기를 떠야지.

미운오리새끼가 사실은 백조 새끼였듯이, 나도 고삼이 끝나면 백조로 변해서 하늘로 훨훨 날아갈거야.

그리고 여기서의 삶은 다 잊을 거야.

그렇게 자유롭게 서울에서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할 거야.

손을 씻고 독서실방에 돌아오자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혜경이가 잠을 자고 있다.

그래, 언제나 이 아이는 잠을 자지.

밖에 나갔다 온 후에.

정말 알 수 없는 아이야.

몰라, 나랑 상관 없는 이야기.

그러거나 말거나.


열두 시만 되면 죽은 애들이 학교를 돌아다닌다는 괴담이 돌았다.

교장 수녀님은 추도 미사 시간에 끝내 눈물을 보였다.

하느님이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 줄 거라고 했다.

교장이 그 말을 하고 있는데 내 앞에서 갑자기 재희가 앞 아이의 어깨에 고개를 갖다 박았다.

그 아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 재희는 곧장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난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가을날, 낙엽이 떨어지듯 그 모습은 그저 자연스러웠다.

자는 상태에서 이층 침대에 떨어질 경우에 사람은 심각한 상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났다.

의식을 잃는다는 게 사람을 저토록 자유롭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철학이 내달려와 쓰러져 있는 재희를 등에 업었다. 모두가 멋있다는 생각을 한 듯 ‘우’소리를 합창했다.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서는 커트 머리를 한 언니들이 농구를 했다.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언니를 응원했다.

그 언니들은 학교의 동방신기라고 불리며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조금 통통하고 골격이 큰 언니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짝 언니도 나쁘진 않았다. 우리 학교는 짝 제도가 있었는데 그건 각 학년별로 번호와 반이 같은 세 명이 서로 챙겨주고 친하게 지내는 거였다.

가령 1,2,3학년 1반의 13번, 이 세 명이 짝이 되는 거였다.

화이트 데이 날 서로에게 사탕이나 초콜렛을 주면서 친하게 지내곤 했다.

내 짝 언니는 커트 머리에 키가 170정도 되는 보이시한 스타일이라 우리 반 애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 무렵 어떤 흥분 같은 게 학교 전체를 후끈 감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일견 뭔가에 신이 난 듯도 보였다. 선생님들도 활기에 차 있었다. 밤일만 하느라 학교 오면 축 처지는 게 분명해. 늘 충혈된 눈으로 등장해서 칠판에 문제만 가득 풀다 돌아가던 수학의 목소리에도 힘이 붙어 탱탱했다.

그렇게 일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야. 김소영. 너 담임이 교무실로 오래."

점심 시간에 언니들 농구하는 걸 감상하고 있는데 돌연 반장이 날 불렀다.

"왜?"

"내가 알아?"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서는 반장.

담임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매일 곱게 화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이사이 파운데이션이 얼룩져 있었다. 모공도 참 넓네.

무엇보다 임신중인 담임은 늘 배를 무의식중에 쓰다듬곤 했다.

그걸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담임이 섹스를 해서 아이를 가졌다니.

그럴 때면 섹스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은 내게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발신자는 이윤우.

초등학교 때 남자친구였다.

-보고 싶어.

편지의 시작은 난데없는 고백이었다.

야.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

그가 지금의 날 본다면 실망할 게 뻔했다.

난 초등학교 때처럼 빛,나,지 않으니까.

뚱뚱하고 못생겨졌으니까.

아무도 내가 초등학교 때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난.

초라해졌다.

예전의 인기많던 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나.

아이들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던 나는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우울하고,

내 안에 갇혀 있는

못생기고 뚱뚱한 나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왜.

-만나고 싶어.

내가 갈게.

부산으로.

7월 15일 여기서 11시 차 타고 갈 거야.

거기 세시쯤 도착할 테니까 나와 있어.

다짜고짜 만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


그런데 왜, 담임은 내 맘대로 편지를 읽은 거지?

"이윤우? 너 설마 남자친구 있니?"

어처구니 없다는 담임의 표정.

"남자친구는 대학에 가서 얼마든지 만나도 돼. 지금은 공부할 때야. 알지?"

차가운 담임의 말투.

편지를 받아들고 화장실로 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은우.

우리는 대학교 때 만나기로 했잖아.

그 약속 하나 믿고 난 지금까지 공부만 팠어.

여기로 이사오면서 성격도 완전 내성적으로 바꾸고 공부에만 집중했다고.

인서울해서 너하고 만나려고.

그런데 만나자니?

그것도 일방적으로.

아니, 왜 넌 우리의 내밀한 사랑을 공부를 위한 동력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거지?

나처럼.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말야.

난.

자신이 없어.

네가 날 만나고 나면 넌 나에게 실망할 게 뻔해.

다 알고 있어.

그리고는 날 잊겠지.

서서히.

네 기억속의 나는 찬란한, 잘 웃는, 명랑한, 리더십 있는, 인기 있는, 그리고 귀여운

여자아이이니까.

지금의 나는 무겁고, 말이 없고, 내향적인, 못생긴

그런 여고생이니까.

아......

어떻게 하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휴.

나머지 시간들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저녁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끝나고 독서실 가는 시간.

셔틀버스를 타러 교문 앞에 서 있다.

"안녕!"

반짝 웃으며 내게 인사하는 혜경.

그리고 혜경의 다리와 얼굴을 훑으며 지나가는 남자아이들.

그 순간.

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혜경이를 대신 내보내는 거야.

나 대신.

이리저리 둘러대라고 하지 뭐.

"너, 남자 소개시켜 줄까?"

난 대뜸 혜경이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혜경이.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나는 혜경이에게 그렇다 할 말을 건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 남자. 잘생긴 애."

"확실해?"

"아마도?"

"뭐 대답이 그래? 사진 있어?"

난 아까 편지에 윤우가 동봉해 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훤칠한 키.

맑은 미소.

작은 얼굴.

"어때 이 정도면?"

"오. 괜찮다. 어디 사는데?"

"내 고향친구인데, 말하자면 길어. 암튼 만날 거야. 안 만날 거야."

"당연히 오케이지! 콜!"

혜경이는 좋다고 했다.

그래. 됐다. 됐어.

"그래. 7월 15일 토요일 3시 기차역에서 기다리면 돼."

"알았어."

셔틀버스가 도착했다.

또 한번 혜경이의 다리를 시선으로 훑는 저 또라이 기사.

더러워.

셔틀버스에 타면 남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혜경에게 집중된다.

나는 알고 있다.

다 혜경이에게 맘이 있다는 걸.

뭐, 그게 세상 이치지.

예쁘고 명랑한 여자애한테 맘이 가는 게.

-난 책상 앞에서 세상을 본다.-

내 모토가 써져 있는 내 독서실 책상에 앉는다.

조용하다.

혜경이는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도대체 어디에 가는 거야?

매일같이.

내가 알게 뭐람.

나는 부지런히 공부를 한다.

아. 이놈의 수학.

이 수학만 없었어도.

지금 내 성적은 반에서 2~3등 하는 정도이다.

연고대에 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성적.

다 수학에서 깎아먹는다.

수학은 나의 적.

"수학 점수가 이게 뭐야?"

언젠가 학교 선생님인 아빠는 성적표를 보고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다른 것은 다 백점인데 수학만 90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났다.

펑펑 울어버렸다.

저도 너무 속상하다구요.

수학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미치겠다구요.

차라리 그럴 때면 장애인 동생이 부러워요.

아빠는 동생에게는 웃어주기라도 하잖아요.

하지만 나한테는 늘 딱딱한 목소리죠.

아빠, 언제 나한테 살갑게 대해준 적 있어요?

내가 고추만 달고 태어났더라도......

동생이 태어날 일은 없었겠죠.

난 셋째딸이니까요.

"쟤가 고추만 달고 태어났더라도......"

동생이 지적 장애인으로 판명되자 할머니가 내뱉었던 말.

그거 아세요?

저 엄마가 그러는데 네 살 때 서서 오줌눈다고 땡깡 피우다가 혼났대요.

남자애처럼 되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난 이렇게 미치게 공부하는데......

아빠는 나한테 칭찬 한 마디도 안 해주고.

그리고 내 정신적 지주인 윤우는 갑자기 만나자고 그러고.

정말 내 인생 이게 뭐야.

잊자. 잊자. 다 잊자. 공부에나 집중하자.

여기를 뜨는 거야.

일년 후에

멋지게.

백조가 되어서.

훨훨 날아가는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김없이 바닷가 도로에서 또라이 기사 아조씨는 앞문을 열어젖혔다.

라디오에서는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대여 난 기다릴 거예요

내 눈물의 편지 하늘에 닿으면

언젠가 그대 돌아오겠죠 내게로

난 믿을 거예요 눈물 모아~~~~"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그러거나 말거나 난 창문을 열어젖혔다.

강한 바닷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바닷냄새를 품은 바람이었다.

시원해.

세상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그런 바람이야.


집에 도착.

엄마가 졸린 눈을 하고 문을 열어줬다.

난 죽은 아이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그 아이의 베스트 프렌드가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도 방문객은 천 명을 넘었다.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그 아이의 홈피 주소를 알게 되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방명록 내용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좋은 곳에 가라는, 명복을 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난 게시판으로 가 살아생전 그 아이가 남긴 글을 보았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자기가 직접 핸드폰으로 찍은 것 같았다. 그 밑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잠과의 사투, 나는 잠이 너무 많아ㅜ.ㅜ 요샌 자두 자두 왜케 졸리지;; 정신 차리자, 정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잠 잘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라는 말은 독일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독일어는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영원히 잠을 자는 거라면서 살아 있을 때 시간을 아끼라는 말을 습관처럼 뱉었다.

그 인간은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는 애 이마에 분필을 던져 맞추는 거였다.

어느 날 그 일을 실제로 당하고 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건 인격 모독이잖아요’ 하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뱉고 나서 난 스스로에게 놀라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내 당황한 모습이 반성의 의미로 읽혔던지, 아니면 평소 조용한 내가 이 말을 한 게 그도 믿기지 않았던지 독일어는 내게 걸어오다가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 애도 독일어한테 분필을 맞은 적이 있었을까.

사진첩에는 그 애의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단발머리의 아이였다. 나는 그 애 얼굴을 기억했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떨까. 누가 내 팔을 붙잡고 강제로 끌고 간다면. 좆을 확 차버려야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중학교 때였다. 그 때는 아파트가 아닌 일반 주택에 살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두고 흙집과 튼실한 이층집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곳이었다.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길이 좁았기에 난 길 옆으로 바싹 붙어 섰다.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토바이는 속도를 줄이더니 내 아랫도리를 쓱 만지고 붕 떠나는 거였다. 순식간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간지러우면서 부드러웠다. 기분이 좋았다고 정직히 고백해야 할까.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난 여자 중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반에서는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키스가 인사와 같은 일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것도 혀를 사용하는 키스. 그걸 주도하는 아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아주 활달하고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 있는 아이였는데 유독 키스하는 걸 좋아했다.

부반장 애와 그 아이는 보란 듯이 혀를 섞어가며 공개적으로 키스를 했고 우리는 그들을 부부라고 불렀다.

난 그 애가 내게 키스를 해 올 때마다 피하거나 살짝 입술만 부딪쳤다.

하지만 어느 비가 오는 날 오후는 잊을 수 없다. 그 애가 내게 키스를 해 올 때 내가 그 애를 꽉 안고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적극적으로 키스를 했던 거다.

혀는 넣지 않았지만 무척 강하게 입술을 빨았다. 그 순간 그러고 싶었다. 그 밖엔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욕정이었을까. 반장은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무척 당황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