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조건 속에서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

임레 케르테스의『운명』을 읽고

by 관성


2002년, 임레 케르테스는 '역사 속 개인의 연약한 경험을 통해 독재적 야만에 맞서는 인간의 취약한 개인성을 옹호한 작품 세계' 라는 평가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운명(원제: Sorstalanság, '운명없음')』은 임레 케르테스가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흔히 홀로코스트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단순한 역사적 증언이나 고발의 텍스트로 환원하기에는 지나치게 철학적이다. 내가 이 책을 덮은 뒤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인간은 조건 속에서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






인간성의 해체

돌아보면 이후의 날들보다 첫째 날이 더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 수감되었을 때 나는 마치 손님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결국 인간 본성의 기만 습관에 따라 나중에는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112
나는 사람들에게 같은 노력과 같은 선의를 볼 수 있었는데 모두가 자신이 착한 죄수임을 보여 주려 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오히려 주변 조건들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에서의 삶이 그러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157


『운명』의 서사는 극적인 전환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화자의 의식은 단번에 붕괴하지 않는다. 그는 서서히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아버지가 징집되었을 때의 무감함, 아우슈비츠에 배정받았을 때의 어리숙한 우월감은 화자의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곧 ‘착한 죄수’가 되려 애쓰며,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변해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취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기만적 능력을 본다. 우리는 저항하기 전에 먼저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는 순간, 윤리는 재정의된다.





신체와 자아의 왜곡

한때는 나의 훌륭한 친구였던 나의 몸이 이제 점점 이상하고 점점 이질적으로 변하면서 뭔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뭔가 추한 모습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나는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때문에 지나친 수고에 대한 모든 불쾌한 저항이나 추위 때문에 나는 씻거나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신발도 벗지 않았다. 180
그날이 끝나 갈 무렵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날이 마지막 아침일 거라고 생각했고 걸을 때마다 더 이상 걷지 못할 거라고, 움직일 때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전히 걷고 움직이고 있었다. 185
내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거의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자주 듣곤 했던 ‘시체’라는 표현을 그때까지는 죽은 사람에게만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고 완전히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몸이 그곳에 있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9


화자는 수용소에서 몸은 살아 있지만 자아는 크게 훼손되어 가는 분리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을 살아 있는 ‘시체’로 인식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균열을 드러낸다. 나는 여기서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한 ‘상상의 질서’를 떠올렸다. 우리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라고 명명하는 것들은 사회적 합의 위에 세워진 구조물일 뿐이다. 인간은 선해지거나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맞게 재구성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불편함의 윤리

나는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진심이었고 우리의 미래와 관련된 좀 더 현실적인 다른 희망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바람이 내 마음속에 가득했다. 나는 허영심이라는 감정이 최후의 순간까지 사람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내 가슴을 후벼 파서 어떤 질문이나 요구,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3
이 광경과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미 굳은 가슴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신중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205


이 작품은 독자와 화자의 인식 사이에 의도적인 괴리를 만든다. 스스로의 당연한 욕망을 질책하는 화자의 모습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소설의 문학적 장치이자 작가의 의도이다. 저자는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기보다, 그 사건 이후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준다. 생존은 윤리적 판단을 왜곡한다. 인간은 의미를 잃어도 지속하려 한다.


나는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울 때마다 늘 경외심을 느꼈다. 어떻게 개인이 국가를 위해 극단적인 저항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은 주로 '영웅 서사'에 가깝다. 의지가 조건을 돌파하는 이야기(자유가 조건을 넘어선 사례)다. 반면 홀로코스트는 주로 '해체 서사'를 가진다. 조건이 의지를 재구성하는 이야기(조건이 자유를 축소한 사례)다.


물론 독립운동에도 굴복의 삶이 있으며, 수용소 안에도 저항의 사례가 존재한다. 그 경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초월적인 영웅의 서사보다, 조건 속에서 무너지는 인간상이 더 현실로 와닿는다. 인간이 얼마나 조건에 의존적인 존재인지 더 실감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적 해석

사람들은 나의 이 모든 정직과 여태까지 내가 걸어온 걸음의 의미를 다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와 반항심은 도대체 왜 이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떠오른 말이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확신한 적이 없었다. 282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논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안다. 석양으로 몰든 아늑한 광장과, 수없이 비바람을 맞아 왔지만 여전히 수천 가지 기대로 충만한 거리들을 둘러보며 내 안에서 하나의 각오가 생겨나더니 그것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284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 선고된 존재'이다. 인간은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지만 그 상황에 대한 태도까지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현실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은 여전히 각자 선택의 영역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적 관점에서 운명 속 화자는 자유로운가? 그는 수용소에서 매 순간 저항과 체념, 순응과 내면화라는 극도로 좁아진 선택의 폭에서 스스로 ‘적응’을 선택하며 객체화된 신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화자는 '지속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 지점에서 다시 주체적 인간이 된다.


극단적 조건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결국 임레 케르테스는 『운명』을 통해 자유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얼마나 축소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소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어떤 선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경계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주 작고 미세한, 지속하려는 의지의 최소 단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임레 케르테스의 표현을 빌려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이렇게 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과연 어떤 조건 위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무겁게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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