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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탈(脫)] 상상의 빈곤으로부터

by 노마 장윤석

[그 어떤 탈(脫)] 상상의 빈곤으로부터


어느덧 중천에 다다른 올해가 가는 동안 나는 세 단어를 붙들고 살았다.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 이 낱말들과 더불어 말하고 더불어 글 쓰고 더불어 세미나하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느닷없이 나타난 벽에 부딪혔다. 잔뜩 혼미해 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이 벽들은 대개 이렇게 생겨먹었다. “기후위기를 왜 막아야 해? 어차피 망할 건데 막 쓰다 죽으면 좀 어때.”, “그래서? 팬티 벗고 조선 시대로 돌아가자는 거야?”, “뭘 어떻게 하려고? 해봤자지.”

이런 벽들 앞에 서 보니 내 상상력이라는 게 참으로 빈곤했다. 그건 아니라고. 이런 길도 있지 않냐고. 이리로 가자고. 단단한 눈빛과 목소리로 일갈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은데 기대도 확신도 길도 나에게 없었다. 그 어떤.. 그 어떤.. 그.. 하고서 말을 잇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세미나에서 돌아오는 길은 후련하면서도 무거운 마음이라 한동안 착잡해 하곤 했다.


탓도 해봤다. 하기야 하기사 이제껏 지금껏 보고 들어온 게 이 모양 이 꼴인데 없는 밑천에서 뭔가 꺼내려 해봤자 뭐 있겠나. 가뭄난 우물 안으로 애써 두레박을 내려봤자 물이 긷어질 리가 없다. 자라오면서 믿고 따를 어른과 선생이 참 없었다.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공간도 몇 없었다. 정작 있어야 할 것들은 온데간데없는데 있는 거라고는 학벌, 대기업, 돈 같은 것들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다. 못 볼 꼴도 많이 봤다. 현실이란 이름으로 모순들이 무마되었고, 정의와 윤리 같은 가치들은 싼값에 팔려 다녔으며, 뭘 바꾸겠다는 이들은 사기꾼이거나 변절하기 일쑤였다.


세상에는 분명 깨부수어야 하는 게 있고 까내려야 하는 것이 있고 끌어내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무너진 세상을, 빈 주류의 자리를 대체할 언어와 논리와 그림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 비판이 있으면 대안이 있고, 저항이 시작되면 형성이 남으며, 파괴된 후에는 창조가 필요한 법이다. 부수려면 망치가 필요하지만 만듦에서는 설계도가 필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풍요로운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다행히도 아마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날들이 꽤 된다. 섣부른 비관과 조잡한 대안, 무책임한 방관을 경멸한다. 막막한 오늘을 뒤엎을 방법과 힘이 내 손아귀에 없다면, 상상력을 아무리 쥐어짜도 식상한 것들만 가득하다면, 뭐 구태여 바꾸지도 못할 거 애쓰지도 말자던가 하고 비관의 늪으로 빠져들 거면 찬물에 세수나 한 번 한 뒤에 수목원 한 바퀴 뛰고 오는 게 낫다. 역사는 길었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공간에서 있었던 말, 이야기, 시도, 투쟁들은 많았다. 지금, 여기에 희망이 안 보인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뒤져서 데려오면 될 것 아닌가.


혁명 한 번 못해보고 미천한 자본이 빚어낸 위기에 저무는 비루한 삶 살기는 싫다. 오월 한 달, 내 안의 상상의 빈곤 혹은 빈곤한 상상으로부터 탈(脫)해 볼란다.


* 2020.05.04. 월(月) , 일간 에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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