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25 끄적임

by 노마 장윤석

2022.2.25.

오늘은 익산의 원광대학교 앞 호수에서 적는다. 간밤에 잠을 푹 잤다. 지용이가 이사한 새 집에서 하늘에 뚫린 창을 보면서 잠들었는데, 올해 들어 이리 개운한 잠을 자본 것은 거진 처음이다. 일본의 오하라의 료칸에서 잤을 때도 참 편안했는데. 마감은 늘 있다. 마음이 온전히 편할 수는 없다. 소중했던 관계들이 버겁고만 관계들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는 내 탓 밖에 할 도리가 없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남 탓만큼 하찮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실은 타인을 피해서 도망가고 싶은 나의 관성일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떠나있어야 하는 상태이자 존재라는 것을 겹겹이 느낀다. 자기를 정확히 알고 싶지 않아 늘 모른 척을 해왔지 싶다. 그렇게 외면하면 마음이 불편한데 견딜 수 있으니까. 찢어지는 마음을 피해서 달아나서 둘러보다 말다가 하면서 온 것이 여기라면, 나의 마음은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 나는 근래 명확하게 근황을 설명하지 못했다. 명확한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그런 해체 지향적인 관점이 자리 잡은 것도 있지만, 내가 나를 설명하고 나의 시간들을 마주할 자세가 흐트러졌던 것이 큰 것 같다. 익산에는 법명을 받으러 왔다. 새로 나에게 짓는 이름, 그것도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을 담고 있을 분에게 부탁하여 짓는 이름이겠다. 시간은 흘러 흘러 느리게도 간다 싶다. 원기 109년이라고 하니 원불교가 이 땅에 나온 지 100년이 더 넘게 흘렀다. 나는 작년 꽃피는 학교의 대화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난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떨리고 귀했던 모임이었다. 아직 후기를 쓰지 못했는데, 꼭 남기고 싶어졌다. 방금 마침 꽃피는 학교 소희, 진 샘에게 문자가 왔다. 그때의 이야기들로 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한 학부모들이 있으시다고 한다. 이토록 혼란스럽고 이토록 못나고 이토록 부유하는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니.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구나 싶다. 고작 십 년 혹은 십몇 년의 시간들로 가르치고 배우는 위치가 엇갈린다니, 신비롭다. 다시 돌아와, 어제 저녁에는 정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버거운 마음들이 물밀려오듯이 찾아왔다.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들이 참으로 덧없구나 싶은 마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녹색당 총회를 준비하고, 연구소를 꾸려가고, 나의 일상을 오롯이 채우는 이 일상이 버거워졌다. 아 여기까지인가보다, 싶은 순간들이 계속 한 주 새 일어났다. 사람을 어려워하는 나는, 그 느낌이 관계로부터 온다. 나의 모든 판단은 관계로부터 온다. 연결되어 있는 그것에 어떤 신호가 주어지고, 내가 몸이 경직되고 말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려움이다. 짧은 인생이지만 늘 떠나오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착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또 그러기도 싫고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힘든 것 좋은 것이 모두 같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힘든 것에 너무 시선을 깊이 보내지는 않는다. 정말 있는 그대로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나에게 새롭고 아름답고 평온한 익산의 이 교정이, 박사 논문으로 세상 고생을 하고 있는 지용이에게는 외롭고 힘든 공간이기도 한 것처럼. 내가 탈출하고 싶은 나의 집이 희연이에게는 참 고즈넉하고 좋은 공간인 것처럼. 그런 역설들은 생 곳곳에 숨겨져 있다. 답은 또 마음공부 밖에 없구나 싶게 되는 것이다. 너털웃음을 짓게 된다. 내가 쌓아온, 내가 얽혀온 나의 과거 혹은 억 겹의 인연들과 나는 어떤 시간을 또 이어가게 될까.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대의 윤석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저마다의 관계망 속에서 흘러간다. 그것이 살떨리는 긴장도 주지만, 참으로 묘하고 웃긴 재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되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어야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세상도, 우주도. 내 그릇에 달린 일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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