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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17. 2024

섬마을로 출장 갑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업력 6년 차에 접어든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마을 만들기, 도시재생, 지역활성화와 관련된 여러 분야의 사업을 한다. 교육을 개설하기도 하고, 유관 단체들과 네트워크도 하고 커뮤니티 공간 조성 지원도 한다. 주요 매출은 조사연구와 지역계획수립과 같은 용역에서 발생하는데, 작년과 올해는 해양수산부에서 지원하는 국책사업으로 어촌 마을을 활성화시킬 사회혁신실험을 진행하는 현장사무소 운영과 지역활성화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나는 입사와 동시에 해당 지역의 마스터플랜 수립을 위한 주민전수조사에 투입되었다. 작년 여름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현장사무소와 협력하여 두 어촌 마을에 거주하는 300여 세대의 주민들로부터 설문조사를 받는 것이 첫 업무였다.


지방출장이 있는 업무임을 알고 지원했기에 출장 자체는 큰 부담감이 없었다. 장거리 이동과 낯선 잠자리가 불편하겠지만 현장을 제대로 조사하려면 당연히 필요 일이라 여겼다. 면접을 볼 때도 이런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었다.


"출장은 얼마나 자주 가게 될까요?"


면접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 궁금한 게 없느냐는 말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3명의 면접관 중 가운데 앉은 대표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이주에 한 번 정도 내려가게 될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씩?"


? 겨우 일주일에 하루 이틀로 조사가 된다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 출장 가서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 일주일에 삼, 사일은 있던가. 아예 한 달 정도씩 머물면서 현지 상황을 충분히 조사해야 현실성 있는 지역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격을 위해 과장한 아니었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해 온 활동가로서의 진심이었다. 인류학자들은 현지 연구를 하기 위해 1년, 2년씩 거주하기도 하는데 겨우 한 달쯤이야.


"네 물론 그렇지만 다들 돌봐야 할 가정도 있고 하니까"


하긴. 아이들이 어리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게 돌봄은 그다지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저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족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말하고 보니 좀 이상했다. 돌봐야 할 가정이 없다거나, 가족을 돌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서둘러 사족을 덧붙였다.   


"아이들이 다 컸거든요. 둘 다 대학생이고, 남편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고요."


합격 후 선임과의 사전미팅에서 곧바로 지방으로 함께 내려가겠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입사 첫날은 서울에 있는 본사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앞으로의 업무와 관련된 자료들을 읽었다. 생소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욱여넣으니 머리가 멍해졌다. 오후에는 화면의 글자들이 울렁거리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작업실에서는 피곤할 때 잠시 눈을 감거나 침실에 가서 누울 수도 있지만, 이곳은 업무시간과 휴게시간이 정해져 있는 회사다. 정신이 맑든, 몽롱하든 자리를 지켜야 한다. 


오후 6시. 고대하던 퇴근 시간이 되어 옷을 챙겨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대표와 선임 간에 출장과 관련된 이견이 발생했다. 이제 막 입사한 내가 같이 출장을 가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것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다. 


그래서 출장을 같이 가는 것인가. 안 가는 것인가. 


논의해서 알려줄 테니 퇴근하라고 일러주면 좋으련만. 나는 퇴근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결론을 기다렸다. 회사에 20분이나 일찍 도착한 날이었는데. 10분, 20분이 넘어가도록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6시 30분이 되어서야 같이 출장을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첫 출근길과 퇴근길


이튿날은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목적지인 전라도 고흥에는 오후 1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고, 점심을 먹고 현장사무소로 출근했을 때는 이미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입사 첫 주는 2박 3일간 고흥에 머물다가 금요일에 상경했고, 다음 주에는 월요일에 내려가 금요일이 되어서야 집으로 귀가했다. 


장거리 지방출장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처음 2주 간은 스트레스가 심했다. 잠을 푹 못 자는 날이 많았고 악몽을 꾸다가 깨기도 했다. 현장도 조직도 관계도 모두 낯선 데다 나의 책임과 권한은 어디까지인지가 불분명했다.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계나 정보, 자원도 전무했다.


나는 현장사무소 담당자와 함께 마스터플랜수립을 위한 주민전수조사의 실무 데스크를 맡았는데,  아주 작은 일조차 현장 직원들에게 번번이 물어보는 상황에 놓이곤 했다.


"스테이플러는 어디 있죠?"

"대봉투가 있을까요?"

"포스트잇이랑 연필 좀 쓸 수 있을까요?"

"와이파이 비번은 뭔가요?"

"스캔 파일은 누구 컴퓨터로 전송되나요?"


며칠 동안은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는 일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사소한 질문들로 그들을 귀찮게 하고, 일도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같았다. 


내가 오래 활동하고 일해왔던 지역에서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협력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자가 지닌 경험과 역량, 자원이미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연결하고 활용하기가 수월했다. 조율하고 논의해야 할 일들은 많았지만, 기존에 구축된 관계와 네트워크를 토대로 얼마든지 협의하고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낯선 조직 안에서는 기존의 자원과 정보, 관계,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익히고, 적응해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입사 후부터 쉼 없이 4주 내내 출장을 다녔다. 주말이면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기에 다른 무언가를 할 여유가 생기질 않았다. 체력을 쥐어짜 내 청소나 빨래, 장보기, 반찬 정도를 하는 게 다였다. 일을 할 때도, 집에 있을 때도 계속 머리가 무거웠다. 아침에도 피곤하고, 오후에도 피곤하고, 밤에도 피곤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새벽일어날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 하루만 잘 버텨보자고. 그러면 내일이 올 테고. 내일은 또 내일 버티면 되니까오늘 해야 일을, 있는 데까지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테니.


 


출장을 갈 때마다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선다.
이곳은 현장사무소가 있는 전라도 고흥의 오취마을. 첫 2주 정도는 내려갈 때마다 흐리거나 비가 왔다.



숙소가 있는 고흥읍내에서 현장사무소로 가는 출근길. 지하철을 타고 본사로 출근할 때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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