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에헤이

by 노마 장윤석

코로나 사태로 많은 것이 답답해진 느낌이다. 요새 푸념이 너무 잦아져 좀 그만둬야할까 싶었는데 이리 쓰는 것도 에헤이의 탈을 쓴 푸념이니 별 수 없지 싶다. 하기사 시국이 시국인데 어찌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슴에 돌덩이가 주저앉은 듯하다. 이럴 때면 나는 글을 쓴다. 글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기를 쓰기에는 홀로되는 것 같아 외롭고, 논문을 쓰기에는 너무 나약하며, 발제문을 쓰기에는 세미나가 다 취소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에세이를 쓸 품은 안 되니 에헤이를 쓰기로 했다. 에헤이는 윤석의 정의에 따르자면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에세이로 다소 격이 맞지 않아도, 두서가 실종되어도, 때 아닌 푸념만 가득해도 괜찮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제곱이 되니, 에헤이를 나누면 어떠려나. 이 물음에서 글문을 열어본다.


창문 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살며시 깨어나는 아침을 사랑한다. 날씨가 좋으면 수목원을 산책하고 뒷산에 오를 생각에 설렌다. 하지만 요새는 날씨가 화창하면 걱정이 피어난다. 화창한 날이 괜스레 원망스럽다. 행복해서 불행한 기분을 아는가. 맘 편히 따사로운 햇살을 즐길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친구 예하는 겁이 난다고 했었다. 나중에 만약 있을 아이가 엄마 이름 뜻이 뭐냐고 물을까봐 겁이 난다고. 예쁜 하늘이라고 말하면, 하늘이 왜 예쁜데? 하고 되물을까봐. 회색빛의 하늘이 왜 예쁜지 설명할 수 없을까봐.


사람들이 주말나들이를 나왔다. 할머니, 엄마, 아빠, 누나, 동생, 젖먹이 할 것 없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무척 어색하고 이상한데 어느새 기묘한 자연스러움이 자리 잡았다. 한 세대가 지나면 산소호흡기가 유행일까. 분명 십년 전만 하더라도 택도 없는 소리라고 웃었을 이 농담 같은 장면이 현실성의 공포를 머금었다.


작년 이맘 때 우울함이 극에 다달아 어찌할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무려 두 주가 미세먼지로 칠흑 같았다. 폰에는 매일 미세먼지 최악 경보가 울렸다. 그 속에서 개강을 해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1교시 수업으로 달려가는 괴상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내가 날씨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해바라기 같은 인간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은,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는 게 ‘최악’이라 칭해지는 시간 속에서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한다. 인지하기도 쉽지 않을 잃어버린 것들.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 이를테면, 햇살의 나른함, 마스크 없이 숨 쉴 자유, 아름다운 강기슭, 방사능 피폭과 기후재난 따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안정감, 내일이 있고 내년의 봄이 있고 나 다음의 사람들도 이전과 같은 사계절을 맞으리라는 믿음. 문명이 계속 되리라는 희망.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이루 말하자면 끝도 없을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세대 중 하나로서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사람다움을 잃어버릴까봐 겁난다.


마스크를 쓰고 길을 나서면 괴롭다. 마스크를 끼고 살아야 할 만큼 세상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숨이 가빠 답답하고 덩달아 마음도 답답하다. 우리는 한 해 중 며칠을 마스크를 쓴 채 살아야 하는 걸까. 청년으로서의 어려움과 막막함에 대해 털어놓을 때 배부른 고민이라는 말을 들어봤다. 이 풍요로운 시기에 태어나서 뭐가 걱정이냐고, GDP 3만불의 나라에서 태어나 배불리 살면 고마운 줄 알라고. 그놈의 배부른 소리. 그것이 누구의 배부름이고 얼마나 많은 착취와 상실을 대가로 얻어진 것인가. 수많은 생명과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갈아넣은 대가로 얻은 물질적 풍요가 나는 질린다. 지금 태어나면서부터 마스크를 써야하는 아이들에게는 어찌나 미안한가.


GDP에는 이런 것들이 담겨 있지 않다. 잘난 양반들 입에 그렇게 자주 오르내리는 경제지표에는 이것들이 담겨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도 수치화된 지표로 손쉽게 선과 사태와 진보를 측정하는데 길들여진지도 모른다.


GDP가 우리가 실제로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별 연관이 없는 것처럼, 코로나 사태도 확진자 수로 사회적 위험도를 판단할 수 없을뿐더러, 치사율로 개인과 사회의 불안을 나타낼 수 없다. 사실 나는 저번 주까지만 해도 코로나로 사람들이 유난 떤다 생각하고 애써 외면하려 했었다. 기후위기라는 심대한 위협이 우리를 시시각각 덮쳐오는데 고작 치사율 1% 언저리의 바이러스에 이렇게 사회가 들썩인다는 것이,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코로나에는 모두가 이렇게 관심가지고 주의한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유와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원망이 괜스레 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제는 코로나 ‘사태’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것이 전체의 문제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이것이 당연하다는 게 더 슬프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큰 위험이 전가되지만 말이다. 코로나위기와 기후위기는 분리될 수 없다. 코로나 사태는 중국 때문에 벌어진 외생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자리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 이제껏 한국사회를 구성해온 구조에 내재해있던 내생적인 사건이다. 자유무역과 생태계 파괴, 공장식 축산 등 기후위기와 같은 원인으로 코로나위기가 초래되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기후조건의 악화에 따라 감염병은 더욱 잦고 극심해질 것이며, 이 경우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대응력과 지역사회 회복력, 공공성과 민주주의가 감소하면서 악순환의 기로에 진입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모든 모임과 행사와 계획이 취소되고 사실상의 자가격리가 되어, 계속 사태를 모니터링하려 애쓰고 있는데 버겁고 암울한 이야기만 접하니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 총체적으로 파악한 정보와 데이터들이 어두운 정동과 결합되어 사회와 세상의 끝을 합리적으로 상상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이 불안과 공포는 무엇일까. 나는 겁에 질렸다. ‘일상’이라 불러오던 것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사회가 위기에 직면할 때 어떻게 변하는가를 매일 확인하면서 희망에서 절망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나는,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위기 앞에 주저앉을 것인가.


어두움에 잠식당할 때면 한 번의 일면식도 없었던 옛 사람들을 생각한다. 마침 3월 1일이다. 101년 전 3월 1일, 거리로 광장으로 뛰쳐나왔던 그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라는 그 참혹한 시기에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묻던 이상화의 시구도 이때의 물음이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움직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승산이 있고 없고를 재는 것이 역사 속에서 무의미했다는 것을 안다. 다만 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에 녹색당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꼭 한 주가 되었다. 그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은 같은데 마음이 동하지 않아 조금 힘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전 스웨덴(어쩌면 핀란드)에서 온 문자 하나가 나를 기묘하게 했다. “이곳이라면 사람에게, 환경에게 상처받지 않고 공부하실 수 있을 듯 해서.”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이랑의 물음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마냥 북유럽 복지국가의 탄탄한 제도들을 부러워하며, 이곳에서의 나와 삶을 비관하고 싶지 않다. 물론 부럽다. 특히 한국 사회가 가야할 길이 한참 멀었음을 사무치게 느낄 때마다, 그리고 저기의 사회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할 때마다 참 부럽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가야지 뭐 어쩌나.


한 달이 끝나고 새로운 달이 시작하는 마당인데, 마음가짐을 정갈히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요새 자주 생각하는 열역학 1법칙 이야기를 조금 해본다. 에너지보존법칙이라 일컫는 이거 참 평등한 법칙이다. 결국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없다는 거. 무한한 풍요도 없으며, 낭비되는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없다. 확고한 진보라 여겨지는 것도 살피면 다른 것을 잃어버리면서 나아간 것이고, 낭비되는 시간이라 괴로워 한 것도 당장의 조급함과 조금 거리두고 바라보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3월 한 달은 통으로 날아간 지금, 이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자고 말하고 싶다.


어떤 막막함과 답답함을 나누면 그때부터는 힘이 된다고 믿는다. 작은 믿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나는, 우리는 어찌나 나약한지. 5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바이러스에 이리 벌벌 떨고 있는 우리는.


결국 내 모든 푸념이든 글이든 다 ‘너’로 끝나지 싶다. ‘사람 또 사람’이라는 노랫말처럼, 종국에 우리가 다 사라지고 나서야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돈벼락도, 강남 집도, 서울대도, 대기업도, 공무원도, 부귀영화도 다 부질없는 것을. 때 아니게 본질에 천착하는 것은, 근본에 바탕두어 생각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되고 우리가 되는 법이니.


우울함과 공포, 위기가 마냥 우리와 사회를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기이기에 가능한 것들이 있다. 지금이 위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이리 애틋하게 여길 수 있었을까. 위기이기에 가능한 만남이고 우울과 막막함 덕에 가능한 애틋함이다. 이 만남이 우리를, 그리고 이 사회를 살리리라 믿는다.



P.S


한편 이 제안을 하는 것은, 어떤 옛사람들의 움직임을 동경하는 까닭입니다. 100년 전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고, 돌려읽으며 캄캄한 시대의 등불을 만들어가던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캄캄하기에 등불이 밝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뭔가 하다가도 이 회색빛의 도시에서 피어나는 온정이 참 고맙습니다.


그래도 주말인지라, 조금은 고즈넉한 이야기에 몸을 맡기고 싶어 시인 허수경의 문장들을 읽었습니다. 뉴스들을 볼 때면 사는 건 뭔가 싶지만서도, 이런 글들을 읽으면 그래도 울고 웃고 살고 하는 게 참 감사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들려드리지요.


다음 에헤이스트로는 열일하다가도 멍하니 허공을 보며 배시시 웃곤 하는 현지님을 지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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