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Jun 09. 2020

너는 그렇게 글을 쓰고, 자기 자신으로 살았구나

자신이 만든 단편영화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간 너

어느 날 그 애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커다란 눈에 나이답지 않게 새치가 많았던 C는 유쾌한 말투와 잘 웃는 성격 덕분에 누구와도 잘 어울리던 1년 아래 후배였다.


우리에겐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둘 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 삶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며 대학 시절을 학생회실과 거리에서 보냈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그 앤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그 애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언니는 그림 그리고, 저는 글 쓰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위로처럼 건네던 그 말이 참 고마웠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리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학생회장으로의 마지막 1년을 보내고 대학을 떠난 후 2년간의 불규칙적인 경제활동 끝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 양육으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학교 선후배들과는 연락조자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고, 인터넷을 통해 그 애의 부고를 접했다. 며칠을 굶주린 채 한 겨울 월세방에서 꽁꽁 언 생수병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소식이 며칠간 인터넷과 뉴스에 오르내렸다.


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으면서도 돈이 없어 약을 제때 못 먹은 것이 화를 키운 것 같다는 분석부터 C가 밥과 반찬을 부탁하며 집주인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까지. 언론이 다루는 그녀의 죽음은 21세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며칠간 뉴스를 도배한 그 아이의 죽음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일상을 콕콕 찔러댔다. 그 아이가 겪었을 지독한 고립과 가난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슬픔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복지 제도의 허점을 짚는 뉴스를 내보냈다. 필요한 제기였다. 아무리 예술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예술의 덕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이는 드무니까. 우리가 살아가며 무수히 겪는 내면의 상처를 예술이 보듬어주지 않는다면 그 날것의 감정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치유를 위한 것이든, 사소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 음악도, 영화도, 문학도, 춤도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싹 틔운 작은 창조성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살펴 주는 사회적 장치가 너무나 부족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창작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자는 논의는 분명 타당했고 더 이상 후배와 같은 예술가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이상한 건 나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친구를 고자질하는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그 애를 탓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흠칫거렸다.


‘주변에 돈 빌릴 사람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꿈도 좋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을 하면서 했어야지

 

무엇이었을까. 슬픔과 애도 뒤에 스민 책망하고픈 마음의 정체는.




벌써 9년 전 일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후배의 이름을 잊었고, 서른이 넘어 미대입시까지 치렀던 나는 손에서 그림을 놓은지 오래되었다.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명함을 내밀듯, 평범한 내 이름 앞에 어떤 간판을 내걸고 싶어 했다는 것과 마음을 건드리던 이상한 감정의 정체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애의 가난이 아니었다. C는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H대학에서 원하던 공부를 했다. 내가 결혼하던 해에는 <연애의 기초>라는 단편 영화로 데뷔했고, 내가 둘째 아이의 돌잔치를 할 무렵엔 <격정 소나타>라는 멋진 제목을 가진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그 애가 자신의 몸과 생명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탓하던 속 좁은 마음 뒤에는 끈기와 노력의 부족이든, 재능과 용기의 부족이든, 내가 가지 못한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해내고 자신의 길을 걸어 간 후배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숨어 있었다. 그랬다. 자괴감이었다. 그 앤 글을 썼고,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나에겐 그저 스스로를 위로하는 작은 위안에 불과했던 말이, 그 아이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서전 ‘말’에서 읽기와 쓰기가 곧 자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쓰기 위해 존재하며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 애도 그랬는지 모른다. 추운 방에서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졌을 것이다.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을 다닌다면 최소한 밥은 굶지 않겠지만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 않는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고, 아마 답했을 것이다.      


C가 걸어간 길은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은 아니었다. 재능이 없다는 핑계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먹고 살 길을 찾아가는 이들을 수없이 보면서도 오롯이 자기 길을 가는 용기가 그 애에겐 있었다. 높이 날지 말라는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로스처럼.


어떤 이들은 이카로스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더 이상 날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나에겐 재능이 부족하다고, 교수들이 나이 많은 학생을 좋아할 리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날아간 그 애를 어리석다고 평가했다. 화가가 못되었지만 나는 그래도 굶지는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어둔 밤을 밝히는 달빛은 환하고 선명하다. 하지만 그건 제 안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다. 자신을 활활 태워 빛을 내는 태양만큼은 아니더라도 캄캄한 우주에서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빛을 내는 별처럼 반짝이는 생을 살았다면.


너무 짧았다한들,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양의 반영에 불과한 빛을 제 빛 인양 뽐내며 영원을 산다한들,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