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파란하늘 빨간지구, 경제성장이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클라이브 해밀턴,『인류세』
조천호,『파란하늘 빨간지구』
더글러스 러미스,『경제성장이 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을 읽고
하나의 화두
요 근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화두를 품고 살았다. 더 이상 푸르른 대지는 볼 수 없고, 다음의 봄은 불투명하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알고 앓으면서, 막막하고 먹먹한 마음에 여력 닿는 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생태워크숍 '녹색마을학교'를 준비해 기후위기를 테마로 한 녹색포럼을 열었고, 성공회대 기후위기 공동선언을 했다. 작금의 상황을 짚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서로의 고민들을 나누는 자리들을 마련해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묻는 것은 얼핏 회의적인 물음처럼 들린다. 맞다. 사실 이미 늦었다. 지금부터 세계가 거듭 반성하고 쇄신하여 탄소를 1그램도 배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후변화는 일어난다. 막막할 때면 그람시(Gramsci)의 말,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하라" 을 새긴다. 애써 희망을 부여잡고 의지로 낙관하는 중이다. 이성이 공멸(共滅)을 가리키더라도.
바야흐로 인류세(Anthropocene)다. 이는 지난 1만 년 동안 안정적이었던 ‘홀로세(Holocene)’가 저물고 지질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한켠의 몰자각한 이들 – 예로 에코 모더니스트(eco-modernist) - 은 드디어 인간이 자연의 노예로부터 벗어났다며 자유란 이름으로 무절제한 방종을 일삼지만, 아쉽게도 기뻐하기 전에 다 죽게 생겼다. 인류세가 시사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더 이상 생태계는 안정적인 순환을 하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능력이 더는 인류에게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현대의 종말을 뜻한다."
위기라는 단어를 재차 강조한다. 문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2018년 IPCC에서는 이례적으로 특별보고서를 제출했고,「지구온난화 1.5℃에 대한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근시일내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 이하로 제한하지 못할 경우 사태는 심각해진다. 2040년 전후 지구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는데, 이 무감각한 숫자를 넘어서면 이 변화가 초래할 국면에 대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치인 2.0℃가 3년 만에 안일한 목표치였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심지어 IPCC의 예측과 제안조차 사태를 과소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에서 발표한「실존적인 기후 관련 안보 위기 – 시나리오적 접근」에 의하면 2030년에 지구는 이미 1.6℃ 상승에 도달한다. 갈림길에 도달하기까지 IPCC는 20년,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는 10년 남았다고 예측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있는 임계점이 지나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남아있다.
문제는 기후위기의 속성이다. 기후는 연속적이고 다차원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는 생태계가 상호연결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이는 위기의 번짐-전가를 뜻한다. 이를테면 가뭄과 산불의 야기가 농작이 어렵게 하고, 이는 식량, 물, 에너지, 환경, 보건 등 기반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기존의 위협을 배가시키고 불안정을 촉진시켜 사회정치적인 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는 평등하지 않다. 탄소배출은 기성세대에서, 북반구에 위치한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졌지만, 피해의 몫은 앞으로를 살아갈 미래세대와 사회안전망이 열악한 남반구 국가들에게 지워진다. 배출의 책임은 기업에게 있는데, 폭염의 피해는 야외노동자와 주거 빈곤층에게 집중된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이 공평하게 있지 않음에도, 위험은 모두에게 닥쳐온다.
머릿속에서는 8년 5개월의 시계가 흘러간다. 조급하지만 신중하여야 해서 고민이 깊다.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후-우울증을 앓고 있다. 사람들은 미동하지 않는다. 미증유의 위기를 인식했더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더라도, 파국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반향은 적고 파동은 얕다. 대게의 사람들은 '날씨'와 '기후'를 혼동하는 듯하다. 날씨가 매일 변하듯 기후도 변한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이에 조천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날씨는 기분이고 기후는 성품이기에 날씨는 변해야 하고 기후는 지속해야 한다. 날씨가 변해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기후가 변하면 우리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기후변화를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기후에서 생존해야 하므로, 과거는 미래의 안내자가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경제성장이 아니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기후위기는 유한한 세계를 무한한 세계처럼 살았던 우리의 존립 방식이 총체적으로 빚어낸 문제이기에 어느 하나 콕 집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를 이 파국으로 치닫게 한 주범은 분명히 있다.
하나의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해 왔다. 경제성장이라는 유령이 먹고사니즘, 현실주의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모든 논의를 종식시켜 왔다. 근래의 일이 아니고 오래간 겹겹이 쌓여와 이제는 그 실체가 두텁다.
그러나, 무엇이 현실인가. 생태․환경을 이야기하면 경제적이지 못한 것으로, 현실적이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 라는 꼰댓말은 부지기수로 들어왔다. 더글라스 러미스는 이에 대해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쓴다.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 빙산을 향해 전진하는 타이타닉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에, 엔진을 멈추어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이타닉호의 바깥에는 바다가 있고, 빙산이 있듯이, 세계경제의 바깥에는 자연환경이 있다." 안정적이고 건강한 행성이 없다면, 사회도 경제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평화도 안정도 없다.
경제학도로서 경제의 참뜻을 찾기 위해 종횡무진 걸어왔다. 경제만능주의를 만든 경제학은 경제에 대해서 대강 정의하고 넘어간다.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별다른 질문과 논의가 없다. "경제성장은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식의 어불성설을 복잡한 수식으로 반복한다.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 더 많은 GDP를 좇는 것이 풍요로움이라 단언한다. 주장도 아니고 전제다.
자연을 불변의 변수로 상정하고 하던 모든 계산은 그 유효성을 잃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물적 성장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자연이 인간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지는 않는다"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은 더 이상 몇몇 사람들의 경고가 아니다. 그러니 이전의 몰자각한 이론은 과감히 재활용 분리배출 하자. 계속 물어야만 한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당의 구호처럼 "GDP와 결별한 시대, 우리의 일상은 더 풍요롭다."
그린뉴딜 – 새로운 사회계약
새로운 사회계약을 말한다. 내가 원한 세상은 사회는 이게 아니었다. 살인적인 집값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말하여지는 경제적 불평등·부조리. 매일 나서기 전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해야 하는 공기와 실존적 위협을 목도에 둔 기후위기, 나는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와 생태에 닮은꼴의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마르크스(K. Marx)의 분석처럼 자본은 인간과 자연을 동시 소외 시키고, 양자를 착취함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한다. 최근 심각성이 대두되는 양극화 문제는 사실 성장 논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삶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마치 진정한 풍요로움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삶은 점차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어간다. 물질적인 풍요, 사실 그 조차도 타자의 고통과 연루되어있기에 풍요라고 부를 수조차 없겠지만, 국민소득 3만 불 따위는 아직도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깨닫지 못하고, 근거 없는 경제성장을 옹호하는 이들 줘버리라지.
이미 지구 곳곳에서 지구의 미래를 위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를 필두로 한 미래세대의‘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School stike for climate)에 이어 영국의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독일의 토지의 종말(Ende Gelaende) 등의 단체가 기후행동에 나서고 있고, 이에 응답해 세계 곳곳의 국가와 지방정부 1000여 개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사회적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이에 대응하려 나섰다. 한국도 얼마 전 서울시와 충청남도 지방정부가 기후위기를 선포했다.
거대자본과 미온적이고 기득권 탐닉적인 정치 세력과의 승산이 있을까 회의적인 한탄들이 곳곳에서 들리지만, 그건 역사의 끝에 가봐서야 알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회계약, 그린뉴딜(Green New Deal)이다. 새 판을 짜보자. 근대·탄소문명에서 생태‧생명문명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해보자.
나는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믿는다. 비록 베어지는 나무가 훨씬 많더라도, 그 생명력을, 나무의 자라남과 인간의 생명력을 믿는다. 이들이 빼앗긴 들을 되찾고 다음의 봄을 맞이해내리라 믿기에 주저앉지 않는다. 파란하늘 아래서 진정한 풍요로움과 함께하기를. 오늘을 뒤집고 내일로 가자.
* 2019.12.21. 남일성 교수의 <녹색프로젝트> 서평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