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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주인도 손님도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

by 안녕


수원에서 이틀간 교육을 받을 일이 생겼다. 다른 이들의 차를 얻어 타고 의정부를 왔다 갔다 해도 되지만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간만에 혼자만의 저녁을 갖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았다. 인터넷에 후기가 좋은 세 군데의 숙소를 예약해보려고 했으나 만실인지 모두 예약불가. 그 중에서도 이탈리안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식당을 겸한 게스트하우스를 놓친 것은 꽤나 아쉬웠다.


그 다음 숙소, 그 다음 숙소의 예약불가를 거쳐 선택한 곳이 매교역에서 가까운 '둘째오빠네 게스트하우스'였다. 이름이 조금 특이했지만 며칠 전 만난 둘째 오빠가 생각나기도해서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6인 도미토리실 가격이 2만 3천원. 예약하지 못한 다른 게스트하우스보다 조금 조렴한 편이다. 문자로 예약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가능하다는 답변이 바로 왔다. 혹여나 금새 만실이 될까 싶어 부랴부랴 송금을 하고 예약을 완료했다.


교육이 끝난 후 인근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후 밤 10시경 숙소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대로변의 낡은 건물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1층부터 3층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건물 안은 적막했다. 주인이 문자로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첫 번 째 출입문을 여니 고요한 건물 안에 삐익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닥에 손님의 신발이 한 켤레도 안 보였다. 아직 다른 손님들이 아직 오지 않은걸까. 오른편의 작은 신발장 위에는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서너 켤레와 여행자용 슬리퍼 몇 개만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현관등외에는 거실불도 모두 꺼진 상태였다.


문득 오늘 밤 숙소에 머무르는 사람이 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막감을 넘어선 오싹함이 들었다.


방, 부엌, 화장실, 거실 모두 불이 꺼진 숙소


'주인이 비치해놓은 쥬스가 있다면 절대로 마시지 말자. 잠든 동안 장기를 빼갈지도 모르잖아.'

(아직까지 게스트하우스에서 잠든 여행자의 장기를 빼갔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혼자 머무는 여행자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비극적 상상을 하던 찰나였기 때문에 숙소를 가장하여 한 명의 여행자만 묵게 한 다음 장기를 빼가는 신종수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1 : 그깟 2만3천원이 뭐가 그리 아깝다고. 그냥 딴데로 가. 자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나2 : 이 시간에 어디에서 또 숙소를 구하겠어? 여행지처럼 숙소가 많은 지역도 아니고, 난생 처음 자보는 곳이잖아!


나는 온갖 부정적 생각들에 휩싸인 채 선뜻 거실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미 송금한 2만3천원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어쩌면 다른 여행자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피어올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평소의 신념과 어떤 일이 닥친다면 그 역시 받아들여야한다는 이상한 초연함이 버무려져 결국 컴컴한 숙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자방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방 역시 깜깜했다. 철제로 만들어진 앙상한 3개의 이층침대 중 가장 구석진 자리에 가방을 놓고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침대에 걸쳤다. 물건이 자리를 잡으니 그나마 조금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2만3천원에 예약한 6인실 도미토리


마음을 굳게 먹고, 거실의 공용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욕실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다. 우리집 욕실보다 훨씬 깨끗했다. 핏자국 같은건 보이지 않았다. 샴푸와 린스도 비스듬한 각도로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휴지통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나오다 화장실 입구 옆에 놓인 책장에 눈길이 갔다. 여행자 숙소에 어울리는 여행관련 책과 인테리어 관련 책들 사이에 몇 권의 책이 눈에 띈다. <파우스트>, <오만과 편견>, <군주론>. 주인장이 샀거나 읽었을 책들의 목록을 보니 그제야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여행자의 장기를 내다 파는 사람이라면 굳이 파우스트나 군주론을 꽂아두었을 리가 없다.


숙소의 책장에 꽂힌 오만과편견, 파우스트, 군주론, 정의란 무엇인가


그 중 눈길을 끈 건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라는 책이었다. 외계지성체에 대한 두 교수의 대담을 담은 책으로 여행자가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혼자 읽기엔 더없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침대의 전기장판을 켜고 엎드려 누워 책을 읽었다.


책에는 외계지성체가 지구를 방문하는 목적과 지구인 피랍 문제에 관한 두 교수의 개인적 의견이 꽤나 학술적이고 객관적으로 담겨있었다. 그들의 지구 방문이 핵개발과 환경파괴로 위기에 처한 지구의 미래를 염려한 외계지성체의 해결책 모색때문일 것이라는 두 대담자의 공통적 견해는 설득력이 있어보였다. 한 교수는 멸종으로 향해 가는듯한 지구의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무기 개발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 불균형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외계지성체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거라고.


지구에도 먹이사슬의 불균형이 생태계 파괴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리 억측도 아니다. 인간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데다 기업가들은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권력자들도 무기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데에 격한 동의가 일었고, 차라리 외계지성체들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조취를 취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숙소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책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몇 페이지가 더 남았지만 하루 종일 받은 교육과 배아래쪽의 따뜻한 전기장판 덕에 졸음이 쏟아졌다. 주인이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내려오는 눈꺼풀도 참기가 어려웠다. 대로변에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와 건물 뒤쪽에 커다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불을 끄자마자 잠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시간은 아침 7시 20분.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인지 간밤에 깨었다가 잠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머리가 몽롱했다. 침대에 누워있기가 힘들어 일찌감치 짐을 꾸려 거실로 나왔다.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어보였다. 3월의 아침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가방에 든 인스턴트커피를 타려고 했지만 주방의 정수기는 온수 기능이 안되었고 전기포터도 보이지 않았다.


밥을 차려 줄 아이들도 없고, 씽크대에 쌓인 설거지 거리도 없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낯선 이도 없는 곳에서의 시간. 그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하곤 했는데.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혼자 보낸 시간은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혼자만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잔다는 무서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로움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독립하면 나도 독립하겠다고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헌데 불 꺼진 집에 들어 와 혼자 씻고, 먹고, 자는 기분이 이토록 적막하고 쓸쓸할 줄이야. 물론 나의 취향이 스민 공간에 따뜻한 차를 끓일 수 있는 주전자가 있고, 읽던 책들이 꽂혀 있고,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면 또 다르겠지만.



2017년 10월 수원 '둘째오빠네 게스트하우스'에서. 공포와 고독 사이의 오묘한 체험을 선사해준 곳.


무인도에 갇힌 열 사람이 모두 죽고 한 명도 남지 않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만큼이나 등골이 서늘했던 하룻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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