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빠들은 장례식장과 장지를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왔음을 알렸다.
중환자실 침대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키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은 뜨고 있으나 초점이 흐렸고, 가끔 무엇에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날 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버지는 며칠을 중환자실에 더 머무르다 일반실로 옮겨갔다.
고비를 넘긴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의 폐가 70% 가량 망가진 상태라는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망가지지 않은 나머지 30%의 폐로 그날 밤을 버틴 것이었다.
큰오빠네 집에 머무르던아버지의 병세는 딱히 나빠지지도 호전되지도 않은 채 해를 넘겼다. 사는 게 지겹다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쿨럭거리는 기침소리로 자신의 폐 상태를 알렸다.
이듬해 더위가 찾아오는 초여름 날 오후였다.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가씨, 아버님 돌아가셨어요”
낮잠에서 깰 시간인데도 안 일어나시길래 깨웠더니 숨을 쉬지 않더라고 했다. 구급차를 불렀으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자다가 가고 싶다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아버지는 홀연히 가셨다.
우리는 이미 한 해 전 아버지의 죽음을 대비했던 터라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치료를 받던 병원의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상조회에서 진행하는 장례 절차를 따랐다. 저녁 즈음 먼 곳에서 올라 온 오빠들과 검은 상복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았다. 다들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차분했다.
이튿날 친척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형부는 그래도 언니보다 호강했다.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손자, 손녀 안 봤나. 아들 집에서 며느리가 해주는 뜨신 밥 먹었지, 팔순 넘어서 낮잠 자다 가셨으니 호상 아이가.”
살아생전 엄마를 고생시켰다고 아버지를 미워했던 막내 이모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1933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본래 안동 태생인 할머니가 영덕으로 시집을 왔는데 그만 결혼한 첫 날 남편이 죽었다. 앞집에 살던 할아버지는 6년 동안 과부로 지내던 할머니를 사모해 상사병이 났다. 이미 결혼해 아들과 딸까지 둔 할아버지가 병이 나자 본처였던 큰할머니께서 할머니를 집으로 들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먼저 낳은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고 아버지만 살아남았다.
아버지가 여덟 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났다. 할아버지는 떠나기 전 아버지의 신발 치수를 재며 말했다.
“중길아, 만주에서 신발 사올게”
하지만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객사를 한 것이다.
할머니는 또 다시 과부가 되었다. 두번째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아버지를 데리고 안동으로 떠났다.과부가 된 할머니를 재혼시키기 위해 친정에서 데려간 때문이었다.
하루는 영덕의 큰 할머니가 안동으로 찾아왔다. 큰할머니는 재가를 하면 천덕꾸러기가 될 아버지를 데려가 잘 교육시키고 키우겠노라고 했다. 어린 아버지는 엄마와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결국 할머니는 아버지를 데리고 청송으로 세 번째 시집을 갔다.
할머니와 재혼한 김씨 할아버지는 총각이었다. 할머니와의 사이에서는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김씨 할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새아버지도 아니었다.
김씨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학교 대신 지게를 메이고 산으로 보냈다. 그리고 툭하면 아버지를 때리고 굶겼다. 몰래 학교에 가서 창문 너머 글자를 배우다 들킨 날에도 맞았다. 할머니가 밥이라도 챙겨주는 날이면 할머니도 맞았다. 아버지는 맞는 할머니가 가여워서 말했다.
“내한테 잘해주지 마라.”
아버지의 끼니를 챙겨주는 건 배를 곯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 뒷집 아주머니였다. 아버지는 장성해서 결혼할 때까지 그 집의 자식이 아닌 일꾼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군대를 다녀온 아버지는 중매로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결혼할 때 받은 것은 쌀 한 되와 수저 두 벌이 전부였다. 모든 재산은 김씨 성을 가진 삼촌의 몫이었다.
노래를 좋아하고 손재주가 뛰어났지만 평생 가난하고 못 배운 게 한이라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사랑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입관을 해야 하니 유족들은 모두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머리를 곱게 빗은 아버지가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찌나 작고 말랐는지 자라다 만 소년의 몸 같았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자 그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났다. 이제 더 이상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전화는 받지 못할 것이다. 사는 게 지겹다던 넋두리도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낡은 봉투에 든 종이들을 식탁에 꺼냈다. 어릴 적 받은 성적표와 상장들이었다. 아버지가 고이 모아두었다가 돌아가시기 전 건네준 것들이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어버이날마다 써서 보낸 편지들도 아버지의 봉투에 들어있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이 담긴 편지였다.
자신은 다녀보지 못한 학교의 이름이 적힌 성적표와 상장을 보며, 아버지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몰래 학교에 간다고 때린 김씨 할아버지를 미워했을까. 아니면 그런 남자와 재혼한 할머니를 원망했을까.
교육받을 기회를 포기하고 할머니를 따라 나선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중학생 시절, 영어 숙제를 할 때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문득 그 눈빛이 몰래 교실 밖에서 글자를 배우던 어린 소년의 눈빛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