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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이야기
모르는 게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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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Jan 31. 2023
남편: 이 도마. 그냥 헹구기만 하면 돼. 마늘만 썰었어.
오랜만에 남편이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된장 찌개를 끓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옆에서 보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도마를 건네면서 내게 헹궈달라고 부탁했다.
아, 맞다.
갑자기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 그것은 바로 그날 아침 고영희 님이 그 도마를 즈려밟고 가던 장면이었다. 집안 곳곳을 누비는 고영희님. 화장실 바닥도 밟고, 모래도 밟고, 침대 밑도 거실 구석구석도 다 밟고 다니는 고영희 님께서 도마를 밟고 지나갔다.
나는 도마를 뒤집어서 반대편에다가 재료 손질을 하고 제 자리에 꽂고 말았었다. 그 도마는 양면으로 쓰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점심을 준비하며 그 도마를 꺼내서 그 위에다가 채소를 썰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도마를 고영희님께서 밟고 지나갔다는 걸 남편이 알고 있었더라면, 그래도 채소를 썰었을까. 아무렇지 않게. 깔끔쟁이인 남편 성격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세제로 도마 양면을 박박 닦았을 것이다. 두 면 중에 어디에 닿았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
남편은 이미 도마 위에다 채소를 썰고 난 후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당신은 지금 고영희님이 지나간 도마 위에다 채소를 썰었다고.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나는 도마를 받아들고 남편의 말대로 물로만 씻어 개수대에 얹어버렸다.
된장찌개는 맛있었다.
도마 사건의 주인공이신 둘째 냥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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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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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없는 결혼 생활
저자
프로 딴짓러. 부업 영어 강사. 글쟁이. 골방댄서. 고양이 아들 세 명, 거북이 네 명, 남편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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