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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25. 2022

결혼 20주년 여행 첫날밤에 사라진 남편

마음에 담아두었던 결혼 20주년 유럽행이 남편의 바쁜 일정으로 무산된 후.


3박 4일이 아니면 어렵다는 남편의 통보에 심드렁해진 나는 '20주년 여행 따위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유럽, 그중에서도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스위스를 못 간다면 어디든 내키지가 않았다. 나는 토라진 아이처럼 20주년 여행이 당기지 않는다며 어깃장을 놓았고, 당신이 못 가면 혼자라도 스위스를 가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결국 서운함을 참지 못한 남편이 따지듯 물었다.


"당신은 나랑 기념 여행을 가고 싶은 거야?

 아니면, 혼자 스위스를 가고 싶은 거야?"


물론 나의 1순위는 '남편과 함께 스위스를 가는 것'이었다. 평생 해외여행을 못 가본 우리 부부가 결혼 20주년과 같은 특별한 때가 아니라면 언제 저 멀고 비싼 나라를 가보겠는가. 남편이 유럽은 못 간다고 했을 때 혼자라도 가겠다고 떼를 쓴 건 그런 아쉬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그놈의 일정이 뭐라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주냐!?


이런 원망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스위스에 눈이 멀어 혼자라도 가겠다는 말에 남편은 적잖은 상처를 받았고, 우리는 결혼 기념 여행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냉전을 맞았다. 그동안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 남은 날도 잘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떠나려던 20주년 여행이 출발도 하기 전부터 삐걱거렸다.




결혼 전부터 노동운동에 투신해 온 남편은 현장에서 고생하는 선후배들과 동료들을 보며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일상을 항상 경계해왔다. 일정을 핑계 삼아 유럽은 어렵다는 그의 말에는 이러한 사정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유럽행은 남편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여름휴가로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혼생활 20년 만에 가는 첫 해외여행인데. 사람들도 어련히 이해해주지 않을까.


게 중엔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린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돈많지 않은 주제에 카드를 긁어가며 떠나는 외국행이라니. 꽤나 무모한 소비로 보일 게다. 하지만 그게 무서우면 죽을 때까지 스위스는 결코 못 갈 것이다. 이 행성에 태어난 지구인으로써 세계일주까지는 아니어도 지구 반 바퀴 정도는 갔다 올 수 있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현재의 선택은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주년에도 못 가는 유럽이라면 30주년이라고 다를까. 그때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렇다고 결혼 기념 여행을 혼자라도 가겠다니! 이게 말인가, 된장인가.


상황을 바꾸어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면, 나라도 마음에 생채기를 입을 말이었다. 함께 하려는 관계의 소중함 대신 개인적 욕망을 앞세운 게 아니냐는 남편의 말은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배려하는 일상적 관계이지, 며칠에 불과한 기념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니까. 그렇게 (아쉽고, 안타깝지만.... )유럽과 스위스를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물 건너간 해외 대신 물 근처라도 가겠다는 일념으로 바다가 있는 도시들을 탐색했다.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남해, 여수, 통영, 속초, 양양이 물색에 올랐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나의 기준은 언제나 3가지다.


풍경이 아름다운가?

맛집이 많은가?

마음에 드는 숙소가 있는가?


대개 관광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기 마련이고, 줄 서서 먹는 맛집도 적지 않다. 그러니 보통 숙소에서 판가름이 난다. 하지만 한여름 극성수기를 코 앞에 두고 숙소를 잡으려니 마음에 드는 곳은 이미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1순위로 생각했던 여수뿐 아니라 대개의 도시들이 비슷한 사정이었다.


그러다 한 포털 사이트에 뜬 광고창을 보게 되었다.


국내 최장 110m 인피니티풀 5성급 호텔 오픈 특가!!


눈길을 잡아끄는 광고 문구였지만,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은 숙소였다. 머리털 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상상초월 숙박비의 5성급 호텔에다 물놀이를 싫어하고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내겐 어차피 무용지물인 인피니티풀까지. 더구나 신혼여행과 10주년 기념 여행 때도 다녀온 제주 아닌가.


그런데 나는 이미 마우스를 클릭하며 호텔 사진과 가격을 확인하느라 눈알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그때 등 뒤로 다가와 노트북 화면을 슬쩍 보던 남편이 말했다.


"가고 싶으면 예약해."

"여기? 엄청 비싼 데야. 하루면 몰라도..."

"그냥 여기로 3박 해."

"응? 진짜?"


20주년 결혼 기념 여행으로 가고 싶었던 유럽의 로망이 깨어진 데 대한 남편의 미안함(이지 않았을까), 그에 따른 나의 보상심리, 여행지는 같아도 분명 다른 경험이 될 거라는 확신이 한데 버무려지는 순간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5성급 호텔을 3박이나 예약하고 나서 며칠간 마음이 뒤숭숭했다. 잘한 결정인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며칠간 예약 화면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이렇게 비싼 숙소에 3일씩이나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이게 스위스를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다른 경험이 확실한 걸까?

수영장에 3일 동안 몸을 담글 것도 아니면서 비싼 숙박비를 지불하는 건 어리석은 짓 아냐?

돈을 많이 쓴다고 좋은 추억이 쌓이는 건 아니잖아!


한 곳에 짐을 두고 여행을 다니면 편하긴 하지만, 매일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과도한 숙박비 지출은 또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셈이니까.


결국 비싼 호텔에서는 마지막 1박만 하기로 결정하고 각기 다른 숙소에 1박씩을 예약했다. 5성급 호텔과는 느낌이 다른 숙소를 경험할 수 있게 되어 좋았고, 빠듯하던 예산에도 여유가 생겼다(유럽으로 가는 거에 비하면 뭐....).




7월 말, 우여곡절 끝에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을 제주로 떠났다.


첫날 머무를 숙소는 서귀포의 바닷가에 위치한 부티크 호텔이었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객실 수가 많지 않은 작은 건물이었다. 대신 바닷가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통창과 욕조가 있고 작은 싱크대와 식탁 덕분에 편안하게 머무르기 좋은 방이었다.


이삼십 대들이 많이 찾을 것 같은 힙한 느낌의 첫날 숙소.
숙소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흐린 날에도 아름다운 제주.

우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기는 깨끗했고, 바다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는 선선한 날씨였다. 남편과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다 보니 이렇게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스위스에 가서 아무리 멋진 풍경을 구경 한다한들 마음은 불편했을 테니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종류가 다른 술 몇 병을 사고 숙소가 운영하는 펍에 들러 떡볶이와 튀김도 주문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 어릴 적 이야기와 시답잖은 일상, 그간의 수고에 대한 토닥임 같은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잠을 자다가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숙소 화장실에 불을 켜고 들어갔는데 몸에 한기가 들었다.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때 누군가 욕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나를 샤워 부스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를 민건 체구가 비슷한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여자가 목을 조르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을 틀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아....... 빠"


극도의 공포 속에서 내가 찾은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빠'였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제발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아빠를 다시 불렀다.


"아... 빠!"


목이 졸린 상태에서 겨우 내뱉은 외침은 가래가 끓는 듯 소리가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온몸에 힘을 주며 쥐어짜듯 소리를 토해냈다.  


"아빠!!!"


날카로운 비명이 잠든 뇌를 흔들어 깨웠다. 꿈속에서만 외친 줄 알았던 '아빠'는 내가 실제로 내지른 소리였고, 그 목소리가 나를 악몽에서 깨운 것이다.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왜 하필 '아빠'를 불렀을까 하고. 친정아버지는 9년 전에 돌아가신 데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 적도 없었는데.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아빠를 찾은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는 느낌이 아니었다. '아빠'를 부를 때 떠오르던 이미지는 오히려 남편에 가까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며 찾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내면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을까.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남편에게 투사한 것이었을까. 비현실적이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꿈의 의미를 파헤쳐서 무엇하랴마는. 내 머릿속은 온갖 상상과 추측으로 어지러웠다. 생각해보니 내 목숨을 위협한 여자도 이상했다. 체구며 머리 모양이 나와 너무 비슷했다. 마치 또 다른 나 같았다.


또 다른 자아가 나를 죽이려는 순간,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며 찾은 것. 꿈을 요약하자면 그러했다. 결혼 기념 여행을 준비하며 겪은 스트레스로 개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기이한 꿈이었다. 꼼짝도 않고 누운 채로 사각거리는 하얀 이불을 목 끝까지 잡아당겼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꿈속에서 느낀 한기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동짓날 새벽에 태어나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다. 한여름에도 도톰한 양말을 신고 자야 할 만큼 손발이 찬 데다, 차가운 물이나 음료를 마시고 잠들면 꼭 배앓이를 하고 만다. 집에서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여름을 날 정도다. 오히려 에어컨을 세게 튼 곳에 가면 두통에 시달리거나 콧물이 난다. 몸을 차게 만드는 술이나 찬 성질의 과일, 밀가루 음식도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영락없는 소음인이다. 그런데 여행 짐을 꾸리면서 수면양말을 안 챙긴 탓에 맨발로 잠이 든 상태였고, 숙소에서 미리 설정해놓은 온도 때문인지 에어컨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잠들기 전 마신 술도 체온을 더 떨어트렸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좀 춥네'하면서 깨도 될 것을. 이렇게 찝찝한 꿈까지 꿔 가며 요란스레 깰 건 무어란 말인가. 그것도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 첫날에. 내가 뜬금없이 '아빠'를 외치며 악몽에 시달리는 동안 남편은 대체 옆에서 뭘 한 거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휴대폰 화면을 다. 새벽 2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풀숲과 나무, 바다뿐이어서 산책을 하기엔 캄캄했고, 숙소도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산책을 나갔어도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은 풍경과 시간이었다. 대체 남편은 결혼 기념 여행 첫날밤에 어디를 갔단 말인가.


곧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는가 싶더니 남편이 이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어디야?"

"응.. 그냥 잠깐 바람 좀 쐬러 밖에 나왔어."

"이 시간에?"

"금방 올라갈게."

"알았어."


뭔가 이상했지만, 왜 굳이 그 시간에 혼자 바람을 쐬러 나갔는지 묻지 않았다. 들어오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나는 잠깐 침대에서 내려와 에어컨을 끄고 캐리어에서 양말도 한 켤레 꺼냈다. 양말을 신고 다시 이불속에 몸을 밀어 넣고는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데 곧 올라온다던 남편은 기다려도 들어오질 않았다.



삐리릭- 

카드키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대체 어디 갔다 왔어?"

염려보다는 짜증이 앞섰다. 

"어... 산책 나갔다가 차에서 잠깐 잠이 들어서..."

바닷가 전망의 숙소를 놔두고 차에서 잤다고? 산책이 끝났으면 숙소로 돌아오면 될 일을, 차에는 왜 탄 거야? 나는 목이 졸리는 악몽을 꾸다가 혼자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다고!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좋았잖아! 

많은 말들이 마음 속을 긁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결혼기념여행까지 와서 남편을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남편이 차에서 잠든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원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지면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자는 일이 잦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선 집에 올라오지 못한 채 잠든 적도 여러 번이다. '오죽 피곤하면 그랬을까',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여행지에서 예쁜 추억만 쌓아도 모자를 판에 기분을 망치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나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잠을 청했다. 요란하던 20주년 결혼기념여행의 첫 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판에 기분을 망치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나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잠을 청했다. 요란하던 20주년 결혼기념여행의 첫 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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