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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23. 2024

재개발 동네에서 구조한 고양이의 장례식

입양 후 천 일만에 고양이별로 떠난 모루

녀석은 두 딸아이가 졸업한 초등학교 인근 골목에 살던 고양이들 중 한 마리였다. 동네 터줏대감으로 길거리에서 살만큼 산 녀석을 둘째가 입양하게 된 것은, 골목대장인 녀석을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고양이 때문이었다. 아이는 사람을 경계하는 나이 든 녀석과 달리 눈을 마주치며 사람을 따르는 어린 고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특유의 울음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녀석에게 ‘징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골목을 누비며 고양이를 찾다 다녔다.


처음엔 호기심에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도 실컷 가지고 놀다 보면 쉬이 지루해지는 것처럼 얼마 못 가 시들해지겠지 싶어 내버려 두었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야단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혼자만 챙기는 것보다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측은지심을 지닌 아이로 자란 것이 내심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의 마음을 단순한 연민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고양이들이 살던 골목은 재개발로 인해 조만간 철거될 예정이었다. 조합 설립 후 지지부진하던 재개발이 10년 만에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역에서 주민들과 8년째 운영해 오던 마을카페도 곧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다. 둘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개발로 인한 철거 소식에 아이는 길고양이들의 생사를 걱정했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서 사람이 떠난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철거가 시작되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고양이들은 건물의 잔해 속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재개발로 인해 고양이에게 닥칠 일을 염려한 아이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고양이를 구할 계획을 세웠다. 오래된 빌라 지하에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은 암컷 고양이와 자신이 아끼는 어린 고양이를 철거 전에 구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딸아이는 얼마 후 내게 통보하듯 말했다. ‘두부’라는 이름의 어미 고양이는 이미 다른 친구의 집에서 입양을 하기로 했고, 새끼들은 젖을 떼고 나면 SNS로 홍보해 입양을 보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어린 고양이 ‘징징이’는 우리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집으로 고양이를 데려온다고? 안돼!”     

“왜?”     

“넌 아직 중학교도 졸업 안 했잖아! 경제적으로 자립도 안 된 애가 어떻게 반려동물을 키워? 엄마, 아빠는 너희들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내가 돌볼 거야.”     

“네가 무슨 수로?”     

“내 용돈으로 사료랑 모래도 사고, 화장실도 치우고 다 할 거야.”     

“고양이가 집에 오면 털은 어떻게 할 건데? 청소는 엄마 담당이잖아.”     

“내가 가끔 청소하면 되지.”     

“말만 그렇게 하고 안 치우면 결국 엄마 일이 되는 거잖아.”


평소 청소와 거리가 먼 아이의 습관을 고려해 볼 때 집은 얼마 못 가 고양이털로 뒤덮일 게 틀림없었다. 아이를 기특하게 여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밖에서 고양이를 돌보는 것과 집으로 들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사력을 다해 반대했다.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힌 아이가 한 발 물러났다. 입양이 아닌 임시보호를 하겠다고 했다. 추운 한겨울만이라도 집에서 나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로선 그것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집에서 임시보호를 하다가 다른 곳으로 입양을 못 보내면 어찌 된단 말인가. 결국 입양 전단계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임시보호든 입양이든 집으로 데려오는 것만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대신 임시보호를 할 만한 다른 장소를 알아봐 주겠다고 아이를 달랬다. 주민들과 운영하던 마을카페 3층의 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마을카페 3층은 도어록이 달린 철문으로 출입하는 가정집과 나무로 된 방문으로 된 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방은 3층에 살던 세입자가 가끔 빨래를 널거나 창고처럼 짐을 쌓아두던 곳이었는데 세입자가 나간 후 맞은편 집과 함께 오래도록 비어 있는 상태였다. 얼마 후면 철거될 건물인 데다 더 이상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주인은 3층 공간을 언제든 필요하면 쓰라고 내게 말했었다. 집보단 훨씬 작은 공간이지만, 외부인이 출입하지 않는 위치인 데다 양쪽으로 큰 창이 나있어 고양이가 밖을 내다보며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던 아이는 그곳을 둘러본 뒤 임시보호소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 후 아이는 바쁘게 움직였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방을 흰색 페인트로 칠하고, 덜거덕거리던 방문 손잡이도 새것으로 교체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닥쳐오던 12월이었기에 창문마다 뾱뾱이를 붙이고 집에서 잘 안 쓰던 담요와 작은 전기담요도 준비해 두었다. 중고거래로 화장실과 사료까지 마련한 아이는 골목에서 오랫동안 길고양이를 돌봐 온 캣맘에게 고양이를 유인할 케이지를 빌렸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고양이를 들이기로 한 것이다.


고양이를 구출하기로 한 D-Day.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케이지 안에 먹이를 두고 유인할 계획이었는데, 아이의 원픽인 어린 고양이대신 나이 많은 녀석이 계속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이 든 녀석의 서열이 높아서인지 먹이에 욕심이 많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길고양이들을 함께 돌보던 친구들은 두 마리를 다 데려가라고 부추겼고, 아이는 생각지도 않게 두 마리 고양이의 집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임시보호 기간 내내 아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곳으로 출퇴근했다. 그릇에 따라놓은 물이 얼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계절이었다. 더구나 해가 지면 어둡고 인적이 드물어지는 재개발 동네. 갓 열일곱이 된 아이 혼자 한겨울에 그곳을 오가는 게 어쩐지 걱정스러웠다. 아이도 오가는 게 힘들었는지 고양이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남편과 내가 계속 반대하자 아이는 속상해하며 눈물을 보였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주관이 강한 아이는 고집을 꺾지 않을 테고, 물러서지 않는 아이와 우리가 계속 대치하면 관계가 삐그덕거릴 게 뻔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입양을 받아들였다.


대신 고양이 돌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아이가 책임지기로 했다. 병원비나 사료값도 자기 용돈에서 해결하기로 했고, 부족하면 우리에게 빌린 후에 반드시 갚기로 약속했다.  아이가 키우고 싶어 했던 어린 고양이 징징이와 키울 마음이 없었던 늙은 고양이 모루는 그렇게 재개발 구역에서의 노숙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와의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다.




두 녀석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아직 어린 징징이는 탐색과 장난감 놀이에 관심이 많았다. 부지런히 집안 곳곳을 순찰하고, 아이가 장난감으로 놀아주면 몸을 겅중거리며 날뛰었다. 사람과의 교감에도 거부감이 덜해서 손가락을 내밀면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다가왔고, 누가 됐든 엉덩이만 두드려주면 좋아했다.


나이가 많은 모루는 먹을 것과 박스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장난감을 눈앞에서 흔들어대도 시큰둥했다. 어차피 길에 두었으면 그 해 겨울을 넘기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만큼 골목 생활이 길었기에 인간과의 교감이나 놀이에 흥미가 없는 것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아주 작은 박스라도 보이면 꼭 그 위에 올라가 앉거나 잠들곤 했다.


녀석은 식탁이나 부엌 싱크대에 올려진 음식을 몰래 물어가고, 건강을 우려해 뺏으려고 하면 도끼눈을 뜨고 하악질을 했다. 이미 노숙 기간이 길어서 건강도 시원찮았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침을 사방에 뿌리고 입가에도 기다란 침을 매달고 다니기 일쑤였다. 구내염으로 입냄새도 심했고, 가려운 잇몸을 자기 발로 긁느라 입가에 상처를 내곤 했다. 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심하게 몸부림을 치며 거부했고, 약을 주어도 잘 먹으려 들질 않았다. 그루밍을 잘하지 못해 털은 점점 뻣뻣해지는데 목욕도 하려들 질 않으니 집에 온 지 3년이 되던 해에는 날이 갈수록 꾀죄죄해졌다.


이즈음엔 검정고시와 수능,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둘째도 점점 고양이 돌보는 일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방은 녀석이 먹다 흘린 사료와 침으로 범벅이 되었고 아이는 바닥 청소도 제때 하지 못했다. 데려왔으니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자주 방을 치우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을라 치면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두 아이를 키워 온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던져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는 둘이나 낳은 거 후회한 적 없어?”   


고백하자면,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 그런 생각을 잠깐 했더랬다. 하나도 잘 키우지 못하면서 덜컥 둘째를 낳은 건 아닌지. 생각하면 깊은 한숨이 배어 나왔다. 두 아이 모두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스스로 메워갈 만큼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간이 지나고,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소통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 ‘후회’라는 단어는 어느샌가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어떤가. 길에서 살았다면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졌겠지만, 인간의 품으로 들어온 이상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 해도 우리가 차를 마시며 추억을 나누고 여행을 계획하는 것과 같은 대화는 나눌 수가 없다. 그즈음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길들인 생명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가끔은 스스로를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애정도 없이 섣불리 늙은 고양이까지 데려온 선택을, 어쩌면 입양을 반대했던 엄마의 말을 흘려보낸 것을. 그때의 결정이 이리도 오래 자신의 헌신을 필요로 하게 되리라는 걸 몰랐던 자신의 어린 마음마저. 그래서 자신의 후회를 감추고, 나의 후회를 물었을 것이다.




얼마 전 아이는 입시를 치렀다. 대학 입학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할 예정이기에 아이가 떠난 후를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겨우 집에 귀가해 잠이나 자고 나가는 남편과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첫째, 작업실을 오가며 일하고 공부하는 내가 두 마리의 고양이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길에서 살았으면 벌써 제 수명을 다했을 텐데.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나는 늙은 고양이가 어서 우리 곁을 떠나 주기를 기다리는 몹쓸 바람을 갖게 되었다. 처음 집에 왔을 때 건강하게 오래 살아주길 바라던 소망이, 건강하지 않을 거라면 빨리 떠나 주길 고대하는 미운 마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마음을 행여 들킬까 조심하면서도 나는 속마음을 혼잣말로 내뱉곤 했다. 벌써 우리 집에서 3년이나 살았잖아. 살만큼 산 거 같은데.


나는 녀석을 집에는 들였지만, 마음 깊숙이 들이지는 못했다. 동물도 사랑받지 못하면 빨리 죽는다던데. 초라한 행색의 녀석을 볼 때마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탓인가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나도 나이가 들고 병들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테고, 사랑받지 못하니 더 볼품없어질 테고, 이런 내 모습이 불편해진 가족들은 내가 어서 떠나 주기를 바라게 될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 고양이도 인간도 늙고 병들어 사랑받을 수 없는 모습으로 소멸된다는 사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녀석은 사랑스럽게 보아주기엔 아무래도 너무 늙고 병들었다고, 나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 이튿날 아침. 방학중이라 집에서 쉬던 큰 아이가 안방문을 두드렸다.


“엄마. 모루가 죽었어.”


징징이의 울음소리가 심상찮아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죽어 있더라고 했다. 그때 내 마음을 울린 단어는 두 개였다. ‘미안함’ ‘다행’. 더 오래 우리와 함께 머물러주길 바라지 못한 비루한 마음이 미안했고, 작은 아이가 그간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나마 덜고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녀석은 소파 아래에 누워 앞발을 걸친 채 숨이 멈춰 있었다. 거실 소파에서 늦잠을 자던 둘째가 일어났다.


“들었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도와줄까?

“아니. 내가 할게.


아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아이의 낯빛이 어두웠다. 소파에 박힌 녀석의 발톱을 깎아 방바닥에 뉘었다고 했다. 불안해하는 징징이 때문에 혼자 하기가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수건 한 장과 치수를 잘못 재어 쓰지 못한 광목 커튼을 반으로 잘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수건으로 녀석의 앙상해진 얼굴을 먼저 두른 후 광목천 두 장으로 몸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곧바로 장례 업체를 검색했다. 두 곳의 장례업체 중 픽업서비스가 가능한 곳으로 결정하고, 남편에게도 연락해 알렸다. 남편이 퇴근 후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그러려면 저녁이 될 때까지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는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다. 결국 가장 이른 화장 시간에 맞추어 픽업을 요청하고 남편에게는 아이들과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픽업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장례 비용을 걱정했다. 그동안 고양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제 용돈으로 해결해 왔지만, 이렇게 한 번에 큰 비용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엄마가 낼게.”


그간의 무심했던 마음을 이렇게라도 털어내고 싶었다.  


픽업 차량이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천천히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내가 녀석을 수습했기에 안고 내려가는 것도 당연히 내 몫인 것 같았다. 나는 두 겹을 감싼 녀석의 몸을 하얀 쇼핑백 안에 넣어 두 팔로 안고 내려갔다. 집으로 거둔 지 1,070일 만에 녀석이 떠나게 되었다.


아파트 입구의 유리문을 열고 나가니 장례업체명이 쓰인 커다란 흰색 밴이 보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우리를 보더니 차에서 내려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뒷문을 열어 커다란 종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고양이를 담아서 화장터까지 이동할 거라고 했다. 나는 녀석을 상자 안에 가만히 눕혔다. 그리고 차량 반대편으로 돌아가 상자 옆의 좌석에 앉았다. 아이들은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다. 차 안에서는 수증기로 방향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차량 문이 자동으로 닫히자 화장터까지 1시간이 걸릴 거라는 안내와 함께 차량이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1시간이 안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건물 안에서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직원은 봉고차 뒷좌석에 실린 박스를 꺼내서 조심히 들고는 우리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1층 로비에 오늘 화장이 진행되는 다른 동물들의 이름과 시간이 적힌 보드판이 보였다. 그곳에 모루의 이름이 있었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2층으로 올라가 상담을 먼저 진행하라고 일러주었다. 2층에는 기다란 나무 책상과 손님들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다른 남자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례 비용은 장례에 소요되는 물품이 무엇인가에 따라 차이가 났다. 기본적인 염습과 유골함이 제공되는 베이직 코스부터 고급 수의와 유골함, 생화 장식이 제공되는 프리미엄 패키지까지 다양한 장례 서비스가 있는데, 최고급 장례 코스는 기본적인 코스보다 가격이 6배나 높았다. 나는 아이들과 집에서 홈페이지를 통해 장례비용을 살펴보았었고 그냥 기본 장례로 진행하기로 동의했기에 남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기본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2층에서 잠시 대기하니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반려동물을 화장하기 전 잠시 추모의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안내를 받았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보니 녀석의 몸 위에 흰색 한지가 덮여있고, 디지털 액자 안에서는 우리가 미리 보낸 사진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발도장을 찍을 수 있는 잉크와 카드, 메모를 위한 펜이 놓여있고, 털을 잘라서 간직하기 위한 가위와 작은 비닐도 준비되어 있었다. 죽은 후에도 인연을 기억하겠다는 의미에서 발에 묶을 수 있는 빨간 실도 있었는데, 정작 녀석을 돌보던 둘째는 퉁퉁 부은 눈으로 의자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큰 아이의 도움을 받아 녀석의 앙상한 뒷발에 리본 모양으로 빨간 실을 묶었다. 첫째는 카드에 스탬프로 발도장도 찍고 가위로 털도 잘라 비닐에 담았다. 나는 카드를 펼쳐 녀석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를 써 내려갔다. 혹여 다시 태어나거들랑 춥고 배고픈 길에서 태어나지 말고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서 태어나 듬뿍 사랑받으며 살라고. 그간 마음을 써주지 못해 미안했고, 징징이와 우리 아이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웠다고.


나는 아이 몰래 눈물을 훔치고선 카드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연락해 추모가 끝났다고 말했다. 방을 나와 복도에 앉아 있는 사이 녀석이 화장터로 옮겨졌다. 잠시 후 직원이 우리를 두 개의 화덕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오른쪽 화덕 앞에 모루가 누워있었고, 직원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더니 녀석을 기계 안으로 넣고 문을 닫았다.


우리는 나란히 복도 의자에 앉아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앉은 다리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엑셀 화면과 한글을 오가며 설문 자료를 분석했다. 그렇게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두 노인에게 직원 한 명이 다가가 화장이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잠시 화장터가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잘 놀더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노인의 울음 섞인 탄식에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존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애잔한 흐느낌을 듣노라니 내 눈에서도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 선배와 후배, 친구와 조카를 떠나보내며 내가 알게 된 것은, 슬픔과 그리움은 오로지 남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헤어진다는 건 그가 없는 오늘을, 내일을, 또 그다음 날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내가 사랑했거나 나를 사랑해 주었던 존재의 영원한 부재를 경험한 이는 타인의 이별에 쉽게 공명하게 된다. 저도 모르게 이별의 슬픔을 깊이 학습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양손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30분 후, 하얀 뼈가루가 담긴 유골함을 받아 건물 밖을 나왔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했다. 장례업체에서 불러준 카카오택시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는 동안 피로가 몰려왔다. 드디어 녀석을 떠나보냈다는 홀가분한 마음 한편으로 남은 고양이에 대한 걱정이 어둠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밤이었다.


    

재개발 구역에 살던 당시엔 눈빛이 꽤 날카로웠다.
우리 집으로 온 후엔 먹이 사냥에 대한 부담이 줄어서인지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이렇게 식탁으로 사냥 오는 날이 많았던 늙은 고양이 모루.
어릴 적부터 모루를 따라다니던 징징이는 유일한 동족을 잃고 혼자 긴 시간을 살아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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