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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26. 2020

이방인의 이름

새어머니에게 전하는 뒤늦은 사과

여자는 뼈에 가죽만 걸친 듯 마른 데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기미가 잔뜩 껴서 다른 나라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 비염이 섞인 목소리에 말은 어눌했으며 오른손을 조금씩 떨었다.  


여자는 첩의 딸로 태어났다고 했다. 오랫동안 호적에 오르지 못한 탓에 자신조차도 나이를 정확히 몰랐다. 단 한 번도 학교 근처에 가보지 못했던 여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소복도 벗지 못한 채 시집을 갔다. 호적상으론 열세 살이었다. 의붓오빠로부터 쫓겨나듯 시집을 간 여자는 밥을 짓다가 쌀을 쏟았다는 이유로 시집 온 다음 날부터 거꾸로 매달려 매질을 당했다. 몸이 허약하던 남편이 1년 만에 죽자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가뭇없이 내쫓았다.


갈 곳 없는 그녀를 누군가 나이 많은 노인에게 소개해주었다. 여자는 노인의 첩으로 살며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술만 먹으면 두들겨 패는 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여자는 열 살이 넘은 두 딸을 남겨 두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얼마 후 막노동을 하는 또래의 남자와 살림을 차렸지만 여자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때리는 남편만 만났다. 여자가 젊은 남자를 떠나 다시 만난 네 번째 남편은 아내가 죽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가난한 농부였다.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엄마’ 나 ‘새엄마’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나에게 그녀는 그냥 ‘그 여자’였다.


여자는 산에서 약초 캐는 일을 잘했다. 그리고 간혹 술을 마셨다.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날은 아버지와 다툼을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예전에 어머니에게 그랬듯 여자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그 당시 남편들이란 다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운이라곤 없는 여자였다.  


그즈음 아버지는 밭을 팔고 농사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늘진 뒷마당에 있던 황토로 만든 창고를 헌 아버지는 창고 옆에 자라던 감나무도 베어버렸다. 감나무가 있던 뒷마당 왼 편은 더워지는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까슬까슬한 오이들이 둥글게 몸피를 키워가던 자리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 개씩 따 먹으며 더위를 식히곤 했는데 그마저도 뽑히고 초록이 완전히 사라진 뒷마당에는 흉측한 축사가 들어섰다. 어른의 키보다 조금 낮은 축사는 시멘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은 형태로 칸칸이 나뉜 철문마다 커다란 자물쇠가 하나씩 달려 있어 마치 작은 감옥처럼 보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축사에는 눈이 사납고 침을 잔뜩 흘리는 커다란 개들이 한 마리씩 들어앉아 컹컹 짖고 있었다. 개들이 수시로 짖는 데다 여름이면 커다란 파리가 들끓어 나는 더 이상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 않았다.  


하루는 축사에서 기르던 개들 중 마르고 비실비실한 놈 한 마리가 뒷마당 지붕에 매달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는 몽둥이를 여자에게 맡겼다. 개는 거꾸로 매달린 채 여자에게 맞았다.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그런데 녀석은 쉽게 목숨을 내놓지 않았다.


“고 새끼가 죽지도 않고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노려보더라니까”


여자는 더욱 힘껏 때렸다고 했다. 개에겐 안 된 일이었다. 개가 만약 여자를 노려보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살아남을 희망 따윈 없었을 테고, 삶은 여전히 작은 감옥에 불과했겠지만.       


그 후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가 던지는 물건을 몸으로 받아내며 버티던 여자가 한 번은 싸움 끝에 휙 집을 나가버렸다. 싸울 때마다 여긴 자기 집이니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여자가 정작 집을 나가자 쓸데없는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고?”

“뭐 입고 살려고 옷도 안 챙겨 갔노?”  


며칠 후 여자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와 기 들어왔노? 필요없대이. 나가라!”


아버지는 마당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게 그냥 해보는 소리라는 건 여자가 감행한 여러 번의 가출 끝에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싸움 끝에 종종 나가라고 소리쳤고, 여자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집을 나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여자가 영영 집을 나가버린 건, 여섯 형제 중 장남인 큰 오빠의 이름으로 시골집의 명의를 변경 한 뒤였다. 20년 가까이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나간 여자는 으레 돌아올 거라던 아버지의 예상을 깨고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산을 탄다거나 둘째 딸과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 산다는 소식만 들릴 뿐이었다.     

 

언젠가 나에게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자기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어보던 여자. 학교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던 날이면 문 뒤에 숨어야 했던 우리 집의 영원한 이방인. 자그마한 땅에 건축물대장도 없는 그 집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길 바랐던 나의 새어머니.      


사과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와 자신이 매질을 당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그녀를 가엽게 여기지 못한 것과 버리고 왔다던 그녀의 동갑내기 딸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살갑게 대해주지 않은 것. 내 결혼식에 그녀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과 아이의 돌잔치에 초대하지 않은 것. 더 많았을 것이다. 손에 매를 들지 않고도 그녀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그녀의 이름은 남천옥. 하늘 천자에 옥옥 자를 썼더랬다. 참 귀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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