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앙드레 고르스의 『에콜로지카』는 그의 죽음 전 글들을 엮은 책으로 다양한 출전에도, 그의 작업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겨냥한다는 점에서는 일관된다. 본 책에 수록된 글 중「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미 시작되었다. (2005)」를 중점적으로 요약하고 논평을 덧붙인 후 책 전반에서 얻어낸 단초를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해본다.
[1]「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미 시작되었다」요약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시급하게 제기되고 있고, 자본주의는 그 발전 자체로 말미암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는 내외적 한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미시거시경제차원에서) 분석한다.
(1) 전산화와 자동화로 “한 시대에 생산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다음 시기에는 생산성이 더욱 증가해야만 이윤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30p)”는 역설이 생겼다. 이러한 ‘생산성 경주’로 체계가 내적 한계에 다다르고 “생산자본의 생산적 축적이 끊임없이 퇴보(31p)”하고 있다는 사실이 연역된다. 기업의 생산적 투자는 늘어나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축적된 자본 전체의 가치 증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축적된 자본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금융자본의 형태를 띠게 된다. 오로지 다양한 형태의 돈만을 사고팔면서 돈 버는 기술을 끊임없이 세련화하는 금융 산업이 번창한다(31p).”
하지만 금융자본의 가치는 순전히 허구적인데, 이는 금융시장이 ‘앞날에 대한 예견’을 자본화하는 구조를 지닌 까닭이다. 은행의 재촉으로 허구적 주식자본이 증가하고, 이렇게 “이윤 및 성장 기대치가 갈수록 자본화함에 따라 점점 빚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은행이 자꾸 허구적 이윤을 재순환시킴에 따라 유동성 경제를 살찌운다(32p).” 이 ‘부채에 기초한 경제성장’이 세계 성장에서 주된 동력이 되고 있고 “실물경제는 금융 산업이 먹여 살리는 투기거품에 딸린 부속물로 전락했다(32p).” 그러다가 부풀어 오른 거품이 터지면 신용체계는 붕괴하고 실물경제도 따라서 극심한 불황의 위협에 빠진다.
이 불황과 붕괴의 위협은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고, “자본주의는 오로지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허구적 토대 위에서만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33p).”
“‘생태적 구조 혁신’은 이 체계의 위기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예컨대 150년 전부터 성장 일변도로 달려온 경제논리 및 방식들과 철저하게 결별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후재앙을 피할 수 없다(33p).” 그러므로 “탈성장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34p).” 결국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런 방식으로든 저런 방식으로든, 문명적 방식으로든 야만적 방식으로든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34p).” 문제는 “이러한 이탈이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그리고 어떤 속도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34p).”
(2)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 양쪽 모두에 힘을 행사해왔다.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노동자를 부속품으로 만들었고, 소비자들의 취향과 욕망, 필요를 조종하는 방식을 확보했다. 그런데 정보혁명으로 말미암아 이 힘에 균형이 가기 시작한다. 상품은 시장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되고, 효용(사용가치)보다는 ‘비물질적 품질’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 덕에 기업은 독점에 상응하는 지위, 새로움, 희소성, 배타성에서 기인하는 지대(rente)를 확보할 가능성을 가진다. 기술혁신은 이의 수단이며 경제적 관점에서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지대도 성격상 이윤과 다르고, 가치의 총합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이 체제 내에서는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율성과 반대될 수밖에 없다(39p).” 그러므로 ‘더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한다’는 추세로 힘을 행사해 온 현대 문명과 확실히 결별하여야 한다.
“‘필요에 대한 독재’는 서서히 힘을 잃는다.(40p)” 비물질적 콘텐츠가 구현하는 대상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게 되자 사유화와 독점은 설 자리를 잃고 교환가치를 상실하고 무상의 공유재로서 공공영역으로 떨어져버린다. “그것은 자체의 본성 때문에 사유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상품이 될 수도 없다(41p).” 지식경제는 이처럼 공동의 자산이 될 사명을 띤 부를 토대로 삼기에 무상성의 영역이 막을 수 없을 만큼 널리 확장된다.
이러한 ‘생산수단의 자체생산’은 생산의 주요한 힘과 지대에서 취하는 이익이 (이전과는 반대로) 공동영역으로 떨어지고 무상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공급의 독점이 차츰 불가능해지고, 소비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이 느슨해지고 상품 공급에서 소비가 해방되는 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균열”의 가능성을 말해준다. “‘주인이 있는 소프트웨어’와 ‘자유 소프트웨어’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은(44p),” 확장되어 “한 사회가 존재하는 데에 선결조건인 땅, 씨앗, 유전자, 문화재, 공동의 지식과 기능들의 상품화에 대항한 싸움으로 연장된다.”
이 이탈은 자본의 소비에 대한 장악력과 생산수단의 독점에서 우리가 해방되고, 생산주체와 소비주체의 단일성이 회복되어, 우리의 필요나 그 충족 양식을 규정하는 데 필요한 자율성을 회복한다는 뜻을 가진다. “기계가 우리에게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정해주었(45p)”던 시기는 끝나고 (이반 일리치의 요청처럼) 공생공락의 도구로 모든 이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시대가, (페카 히마넨의 정의처럼) “우정, 사랑, 자유로운 협동, 개인적 창의성, 이런 것의 기쁨을 최우선에 놓는 삶의 방식”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자본주의 경제가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 재주, 창의성이 존재한다는 점(46p)”과 “일자리가 이젠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방향의 발전을 뒷받침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이러한 급진적 변화가 실현되었으면 하고 바랄 수 있는 시점이다.
[2] 논평
2008년 금융위기를 지나 2020년 코로나 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고르스의 이 글은 가히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글이 2005년에 쓰여졌으니, 3년 뒤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2008년 금융위기를 구조적 진단으로 전망해냈다는 점에서는 깊이 인상적이다. 자본주의가 마주한 내외적 한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짚어내기에 가능한 사유의 결정이리라.
자본의 비중이 금융에 몰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금융시장의 활성화는 실물경제(생산)의 한계로 인한 것인가? 고르스는 “금융자본의 ‘가치’는 순전히 허구적이다(31p).”라고 썼다. 투기가 판치고, 위기 때면 더욱 극성을 부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중앙에 사는 우리이기에 금융의 본질적 지점에 대한 생각이 더욱 긴요하다.
부동산가격과 주식가격이 계속 오르는 까닭은 뭘까.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묻지는 않는다. 투기꾼들은 경험적 관찰에만 초점을 둔다. 그들은 얼마나 어떻게 숫자가 오르고 내리는지만 관심 있을 뿐이니까. ‘허구’라는 낱말에 대해서 곱씹어볼 때 앞에서 꺼낸 물음들에 대한 답들을 찾아나갈 수 있다. 이를테면 칼 폴라니는 화폐를 상품화하는 게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성격이라 진단하며 화폐를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허구 상품’이라 했다. 실물 경제보다 가상(금융) 경제가 더 커진 데에는 전산화와 자동화(다른 말로는 기술발전과 자본축적)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점점 팔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팔리는 것으로 치환되어 매판대에 놓이는 데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미래, 위험, 기대를 들 수 있다. 파생금융상품의 종류와 거래량은 점차 늘어난다. 이는 고르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드러난다.
“증권시장은 미래의 성장, 기업의 미래 이윤, 부동산 가격의 향후 상승, 구조조정, 합병, 집중 등에서 나올 수 있는 이득을 자본화한다. 주식시세는 자본과 그 자본의 기대 이윤으로 부풀어 오르고, 은행은 각 가정에 주식을 사고 부동산에 투자하라며 재촉한다. 이리하여 주식시장은 점점 더 큰 붐을 일으키고, 허구적 주식자본들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액수의 은행대출을 받게 된다. (중략) 이윤 및 성장 기대치가 갈수록 자본화함에 따라 점점 빚이 늘어나게 된다. (중략) 실물경제는 금융 산업이 먹여 살리는 투기거품에 딸린 부속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부풀어 오른 거품은 터지고,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하며, 전 세계적 신용체계는 붕괴 위험에 빠진다(32p).”
결국 근본적으로 금융이 뭐냐는 이야기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통해 노동의 몰락을 짚어낸 것처럼 그는 본 글에서 금융 자본주의의 허구적 성격을 짚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사유에서 낙관적인 어조로 주장되는 ‘이탈’과 ‘전환’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그가 언급한 정보화 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 그리고 체제의 무너짐은 15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이루어졌는가. 대부분의 것들이 오픈소스로 세상에 풀렸고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지식을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의 주가만 올랐지 않나. 그렇다고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를 공생공락의 도구라, 열린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지난 15년은 과연 자율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전환시켰는가. 고르스가 짚어냈던 자율성을 훼손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횡포는 무너지기는커녕 양상만 바뀌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참으로 일관되게 인간을 소외시킨다.
무엇보다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례없는 폭으로 극심해졌을 뿐이다. 고르스가 그 시대에 파악했던 자본주의는 무너졌을지 몰라도 다른 자본주의(그러나 본질은 일관된)가 아직도 사람 머리 꼭대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하나를 놓쳤다. 자본주의는 진화한다.
그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아쉬워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의 대안은 유효함을 넘어 절실하다. 지금의 위기를 헤쳐나갈 동아줄이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이미 시작되었다」에서 자본주의의 한계 직면과 지속 불가능성을 확인한 고르스는 「파괴적 성장과 생산적 탈성장」, 「세계적 위기, 탈성장,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가치 없는 부, 부 없는 가치」에서 ‘탈성장’과 ‘가치 없는 부’를 제창하며 ‘지속 가능성’의 고민을 올린다.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서 작금의 ‘생태적 구조 혁신’이 체계의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자. 기후위기는 좋으나 싫으나 우리 삶 전반에 폭풍 같은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특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위기가 기후위기의 일환이자 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는 이미 폭풍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말처럼 “탈성장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탈성장 담론은 로마 클럽에서 1972년 『성장의 한계』를 퍼낼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간 주류 경제학계의 비난과 폭압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 바 있다. 개발 프로젝트의 망령이 아직도 떠돌고 있으니 감히 성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야기겠다. 하지만 2008년, 그리고 2020년 현재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지구 한계의 경계’를 뼈저리게 마주했다. 이는 탈성장이 아닌 다른 길은 모조리 무너져버렸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의 지난한 성장 논쟁들은 세계 경제가 마비된 가운데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IPCC의 장기 전망에 비추어 봐도 더 이상 세계 경제의 외연 확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에 가깝다. 논쟁은 끝났다. 이제는 어떤 탈성장이냐의 논의가 필요할 때이다.
무지막지한 GDP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여러 경제 지표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직전까지 소외된 인간이 다시 자율성을 되찾는 일이다. 이는 고르스가 말하는 것처럼 ‘검소한 풍요’를 통해서 가능하다. 철학자 신승철은 이를 ‘더불어 가난’, 철학자 김상봉은 이를 ‘서로주체성’이라 불렀다. 자본주의 하에서 지난하게 우리를 괴롭히던 마음의 가난과 상상의 빈곤에서 벗어나 한계와 전환이라는 낱말 아래 새로운 세상을 피워가보자. 성장, 개발, ‘자본’, ‘남성’, 근대 같은 몹쓸 것들에서 탈(脫)하여 지속가능한 지평에서 서로에게 무해한 생명으로 살아가보자. 지금, 이성적인 예측과 전망과 경향이 암담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괜찮다. 눈 한 번 깜빡이면 과거이니까. 일리치의 말처럼 미래에 대해서는 오직 희망뿐이다.
[3] 앙드레 고르스와 사르트르
앙드레 고르스와 생전 인터뷰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사상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장 폴 사르트르와 이반 일리치를 꼽은 바 있다. 아래에서는 앙드레 고르스와 이 두 사상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실존주의와 생태주의는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질문이 이 탐색으로부터 가능하다. “『존재와 무』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사르트르가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관해 말한 것이 내 체험과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10p).”
실존주의의 문제의식은 ‘주체’에 대한 것이고 주체라는 것의 주어는 늘 개인이 차지한다는 데에서 개인주의의 출발점은 가진다. 하지만 이는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사르트르가 말년에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교차점을 짚어내려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주의는 개인에 한정되고서는 죽어버린다. 그래서 넘어서야 한다. “타자는 악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통해 정립한 주체의 지평에서 단단히 딛고 일어선 개인은 자라나 사회로 나가고 윤리를 찾아가야 한다.
「인생과 순리에는 목적이라는 것이 없다. 그것은 분명히 자유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 사고의 기반이 된다. 유물론의 토대는 목적인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목적이 없으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과학성의 ‘목적’과 별개로 삶에서의 ‘목적’은 남다른 지위를 가진다. 목적지를 찍지 않고서는 출발하기조차 할 수 없는, 설령 출발했더라도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결국 방황에 방황을 곱하여 좌초되고 마는 그런 인간. 이 인간 실존의 근본됨을 바탕 앞에 처절하게 내세워졌다. 내가 철학을 처음 시작한 그 질문에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내팽겨쳐졌다고 써도 될 것이다. 그럼 이제 나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다시 쌓아가야 하는가. 삶을 지속할 명분과 목적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부질없는 물음이다. 하지만 그 부질없음, 덧없음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 앞에 휘몰아치는 회의와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사실 싸우고픈 생각은 없다. 어두운 것들은 잘 토닥토닥해서 공생하는 것이다. 무찔러야 하는 악이 아니라. 결국 선악의 범주로 돌아왔다. 윤리. 그래 윤리다. 가장 바탕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은 또 윤리다. 실존은 윤리로 이어진다. 실존은 윤리를 부여하면서 이어진다. 실존은 윤리를 부여함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실존은 윤리와 마주함에서 존재한다.(3.21 메모)」
실존은 윤리와 마주함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주체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와 같은 것”이다. “이 문제는 윤리학과 정치학의 토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마다의 개성을 자유롭게 활짝 펼치는 것을 공통 목적으로 삼아 필연적으로 지배의 모든 형태와 모든 수단, 즉 인간으로 하여금 주체로서 행동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을 문제 삼기 때문이지요(12p).”
이것이 실존주의가 사회주의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생태주의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앙드레 고르는 그 점에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초석삼아 “이전의 모든 굴레들을 벗어 던지고” 무의미한 삶의 부조리라는 자명한 생의 진리를 깨달은 “세상에 기투한” 개인이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꿀지를, 가야할 곳을 잃어버린 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생태사회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개인은, 실존은 시작일 뿐이다. 삶의 의미를 어디로 비끌어 멜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것 하나에서만큼은 무궁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실존주의자는, 인간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실존적 의미로) ‘반항’함으로서 생태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르스가 마르크스와 사르트르를 같이 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반드시 정치생태학에 이르게 됩니다(14p).” 그리고 그렇기에 “인간 주체의 해방이라는 윤리적 요청에 자본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비판도 내포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5p).” “따라서 지구를 함부로 파헤치는 행위, 생명의 자연적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가 특정한 생산양식의 결과라고 이해할 때, 비로소 생태학은 비판적‧윤리적 책임을 제대로 갖추게 됩니다.(15p)”
* 2020.4.2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