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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을 살고 있나요?

by 안녕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자주 생각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

그런데 낯선 곳에 혼자 잠을 자러 가는 일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낯설고 불편할 테니까. 이 무슨 모순인가. 하지만 수많은 여행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익숙한 곳을 떠나보아야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법. 불편함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단행했다. 그렇게 떠난 곳이 겨우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서울이었지만, 나로선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새로운 시도로의 워밍업이 필요했다.


예약한 홍대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섰을 때 실내는 꽤나 고요했다. 저녁 8시도 안된 시간에 잠을 자러 숙소에 들어오는 건 나뿐인 듯했다. 다들 펍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거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겠지. 나는 그저 홍대에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가 많고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선택했을 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대화나 몇 마디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과 앞으로 내 인생은 어찌 되려나 고민 좀 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씻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말을 걸어볼 만한 이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6인실이나 되는 방에서 불을 끄고 혼자 잠을 청하려니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적막한 밤이었다.




탁. 한밤중 방문을 여닫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군가 뒤늦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파박. 갑자기 방이 환해진다. 아마 내가 없는 줄 알고 불을 켠 모양이다. 나는 잠결에 짜증이 밴 목소리로 말했다.


"불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


첫 여행지에서 타인에게 건네는 첫 마디가 결국 이런 거라니.


"Oh, I’m sorry"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녀는 대답과 함께 얼른 불을 껐다. 어차피 자던 중이었고, 그녀가 아주 멀리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평소 집에서 보내는 주말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서는 이런저런 소음이 들렸다.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 토스터기에서 빵이 튀어나오는 소리,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에 잼이나 버터를 펴 바르는 소리, 유리병에 든 우유를 따르는 소리, 꿀꺽거리며 마시는 소리, 빈 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 부지런한 커플이 이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방음이 안 되는 숙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방에만 있는 게 갑갑해서 잠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좁은 거실에 하나뿐인 소파에 앉으려는데 2층에서 내려온 외국인 여자가 갑자기 인사를 건넨다.


“Hi, I’m Hana. I’m working here.”


여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숙소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아, 하며 웃기만 했다.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던 영어를 한 마디 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더니 혼자서 부엌을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전화기, 텔레비전 위의 먼지를 물티슈로 닦았다.


숙소를 나서기 위해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메는 순간까지도 같은 방의 외국인 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에서 열심히 청소하는 Hana에게 숙소 대문의 열쇠와 현관 비밀번호가 적힌 명함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묻는다.


“Are you living today?”


당신은 오늘을 살고 있느냐고? 느닷없이 오늘을 사느냐니. 당연히 살아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당신 앞에 서 있지. 별걸 다 물어보는군. 하지만 당황한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감사합니다”라고 서툰 한국말로 인사한다.


나는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는 그녀의 질문이 꽤 철학적이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나섰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세계와 깊숙이 접속하며 살고 있는지.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과거를 곱씹어보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삶에 대한 질문을 해 준 그녀에게 왠지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난생처음 혼자 떠난 여행지의 숙소를 둘러보았다. 하얀 철문이 달린 대문과 2층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벽돌 건물. 편안한 마음으로 머문 숙소는 아니었지만 그새 무슨 정이라도 들었는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대문을 열며 이제 정말 '떠난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그녀의 질문이 다른 의미였다는 걸. 그녀는 “Are you leaving today?”라고 물었을 것이다. 게스트하우스의 스탭이니 오늘 떠나는지 확인하느라 물었을 테지. 이 당연한 질문을 인생에 대한 온갖 고민으로 똘똘 뭉친 상태로 여행을 떠난 내가 엉뚱하게 해석한 것일 뿐.


아, 나는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한걸까. 나의 말들은 또한 얼마나 자주 왜곡되어 전해졌을까. 낯선 이와 몇 마디 섞지 않은 짧은 틈에도 이런 오해가 있을진대. 어쩌면 나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곳을 떠나보아야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던 말은 참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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