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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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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Dec 04. 2023

3년의 자퇴 생활을 끝낸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

엄마가 필요할  땐 말이야


고등학교에 입학한 둘째가 등교한 지 이틀 째 되던 날.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엄마, 나 자퇴하고 싶어."


처음엔 그냥 투정 부리듯 뱉는 농담인 줄 알았다.  


"뭐? 자퇴?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가 안 맞는 거 같아."

"학교에 입학한 지 이제 이틀 밖에 안 됐는데? 더 다녀봐야 아는 거지."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리기가 힘들어.

"아직 학기 초니까 그럴 수 있지.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리잖아."

"나 이틀 동안 점심도 못 먹었어. 같이 급식실에 갈 친구가 없어서."


아이가 일반고를 가지 않고 특성화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할 때부터 걱정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밥조차 먹지 못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왕따인가 싶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둘째가 간 특성화 고등학교는 전공이 세 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에 아이가 선택한 전공반에는 여학생이 8명뿐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아이들끼리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 아이만 아는 친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도 원래는 친한 친구와 함께 같은 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친구는 탈락하고 우리 아이만 합격을 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진학하기를 기대했던 아이는 예상과 달리 저 혼자 낯선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싫고 대학도 가기 싫은데 일반고 가서 다른 아이들의 성적 들러리나 서느니 일찍 사회로 나가 돈을 벌고 싶다며 아이 스스로 선택한 학교였다. 남편과 나는 일반 고등학교를 갔으면 했지만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학습과 관련해서는 한 번도 사교육을 받지 않은 데다 공부에 그리 큰 취미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가 싫어도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던 아이였기에 고등학교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댄스부며 학생회 임원까지 씩씩하게 중학교 생활을 마친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자퇴라니. 그것도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나는 아이가 얼마나 힘들지 짐작되면서도 섣불리 학교를 관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우선은 아이를 달래며 설득했다. 처음에 낯선 환경에 가면 원래 아는 사람한테 기대고 싶은 게 당연한 거라고. 친구가 없으니 외롭고 힘들 수 있다고. 그래도 자퇴라는 게 한 번 결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참고 애쓰다 보면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만약 네가 한 학기를 다니고서도 자퇴를 원하면 그때는 두 말 없이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렇게 억지로 등을 떠밀어 학교로 보낸 셋째 날. 아이가 노력하면 친구들도 조금은 곁을 내주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엄마.. 나 그냥 자퇴할래."

"그래도 최소한 한 학기는 다녀보고.."

"오늘도 밥을 못 먹었어.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 급식실에 갔단 말이야. 이런 상태로 한 학기를 더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왜 힘든 걸 참느라 시간을 낭비해야 되는데?"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든 버텨 보라고,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혀 보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열일곱이면 또래 관계가 사회관계의 전부인 나이.  혼자 밥을 먹을 수 없어 급식실을 가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아이가 3일 동안 그런 상처를 겪은 것도 마음이 아픈데,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3년을 무조건 참아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 만에 자퇴서를 쓰고, 딱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분명한 계획도 없이 학교 밖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는 날이 많았다. 휴대폰이나 티브이를 보고 입양한 고양이들과 놀아주는 일상이 대부분이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어느 청소년처럼 랩이 하고 싶다던가, 메이크업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하고 싶은 게 없냐는 물음에 뭘 꼭 해야 되냐고 되묻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인생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듯 흘려보내면서 한량처럼 놀고만 있는 모습을 부모로서 보기가 괴로웠다.


내가 두려운 건, 아이가 학교를 자퇴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니었다. 우리 부부 역시 남들은 잘 가지 않는 비주류의 길을 걸었고, 큰 아이도 3년 간 공부와 거리가 먼 대안학교를 다니다 검정고시를 보고 일반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으로 진학했으니. 때론 다수와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실패로 귀결되지만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걱정이 앞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감이 습관이 될 까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가 사회로부터 멀어질까 봐.


알게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는 내게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불안해?"


 나는 아이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공부는 안 해도 돼. 대학도 안 가도 돼. 행복이 그런 걸로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 엄마도 대학을 중퇴했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어. 아빠도 대학을 졸업 안 해서 고졸이잖아. 공부라는 건 자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언제든 할 수 있고, 어차피 죽기 전까지 해야 되는 거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공부에는 나이가 상관없으니까. 물론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야 공부라는 게 때가 있고,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하는 공부가 얼마나 축복이었는지 깨달았지만. 지금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3년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엄마는 네가 집 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어. 꼭 또래가 아니어도 괜찮아. 지금 너한텐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소속감을 느끼고, 작은 책임이라도 맡아서 성취해 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뭐가 됐든, 집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봐."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가 원하는 걸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뿐, 나머지는 아이의 몫이었다.  




아이는 그 후 필라테스를 몇 달간 배우러 다녔다. 초여름엔 그림을 그리고 싶다기에 태블릿을 사주었고, 학교밖 청소년들의 공부와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바리스타 과정을 배우더니 자격증을 따고 카페에서 2개월간 월급을 받는 인턴 생활을 했다. 겨울엔 일러스트레이터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어 해서 자격증 대비반에 등록해서 다녔는데, 과정이 끝난 후 정작 시험은 보지 않았다. 대신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 콘텐츠 그룹에서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배워둔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그림을 그리고 잡지를 만들었다.  


자퇴 생활 2년 차에는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싶다길래 학원을 두어 달 다녔고, 다니던 기관에서 부원들을 모아 밴드 동아리를 결성했다.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따로 잡지를 기획해서 만들기도 하고, 지역문화재단에서 모집하는 기자단에 응모해서 취재비를 받는 서포터즈로도 활동했다. 이런저런 활동에 많이 참여했지만 진로와 관련되어 깊게 고민하거나 진득하게 지속되는 일은 없었다. 어느 땐 중구난방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러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잘하는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될 거라 믿고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자퇴 생활을 보낸 올해. 아이는 여러 활동들을 정리하고 검정고시 고득점 대비반에 등록했다. 대학은 안 갈 거라던 아이의 마음이 겨울 동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진로 고민이 들 때마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달라진 듯했다. 지금까지 대학 진학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굳이 대학을 가야 한다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대학을 가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대학은 왜 가려는 거야?"

"대학 가서 동아리 생활 해보고 싶어서.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만 살았잖아. 다른 데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인서울을 지원하기엔 성적이 어렵기도 했지만, 수도권에 많은 대학들을 두고 부러 지방 대학만을 골라 원서를 쓴 아이의 마음이 의뭉스러웠는데. 대답을 듣고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어릴 적 대학입학을 독립의 출발로 삼았던 것처럼 아이 역시 그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는 것.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나는 것.


두 가지 소망을 지닌 아이는 그렇게 4개월 간 준비한 검정고시에서 만점을 받고, 최저 등급을 맞추기 위한 수능까지 무사히 치렀다.




지난주에는 다른 학교밖 아이들과의 합동 졸업식이 있었다. 아이가 3년간 다닌 학교밖 청소년 지원 기관에서 준비해 준 행사였다. 무대에서 학사모를 쓰고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시댁에도 자퇴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마음 졸이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짧다면 짧지만, 자퇴생으로 마지막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었을 터. 방황과 혼란의 시간을 무탈하게 잘 건넌 아이가 고맙고 기특했다. 그리고 아이의 자퇴 생활이 무사히 끝난 것처럼 나도 두 아이의 양육과 돌봄으로부터 졸업한 기분이었다.


물론 엄마라는 이름은, 여전히 어렵고 무겁다. 아이들이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자신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는 일이 남기도 했지만, 혹여나 복잡한 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감당 못할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탓이다. 하지만 앞일은 누구도 모르는 법. 고등학교를 자퇴했듯 대학을 그만둘 수도, 실연을 당해 아파할 수도, 취업이 잘 되지 않아 절망할 수도, 회사 일이 힘들어 퇴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당연히 겪을 일이고, 이미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시시콜콜 고민을 다 털어놓지도 않았건만. 더 이상 옆에서 위로를 전하고 토닥여 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아리다. 부모가 만든 안락한 고향의 세계를 넘어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바람은 이뿐이다.


깨질 때마다 부디 조금만 아파하고 더욱 단단해지면서 날아가길.

힘들 땐 그동안 받은 사랑과 응원을 기억하고,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엄마에게 달려오길.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커줘서 대견했다, 엄마는.
지난 3년 간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면서, 고양이 2마리 집사 노릇 하느라 수고 많았고.


졸업식 날 너에게 건넨 꽃다발은 양육과 돌봄으로부터 졸업한 나에게 주는 것이기도 했단다.

    

거실을 자기 방처럼 어지럽히던 생활도 이제 곧 끝나겠지.
멀리 떠날 준비를 하는 씩씩한 너를 언제나 응원하마.

                    

넌 어릴 때부터 씩씩했으니까 잘 해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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