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글로벌라이징 캐피털』을 읽고, 서평
(1) 배리 아이켄그린과 칼 폴라니
배리 아이켄그린의 『글로벌라이징 캐피털』초판은 1996년에 쓰여졌다. 개정판은 2008년 1월 출간되었으니, 이 책에는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담겨있지 않다. 책을 읽으며 그가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해서 무어라 진단하는지, 지금의 코로나 위기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지 궁금했다. 전 지구적 자본자유화·시장화가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지고 로컬이 뜨고 있으니까.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칼 폴라니는 2008년과 지금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하는 것이다. 아이켄그린의 책에서 힌트를 얻어간다.
한 명의 폴라니 연구자로서 나처럼 폴라니에게 짙게 영감을 받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근래 에드워드 파머 톰슨, 이반 일리치, 필립 맥마이클의 책을 읽었다. 톰슨은 폴라니의 계급론 – 이중적 운동, 이중적 계급론- 을 이어가 경제주의적 함몰에 빠지지 않고 역사·문화적 접근을 중시하는 계급론을 만들었고, 일리치는 폴라니의 시장을 역사에 예외적으로 본 시선을 이어가 근대를 낯설게 보는 자신의 작업을 확장했다. 맥마이클의 『거대한 역설(Development And Social Change)』은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다룬 1944년까지의 ‘시장이 사회를 덮치는 과정’의 세계사 이후를, 그 역사적 방법론을 충분히 활용해 이어 써가는 것만 같았다. 각각 계급론, 역사관, 개발학의 영역에서 그의 작업을 이어간 이들처럼, 아이켄그린은 금융사에서 폴라니를 이어가는 것만 같다.
“아이켄그린은 자본 흐름과 같은 국제 금융 체제의 역사적 변화를 단순히 경제적 요인에 정하지 않고 더욱 큰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파악하는 점에서 폴라니적 해석을 제시한다(16p).”고 옮긴이는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금융 체제가 진공 속에 존재하는 가공물이 아니라 정치 체제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분명히 강조한 면에서 아이켄그린은 폴라니의 (금융)사관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으로 아이켄그린이 폴라니를 언급하는 부분을 주목해본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대안 – 일부 국가는 자유 변동 환율로, 서유럽의 국가는 통화 동맹을 결성하는 - 은 50년도 전에 칼 폴라니가 제기했던 것을 정교히 한 것이다. 브레턴우즈 회의가 열렸던 1944년 폴라니는 19세기 동안 이루어진 시장의 제도적 확장이 궁극적으로 시장 체제의 안정성을 잠식하는 단체 및 로비 형태의 정치적 반발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반발이 발생한 자유방임 제도 가운데서 금본위제가 단연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국민 경제의 정책 결정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에게 개방됨으로써 금본위제라는 국제 통화 체제가 몰락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폴라니의 테제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맞는지를 묻는다. 20세기 후반 국제 통화의 역사는 폴라니의 동학이 다시 펼쳐지는 것으로 이해될 것인가? 즉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고정 환율제라는 형태로 다시금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서로 충돌하는 것인가? 또는 변동 환율제와 통화 통합으로 진행하는 최근의 경향은 자유와 안정성이 두 개의 영역에서 서로 화해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인가? (26p).”
그의 테제를 한마디로 하자면 “금본위제와 민주주의는 양립 가능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변동환율제로의 이행 혹은 유로존의 결성을 폴라니의 대안이라 이를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국제 통화의 역사에 대해서 그는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서로 충돌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와 안정성이 화해하는 길인가”하고 묻고 있다. 이는 쉬이 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칼 폴라니는 50년도 더 전에 쓴 글에서 정책 환경이 정치화됨에 따라 페그 환율의 작동이 어떻게 복잡해지는지를 기술했다. 폴라니는 보통 선거권의 확산과 결사체주의를 금본위제가 허용한 시장의 힘이라는 폭군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했다. 그는 정책 환경의 정치화가 금본위제 자체의 생존력을 무너뜨렸다고 보았다.
폴라니는 2차 세계 대전 후 자본 통제에 의해 환율 안정성과 다른 목표가 공존하는 체제가 구축되는 것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책 환경이 정치화되는 것에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놀라게 했을 것은 아마도 시장의 재기, 즉 시장의 힘이 얼마만큼 자본 통제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지, 그리고 통화를 안정시키려는 정부의 정책들을 어떻게 압도하는지였을 것이다.(329p)”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의 3부에서 상술했던 것 - “심지어 자본주의 영리 기업마저 시장 메커니즘의 무제한적 작동에서 피난처를 찾아야만 했다. 사실상 인간과 자연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생산 기업의 경우에서도 시장 체제의 위협은 실질적이고도 객관적인 것이었다. 시장 체제에서 화폐의 공급이 조직되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이 생산 기업들 또한 보호의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16장, 487p)” - 처럼 시장 혹은 경제적 자유화의 유토피아적 팽창·확대는 생산조직 또한 고통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금본위제 하에서 기업이고 노동자이고 할 것 없이 구렁텅이에 빠졌던 것이다.
폴라니는 시장의 허구적 유토피아로부터 벗어나는 사회로의 경향을 발견했던 같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전쟁을 겪고 난 후 시장의 무지막지한 침탈로부터 사회를 발견하고 지켜나가는 방향, 하지만 2008년의 아이켄그린은 시장의 재기를 마주하고 만다. 브레탄우즈 체제가 무너진 이후 21세기 초에 다다라 30%이상의 국가들이 변동환율제로, 유럽은 환율을 철폐함으로 마주했다. 아이켄그린은 유럽이 ‘폴라니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을까 묻는데, 그 도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계속 봐야 할 일이다.
(2) 지구화 프로젝트와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우리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유화라 부르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맥마이클의 표현에 따르자면)지구화 프로젝트’가 등장한 데에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잘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지만 국제금융제도는 이후 세계의 향방을 가르는 가장 큰 동학이었다. 개발사를 공부할 때도 IMF와 세계은행의 입장과, 그들의 ‘선의로 치장된’ 원조, 구조조정은 분명하게 눈여겨봐야 할 지점들이 가득하다.
아이켄그린은 브레탄우즈 체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 자본 통제는 정책에 대한 제약을 완화했고, 자본 통제는 정책 결정자들이 환율을 불안정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국내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24p).” 이는 각국의 개발 프로젝트, 특히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독자적인 정책에 따라 일국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의 각국의 정부는 사실상 독립성을 가져갈 수가 없었다. 독립성을 빼앗기고 굴러가는 지구화의 흐름에 내맡겨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본 이동성이 증대됨에 따라 정부가 독자적인 거시 경제 정책을 추구할 자유는 제한되었다(327p).”
한국의 경우를 보자. IMF이후 변동 환율제도로 이행한 후 재정정책이 힘을 쓰기 어려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선언했고, 이라크에 파병을 했고, 한미 FTA를 체결했다. 한국은 기업국가가 되어서 기업들의 패악질을 아무도 견제하지 않았다. 87년 혁명의 주역은 화이트칼라 자본가 계급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미국과 중국 열강들 사이에서 끼어서 우왕좌왕하고만 있다. IMF이후 국가의 축소, 민영화, 구조조정, 하청에 하청에 하청(7번까지 내려가는 하청도 있다한다)으로 내려가는 것을 무관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문재인 정부에 와서도 사드배치며 한미 방위비 협상이며, 난리에 난리다. 개방경제 후와 무관하다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지구화 프로젝트의 특징으로는 아무도 전 지구적인 자본뭉치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정부가 축소되고 정부지출이 줄어들며 공공기관의 민영화는 전 지구적인 흐름이었고, 이에 역행할 수 있는 힘과 정책이 변동환율제에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도전’은 이 벗어나야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시장의 힘을 말하는 것일까. “일단 국제 거래가 자유화되면 국내 시장을 단단히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326p).”
(3) 민주주의, 경제자유화
아이켄그린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페그 환율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다른 목표를 위해 환율 안정을 포기하려는 압력으로부터 정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25p)”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보호는 폴라니식 사회보호(반작용)이다. 민주주의의 부재가 이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자본 통제가 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백한 결론은, 환율 변동의 확대는 국제적 자본 이동의 증가가 낳은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328p)” 하지만 1913년 이전에는 높은 수준의 국제적 자본 이동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이는 민주주의의 부재 – 선거권의 제약, 노조의 약세, 노동자 정당의 부재 등 – 덕이었고, 자본 통제의 필요성을 완화했다.
한편, 그는 고정 환율에서 변동 환율로의 이행(즉, 페그 환율 방어의 실패)의 원인으로 자본 이동성만 짚는 것은 적절한 설명이 아니라 설명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 정도에 대한 제한이 절연의 근원으로서 자본 이동 정도에 대한 제한을 대체했었다(328p).” 즉 민주주의 부재가 자본 이동 제한을 대체한 역설이다. 그렇지만 자본 이동성을 제한하는 것도 결국 민주주의의 가능성 일테다.
하지만 아이켄그린이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 답을 내놓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주장을 찾기가 어렵다.
“이 책은 증가하는 자본 흐름과 국제 자본 이동성 추세는 전반적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8p).” 그는 2008년 이후의 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관찰할 뿐 브레이크를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은 해외에서의 차입과 대출을 포함하여 정부가 자의적으로 자신들의 금융 결정을 제한하려는 노력에 저항한다. 정보 기술의 발전이나 정치적 민주주의를 향한 세계적 추세는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제 자본 이동은 계속될 것이다(9p).” 그렇다면 경제자유화와 민주주의는 같은 방향인가?
가끔 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불가분인가 하는 무서운 상념에 빠지게 된다.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것인가. 역사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폴라니를 읽은 이래 분명하게 깨달은 진리이지만, 만약 이런 식의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4) 새로운 모색, 그린스완, 기후금융
금융이란 무엇인가. 화폐와 금융 교과서에 따르면 금융학자들이 연구하는 게 금융학 아닐까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도 모르겠다는 뜻이겠지. 그런데도 말은 해야 하니까. 금융의 기능은 무엇일까. 금융은 어떤 목적을 지니나. 금융은 어떻게 사회 안에 있어야 하나. 사회 안에서 금융이 묻어들어 있는 건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데 금융기관들은 하나같이도 ‘사회’라는 낱말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PRI라고 PSRI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금융은 엑셀러레이터 역할을 해온 게 분명하다. 고도화된 금융이 지닌 그림자는 IMF와 2008년으로 두드러지게, 그 외에 기타 등등의 금융사고로 자명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금융의 안정성도 이전보다 더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금융이 경제위기만 초래했는가?
기후위기의 원인인 무제한적 팽창과 성장은 금융의 공이다. 사실 지금도 금융제도의 평가 기준은 성장에 몰려있다. 어떤 금융제도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가가 성공한 금융제도의 척도다. 이 기준은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명확하게 깔고 가는 듯 하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코 앞까지 와있는 지금, 그 리스크가 경제 전반에 드리우며 금융계에서도 덜컥 겁을 내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경제와 생태(지구)의 구분은 사실상 무효해졌고,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모든 게 다 원인이겠지만, 고탄소 집약사회를, 외부비용을 산정하지 않은 기업들의 방종에 투자하고 높은 수익률을 거져 먹는 루트를 전면적으로 허용해준 금융시장에 있다. 금융시장은 모든 게 사고 팔렸지만, 인류의 미래도 사고 팔았다. 일단 팔고는 봤는데, 이처럼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급격한 채무독촉이 오자 금융시장도 당황했다. 2019년 금융시장에 어떤 격변이 일어났는가? 미래를 팔아제낀 자의 최후 아닌가?
우리는 금융의 본질에 대해서, 경제의 본질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위기를 마주한 자의 정직한 태도다. 지금까지 주류와 그 강단의 양반들은 뭐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전제에 숨은 물음을 회피해왔다. 이들은 강박증 환자다, 자폐증 환자이기도 하고.
기후위기가 눈앞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내뱉다 보니 이제는 어디쯤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너무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변화에 한해서는 시급하디 시급하다. 탄소배출량과 기후변화의 속도에 대해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효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가장 빠르고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루트가 어디인가. 이런 생각 말이다. 전 지구적으로도(요새 이 말도 많이 쓰게 된 것 같은데) 어떻게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이어진다. 돈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돈다.
* 작성 : 202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