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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31. 2024

취업을 결심했지만 이력서는 한 곳만 넣었다.

일자리를 알아본 지 3주쯤 되었다. 그 사이 이력서는 한 곳만 넣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력서를 수백 개 넣은 취업 지원자들이 들으면 진정성에 의심을 제기할만한 대목이다. 솔직히 말하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지옥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과중한 업무로 체력이 소진되는 일도 없을 테고. 취업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떨어진 김에 글이나 열심히 쓰고 투고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박사과정도 이어가고, 프리랜서 일도 유지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력서를 기 전부터 숱하게 저울질했던 고민이다. 취업을 피하기 위한 회피 전략이자 자기 합리화라는 걸 알기에 양심상 이력서를 (하나라도)내본 것이다.


그래도 겨우 한 곳 지원하고 취업되길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나. 아직 발등에 불이 덜 떨어진 것인가. 누군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한 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력서를 내볼 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취업이 쉽지 않다는 인문계열 전공에 운전면허도, 공인어학 점수도, 컴퓨터 자격증도 없는 무스펙. 지원하려는 업무의 연관성으로 보자면 민간 현장의 ‘경험’은 풍부한데, 직장에 소속되어 일한 ‘경력은 손톱만큼 짧은 현장 전문가. 한 줄로 요약하면 팀원으로 뽑기엔 나이가 많고, 팀장으로 뽑기엔 경력이 짧은 애매한 40대 후반의 경력중단여성. 이게 취업을 앞둔 나의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이면 남들이 조직에서 업무 경험을 쌓고 밖으로 나와 독립하여 자기 사업을 거나 의사결정권한이 높은 위치에 있을만한 나이다. 박사학위를 땄어도 벌써 따고 강의를 하고 있을 나이 아닌가. 그런데 전무하다시피 한 4대 보험 경력 때문에 팀원급으로 밖에 채용할 수밖에 없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팀장들에겐 꽤나 부담스러운 지원자를 어느 조직이 반기겠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취업을 위한 준비가 안 된 사람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러 민간단체를 만들고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공간을 운영하고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모두 사적 경험일 뿐,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공적 경력이 아니었다. 브런치에 6년간 글을 쓴 것도, 주민들과 마을도서관을 5년간 운영한 것도, 그 후 마을카페를 9년간 운영한 것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는 존재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느 것도 호봉 산정을 위한 '업무경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취업에 생각이 없을 땐, 그저 나답게 사는 방식을 좇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취업시장에서 나는 그다지 매력적인 노동자가 아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웬만한 건 기본 이상으로 하는 편이다. 한글 문서도 잘 만들고, 디자인 툴도 다룰 줄 알고, PPT도 숙하다. 증명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어서 그렇지. 갈등이 생기기 전에 미리 소통하고 조율하는 편이라 갈등의 당사자로 분란을 일으킨 적도 없다. 자료를 준비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의사결정을 내리고, 실무적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 후 평가를 하는 과정에 대한 경험도 풍부하다. 다만 회사가 아닌 곳에서의 경험이기에 업무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뿐.


이력서를 낸 곳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회적 경제조직이다. 채용 분야는 지자체의 연구 용역 수행과 지역계획 수립. 급여는 협의를 통해 책정되고 3개월 수습 후 정규직 채용이 될 수도, 안될 수도 있는 자리지만 그간 해왔던 활동이나 경험을 살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용공고를 본 지는 오래되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서류 준비를 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지원을 해야겠다고 머리는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미련이 가득했다. 결국 정해진 마감 기일이 다 되어갈 때쯤에야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경력은 짧지만 활동 경험은 충분하다고 판단했기에 활동사항란을 별도로 기재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너무 어려워서 제일 뒤로 미루고 회사가 선택 제출로 명기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9장이나 만들었는데, 최종본이라고 저장하고 보니 채용하려는 업무 분야와 상관없이 개인적 활동을 보여주듯 쭉 늘어놓은 느낌이 들었다. 고민 끝에 전체 분량의 절반이 넘는 다섯 페이지를 날렸다. 예전 자료를 찾고 편집한 시간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는 자신들이 채용하려는 분야와 관련된 포트폴리오를 보고 싶은 것이지 내 활동의 서사를 보고 싶은 게 아닐 테니까. 업무와 관련 없는 과도한 자료 폭탄은 피로도만 높여줄 뿐. 만들어놓은 자료가 아깝다고 자료를 왕창 던졌다간 면접관의 짜증과 더불어 회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었다.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마감하고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자기소개서를 붙잡고 또 하루를 끙끙거렸다. 며칠간의 준비 끝에 마감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서류를 제출했다. 이제 겨우 첫 이력서를 냈을 뿐인데,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서를 제출한 지 이틀 후. 이른 아침부터 휴대폰이 울렸다. 비수기의 프리랜서에게는 좀체 없는 일이다. 02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였다. 올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워낙 여론조사 전화가 많이 왔던 터라 별생각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어째 싸한 느낌이 들었다. 포털에서 걸려온 번호를 검색해 보니 이력서를 지원한 회사였다.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OOOO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OO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방금 온 전화를 못 받아서 다시 연락드렸어요.”

“아, 네. 저희 채용공고에 지원해주셨죠? 면접대상자로 선정되셔서 안내차 연락 드렸어요. 방금 메일로 세부 내용은 보내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었다. 이러다 진짜 직장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큰 일이다. 내 마음은 아직도 작업실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일하는 프리랜서의 삶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안 좋아하던 도넛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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