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갈이글(上)

by 노마 장윤석

해갈이를 좋아한다. 연말이 다가오면 괜스레 마음이 촉촉해지는데 이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고마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거나 미처 하지웁지 못한 말들을 전하고자 하는데 항상 다 전하지 못하고 해가 넘어간다. 신년맞이 대청소도, 한 해간 쓴 것들을 톺아보는 것도. 추억에 퐁퐁 잠기는 것도 채 다하지 못한다. 해갈이가 헌 노트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새 노트를 펴는 것처럼 정갈하게 이루어졌으면 하지만 그럴 리가, 오늘은 어제의 내일일 뿐이다.

일기장에 2020을 적는데 설레서 혼났다. 두 글자 바뀌는데도 이러는데 1999년에는 어땠을는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그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보다시피 알다시피 의미 부여를 좋아한다. 사실 의미를 만들고 부여하지 않고서는 사는 법을 모른다. 사는 이유도 모른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함에서 실존한다는 한 철학자의 말은 돌아보면 내 모든 행동의 근저에 자리해 있었다.

그래.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는 실존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평상시에 잊어버리고 있거나 미뤄두었던 질문들에. 먹고사는 거에 급급하지 않고, 사회에 적응하거나 관찰하거나 바꾸려는데 힘 좀 빼고 정직히 마주하고 싶었다. 나 뭐하고 있나 잘 살고 있나 어떻게 살까 하며 조금의 청승과 약간의 다리를 떨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어디 툭 해서 될 일인가, 해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하고 조금은 막막하고 두려운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고민을 털어놓자면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가까스레 균형을 잡고 있지만 쉬이 무너져 내릴까 두렵다. 아침에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이 아니었다면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거란 생각을 하고서 혼자 암 그렇고 말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앓는 소리 좀 하겠다. 기분의 진폭 차가 극과 극에 가까웠다. 별거인 일로, 별거 아닌 일로 하루에도 수시로 멘탈이 몇 번씩 아작났다. 한동안 기후우울증을 세게 앓았고, 지금은 우울을 지나 보내는 감각을 어느정도는 익혀낸 상태다. 보이기에는 밥 살뜰히 지어먹고 매일 아침 등산 다니고 밤에는 요가하는 소문난 건강맨이지만 언제 와르르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움 속에 머무르곤 한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걱정되는 건 주위의 아끼는 사람들 나는 혹여나 이들이 죽는다면 내 모든 것이 붕괴되리란, 아니 붕괴시켜버릴 것을 안다.

개인은 사회 속에(사회는 자연 속에) 있다. 사회에 변화를 가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지만, 문제의 폭과 부피를 줄여줄 수 있다 단언한다. 자명한 것은 나는 소중한 사람들의 고통에 참 무력하다는 것이다. 힘이 되어주고 싶다. 그래서 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있을 테다.

나는 도서관 가는 길이 설레고 잔뜩 책을 쌓아놓고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지만,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괴롭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유복한 특권들에 기초해있는 것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함을 상기하면 금세 괴로움으로 바뀐다. 그냥 넌 힘든데 난 행복하면 괴롭다.

곧 세상은 더 어려워질 거다. 약하게 말했다. 물에 잠기던지 불에 휩싸이던지 할 거다. 이것이 나의 어설픈 짐작이라면 소원이 없겠다. 학자로서 내리는 진단이고, 내가 믿고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생각과 방향도 같다. 무감한 감각세포와 뇌세포들을 깨우고 직시해보라. 지금은 유례없는 위기다. 외적으로는 기후·자연조건이 문명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한계까지 균열 났고 내적으로는 사회적 양극화와 이념 대립으로 불안정한 사회 속에 황폐화되어간다. 통계로 말하자면 숫자 8 두 개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8은 8명이 세계 부의 절반을 가지고 있다는 불평등도 통계고(Oxfarm), 후자의 8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로 제한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 8년이라는 뜻이다(IPCC 시나리오로 추정한 carbon budget). 사회의 많은 지표가 2차 세계대전 직전의 1930년 대와 닮았다. 공황과 양극화, 극우파시즘의 출현, 단단한 사회조직들의 붕괴로 말해지는 내적 외적 분열까지. 그렇다면 곧 전쟁이 터진다. 시작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만 원전이 아작 나거나, IMF는 우스울 정도의 경제공황이 오거나, 식량자급률 25% 상태에서 식량위기를 맞거나 가능한 시나리오는 부지기수다.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지만 위험·재난의 발생빈도율은 분명히 증가폭을 그리고 있다.

꿈을 바꾸기로 했다. 학자에서 목수로. 지금은 방 한 켠에서 하고 싶은 공부나 연구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온 세상이 물 혹은 불에 휩쓸릴 테니 방주를 만들어야겠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널빤지 조각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공멸을 목도에 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마뜩잖다. 사람들이 싫은 소리 듣는 거 싫어하는 건 당연하니, 나는 일상이렸다 하고 반쯤 정신줄 놓은 채 열심히 산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싶어서. 해가 넘어가기 전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폴라니처럼 삶을 고통을 마주하는데 비끌어멜까 고민하고 있다고 썼는데. 나는 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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