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끝(10)
주말이라, A랑 술한 잔 했다.
평소 생사확인만 하다가, 그나마 술이 들어가면 대화라는 걸 한다. 둘 다 술은 잘 못하는 편이다.
오늘은 각자의 ‘취향’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저번 주, 수업 시간에 언급한 브루디외(Pierre Bourdieu)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몇년 전, 교육학에서 처음 그의 아비투스(habitus)개념을 접했을때, 나는 지난번 들뢰즈(Gilles Deleuze) 만큼이나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언어적, 문화적 능력이 ‘문화자본’인데 이는 태어날때부터 존재했던 주변 문화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주관적 문화자본’이 있으며, 명품, 그림등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객관화된 자본’ 그리고 교육을 통해 자격증, 학위등을 받아 획득하는 ‘제도화된 자본’이 존재한다.
이 중, ‘주관적 문화자본’은 선천적인 것이며, 오랜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으로 처음부터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차이는 두 계층간의 출발점 자체가 다르므로 노력하고 흉내낸다고 그 갭차이를 줄이는 것은 힘들다.
아비투스(habitus) 즉 취향은 특정 계급이 그들의 생존 환경을 조정하면서 영구적으로 변동 가능한 성향체계로 만들어진것이다. 졸부가 명품을 사고 건물을 사고 명예학위를 딸 수는 있지만 삼성가에서 아예 태어나고 자라 교육받은 이의 기품을 흉내낼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있는자들이 그들의 문화를 없는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화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징적 권력’이며, 실제로 문화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일 수록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성공할 가능성 또한 높다고 할 수 있다. 브루디외는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 명하며, 계급화된 사회는 ‘상징적 폭력’을 매개로 하여 재생산된다고 하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딸려는 것도 이러한 연유는 아닐까?’
어쩜 재벌가에 태어나지 못한 이상, 자신의 문화 태생적 열등감을 ‘교육’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자신도 요즘 ‘스파이 패밀리’라는 만화 시리즈물을 보면서 ‘엘레강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며 또 나를 저격하는 발언을 시작했다.
내가 너무 꾸미지 않고 청소도 않하고 공중도덕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취향은 뭔가 고상한 것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사소한 습관, 버릇이 모여서 체형화되는 것이라며 설교를 하였다.
일부 맞는말이긴 하다.
‘그럼 너는?’
이란 물음이 목구멍 앞에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살면서 이런 직언을 해줄 사람이 부모님, 가족 말고 누가 또 있을까? 고치지 못해도 옆에서, 떠나지도 않으면서 계속 잔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