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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22. 2020

차라리 잘 된 일이라던 말

열 세살의 첫 장례식

처음으로 이별을 가르쳐 준 엄마의 장례식

엄마는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쓰러졌다. 6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아침이었다. 깔끔하고 바지런한 엄마가 쓰러진 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옷에 소변까지 보는 지경에 이르자 어지간히 놀란 아버지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서둘러 약을 지으러 떠났다. 옆집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청심환을 먹이고 체했을 때 손을 잘 따는 이웃 할머니를 불렀다. 하얗게 센 머리를 쪽진 할머니가 엄마의 얼굴과 손 여기저기를 바늘로 찔렀다. 잠시 후 엄마는 먹은 약을 모두 토했고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누구도 엄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약을 지으러 영천까지 다녀온 아버지가 약봉지를 들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이미 호흡을 멈춘 뒤였다.

 

가족들 중 엄마의 임종을 지켜본 건 내가 유일했다. 가족들에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설명하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쓰러진 후 한쪽 몸에 마비가 왔고, 몇 시간 동안 거친 숨소리만 야트막하게 내뱉을 뿐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숨을 토하듯 몇 번 컥컥거린 것이 다였다.


엄마는 이불로 덮인 채 안방에서 내 방으로 옮겨졌다. 어른들이 작은 창이 난 벽 쪽에 엄마를 누이고 그 앞에 병풍을 쳤다. 제사 때 쓰던 향로가 엄마 앞에 놓였다.


소식을 듣고 집에 온 몇몇 이웃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훌쩍거렸다. 부랴부랴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온 언니와 오빠들도 병풍 뒤에 가려진 엄마를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 중에 잘 울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슬프기보단 궁금했다. 사람들은 죽는 게 무섭다던데 엄마의 얼굴은 왜 그토록 편안해 보였던 걸까.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을 보고 어째 이리 고우냐고, 누군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거라면 숨을 거두던 순간 엄마의 얼굴이 그리 환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엄마와 단 둘이 찍은 유일한 사진. 이때는 엄마가 좀 더 젊으셨을 적이고, 얼굴의 표정도 온화해 보인다.


평소 엄마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 가면 같았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미간과 입가에 잡힌 깊은 주름. 상을 받아와도 칭찬 한 번 하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 나는 그런 엄마를 무서워했다.


엄마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순간은 저녁식사가 끝난 후였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나가지 않고 밥상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건 말끔하게 집안일을 하던 엄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엄마가 설거지를 미룬 건 순전히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였다. 광고가 흘러나오는 동안 엄마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얹은 채 텔레비전 앞에서 꼼짝도 않고 드라마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럴 때 엄마의 얼굴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엄마는 배우들의 몸짓과 낯선 도시의 풍경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미동도 없이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했다. 그때 엄마의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어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는 내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에만 시선을 주었고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결정적인 장면에서 드라마가 끝나면 엄마의 얼굴은 적을 마주한 군인처럼 다시 굳은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장례식 내내 마루에 둔 아버지의 카세트에서는 불교 경전이 흘러나왔다. 오빠들은 그 옆에서 번갈아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했고, 어른들은 마당에 내어놓은 음식을 먹느라 왁자지껄했다. 사람들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이 별거 아니라는 듯 떠들었다. 누군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의문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게 어째서 잘된 일이라는 걸까.


방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엄마를 보러 갔다. 문을 열자 매캐한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문을 얼른 닫고, 병풍 앞으로 걸어갔다. 병풍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른손으로 살그머니 병풍을 밀었다. 잠자듯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반팔을 입어 드러난 팔뚝에는 거뭇거뭇한 반점들이 눈에 띄었다. 검지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팔을 쓰다듬어 보았다. 차가웠다. 냉장고의 찬 기운이 완전히 몸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문득 엄마의 눈동자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엄마의 오른쪽 눈꺼풀을 조심스레 밀어 올렸다. 엄마의 눈은 텔레비전을 볼 때와 비슷했다. 갈 수 없는 곳을 바라보던 아득한 눈빛이었다.       


다음 날 아침, 장의사가 집으로 왔다. 장의사는 딱딱하게 굳은 엄마의 팔다리에 힘겹게 수의를 입혔다. 그리고 엄마의 입 안에 쌀을 넣은 뒤 커다란 보자기로 얼굴을 씌웠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족들이 울기 시작했다. 말을 안 들어서 엄마 속을 많이 태웠다던 셋째 오빠가 가장 큰 소리로 울었다.
 

영양에서 시집와 청송에서 삼십 년간 석보 댁으로 살았던 엄마는 나와 사촌들이 만든 꽃으로 가득한 상여에 누워 집을 떠났다. 마을 아재들이 상여를 메고 좁은 골목을 나섰다. 앞장선 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에 가며언 언제에 오나아. 어흐야아 디이이야아.


뒤를 따르는데 갑자기 상여가 멈추었다. 큰 느티나무가 자라는 마을 어귀였다. 사람들이 상여를 어루만지며 울먹거렸다. 사람들 옆에 선 나를 한 마을 살던 사촌언니가 끌어당기며 외쳤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그러니 한 번이라도 더 엄마를 만져보라는 의미 같았다. 주뼛거리며 팔을 내밀어 상여를 만져보았다. 엄마를 만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딱딱한 나무 상자를 왜 엄마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바탕 울고 나자 상여가 다시 길을 나섰다. 여자들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여 나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삼십 분쯤 떨어진 나지막한 산에 엄마를 묻고 돌아온 어른들이 앞마당에 쳐놓은 천막을 거두어냈다. 흡사 잔칫집 같은 분위기를 내며 전을 지져내던 가마솥뚜껑도 창고로 들어갔다. 집 안을 가득 채우던 향이 꺼지고 친지와 이웃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는데 네 명의 오빠들과 언니마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나자 집에는 아이처럼 울먹이던 아버지와 울지 않던 나만 남았다. 태어나 겪은 첫 번째 장례식이었다.      


엄마가 쉰넷의 나이로 돌아가신 그 해 봄, 큰 오빠가 결혼식을 올렸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가족사진이 되어버렸다.




열세 살의 나는 몰랐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지금은 영화 주인공이 죽기도 눈물이 난다. 이별이 무엇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뜻이고 그 부재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는 것임을. 


그리고 나이가 들고 삶이 무거워질수록 이해하게 되었다. 자식을 여섯이나 낳아 기른 가난한 농부였던 어머니가 생을 마감하며 고된 삶의 시름을 내려놓았음을. 가족들에게 어떤 짐도 남기지 않은 채. 차라리 잘된 일이라던 말은 그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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