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발음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냥, 그 애가 떠났다고 했다.
아이들을 결석시키고 남편과 함께 기차를 탔다. 장례식장에 도착해보니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이 언니와 형부만 적막하게 빈소를 지키는 중이었다. 둘은 이미 눈물이 말라버렸는지 담담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고등학생 때 찍은 증명사진으로 만든 조카의 영정사진을 보노라니 나 역시 눈물 대신 숨이 막히는 느낌만 들었다.
“멀리서 오느라 애썼다”
“애는 무슨...”
“밥은 먹었나?”
“기차에서 대충 먹었어.”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별 일 없는 사람들처럼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후가 지나자 다른 형제들과 친척들이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모두들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해했다.
장례식장은 내내 적막했다. 가까운 친척들과 가족, 그리고 조카가 근무했던 개인병원의 동료들 외에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들 중 간혹 몇몇이 눈시울을 터뜨렸지만 차려진 음식을 먹는 사람도 떠드는 사람도 없는 장례식 풍경이 참 힘겨웠다. 각지에서 찾아온 네 명의 오빠들도 여동생이 당한 불가해한 상황 앞에서 조용히 소주잔만 들이켰다.
장례 역시 소박했다. 언니가 누구의 화환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설치한 두 개의 화환만이 장례실 양쪽에 놓였다. 조카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상복을 입으면 안 된다 하여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둘째 오빠의 큰 아들이 검은 양복 차림으로 장례식장을 지켰다. 언니는 검은 티와 등산바지를 입었고, 형부도 어두운 색깔의 구겨진 양복을 입은 채 삼 일을 보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조카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염도 할 수 없었고, 수의 대신 평소 좋아하던 옷차림으로 입관을 마쳤다.
발인은 삼십 분 거리의 화장터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참석할 사람이 많지 않아 버스를 빌리는 대신 여러 대의 차량으로 삼삼오오 나눠 타고 화장터로 이동했다. 사촌 오빠의 차를 타고 도착해보니 언니는 겉옷도 입지 않은 채 바람이 휭휭 부는 화장터 주차장에서 관이 담긴 리무진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둘째 올케가 상의를 벗어 언니에게 걸쳐 주었다. 언니는 가만히 조카의 이름을 부르다가, 차에 기댔다가, 창문을 어루만지는 일을 반복했다. 잠시 후 리무진이 건물 안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언니는 비틀거리며 차를 쫓아갔다.
조카를 실은 자동차가 향한 곳은 소각로였다. 하얀 철문으로 닫힌 소각로 앞으로 가족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죽은 육신이 든 관이나마 만져보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흰 천을 덮은 관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평소 묵묵하던 형부가 큰 소리로 조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딸의 이름을 커다랗게 수놓은 천이 사람들의 손길에 삐뚤어질 때마다 바로잡았다. 마치 흐트러진 아이의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것 같았다. 몇 분간의 마지막 배웅을 끝낸 관이 천천히 소각로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로비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언니는 입맛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며 말을 건넸지만 언니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앉아 있는 언니를 두고 사람들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자리를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관이 소각로로 들어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화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광판에 조카의 이름이 나타났다. 장례지도사가 로비에 뿔뿔이 흩어져 앉아 있던 가족들을 수골실로 안내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그의 앞에는 조카의 육신이었는지 알 길 없는 하얀 뼛가루와 타지 못하고 남은 몇 개의 뼛조각이 놓여 있었다. 허망함을 감추지 못한 가족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유족을 향해 목례를 한 후 조카의 유골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안쪽의 문을 열고 분쇄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잠시 기계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남자가 손에 항아리를 들고 나왔다. 상복을 입은 조카가 안으로 들어가 수골함을 받아 나왔다.
이틀 전만 해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던 그 애의 육신이 가루가 되어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오는모습을 보자더 이상 아무도조카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태어난 조카는 어릴 때 곱슬머리에 볼이 통통한 귀여운 아이였다. 아무거나 잘 먹었고, 동네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다니기 좋아하는 골목대장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닐 땐 춤을 잘 춰서 선생님께 칭찬도 자주 받았다. 중학생 시절 사물놀이를 배우면서 북과 꽹과리를 쳤고 치마 대신 교복 바지를 입을 만큼 고집도 남달랐다. 일찌감치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딴 조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작은 개인병원에 취직했다.
그 애는 보통의 또래처럼 비싼 브랜드의 옷이나 화장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집과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을 오가며 성실히 일할 뿐이었다. 언니와 형부에게는 아픈 둘째 몫까지 해내려고 애쓰던 미더운 딸이었다.
일 년 전부터 요리사라던 남자 친구와 연애도 시작했는데 남자 친구에게는 일찌감치 이별을 통보하고, 직장에도 사표를 내고선 이렇게 혼자 떠날 차비를 했던 모양이다.
회사 동료들과 송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조카는 아끼던 의자를 엄마에게 주었다. 평소보다 안마도 정성껏 해주었단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네 살배기 아이와 다름없는 동생에게는 천 원짜리 한 묶음을 돌돌 말아 건넸다. 그리고 온 식구들이 회사로, 복지관으로 나선 아침, 세상을 떠났다. 스물넷, 봄이었다.
발인을 끝내고 돌아오는 동안 일상을 짓누르던 수많은 고민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마치 조카의 육신과 함께 모두 타버린 것만 같았다.
어쩌면 삶이란 건, 어떻게 살아야 즐겁고 행복할까 이리저리 따져보는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매 순간 느껴지는 단순한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간소한 제를 지내러 들렀던 작은 암자 앞마당에서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던 햇빛과 간간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가던 바람,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세계와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살아있는 감각들 말이다.
돌이켜보면 여름이 온 뒤에는 봄이 갔다며 아쉬워하고, 겨울이 온 뒤에는 가을이 갔다고 아쉬워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빨리 컸으면 싶었는데 막상 커버린 아이들을 볼 때면 어릴 때가 귀여웠지 하는 생각을 한다.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어차피 언젠가 떠날 아이들이 지금 내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고, 나를 향해 웃어줄 때 그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조카가 남기고 간 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영원한 존재일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아픈 깨달음 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대로 옆에 있는 이들을 대하지 말고, 존재하는 그대로 감사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