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평화롭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하늘도 맑다. 내가 마지막으로 서울의 하늘을 봤을 때는 아주 붉었다. 빛과 폭음으로 뒤덮인 최악의 석양을 내 눈으로 봤다. 하루가 멀다하고 재난이 찾아오는 마당에 전쟁까지 난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막상 나를 죽일 수 있는 것들이, 그것도 인간이 만든 끔찍한 것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니 이보다 지옥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해왔던 것들은 모두 부질없었던 거였다.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넘어버린 시대, 그간 역성을 내왔던 것들은 실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누리는 장밋빛 휴가 같은 거였나. 미친놈처럼 위기요 하던 내가 무안해지는 위기 앞에 다다르니 남은거라곤 다리뿐이다. 살기 위해 달리는, 남의 다리 같은 내 두 다리 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어땠을까. 내 나이 때 전쟁을 겪었던 할머니의 마음이 늘 궁금했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게 정말 호상이었지 싶다. 아무래도 생에 전쟁을 두 번이나 겪는 짓은 못할 짓이다. 그냥 눈을 감는 게 누가 뭐래도 나은 것 같다.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전쟁이 끝나면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가 그랬듯이 다 잊고 여생을 살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건 내 주위 몇 명만이 아니라 이 행성 자체이니까.
처음에 기후가 어쩌고 지구가 어쩌고 하면 사람들이 귀엽게 쳐다봤다. 아주 배가 불러 터져서 가본 적도 없는 북극곰과 펭귄을 가여워하는 착한 애들을 안쓰럽게 슥 보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친척 하나는 새천년이 밝아올 때 너같은 애들 많이 봤다고 비웃었다. 세상 망한다는 소리 지겹게 들었는데 그렇게 남 탓 세상 탓 하는 애들 잘 되는 꼴은 본 적이 없단다. 효도나 하고 돈이나 잘 벌라고 말을 덧붙이고 산낙지를 입에 넣었다. 웃겼다. 내가 미쳤다고 뭘 믿으라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나.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미친 놈 취급을 받고 있구나. 아마 세상엔 나보다 삼촌 같은 새끼가 더 많겠다. 이 회의스러움은 어느날 갑자기 자란 게 아니다.
몇 년 정도 지나니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인정은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여름철마다 폭염이며 폭우가 신기록을 세우고 사람들을 죽여나가면 다같이 입을 모았다. 어찌나 상상력이 풍부한지. 사람이 방비를 안 해서 죽은 일에도 기후 환경을 갖다붙였다. 그 친척 놈 말이 떠올랐다. 세상 탓 남 탓 하는 놈 잘 된 거 본 적이 없다는데.
사람 죽어가는 게 더 화가 나지 않고 대수로워질 무렵 그 즈음 나는 투사 노릇을 그만두었다. 나도 세상 탓 하는 게 지겨워졌다. 내가 친구처럼 지냈던 스승은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너무 지혜로운 탓이다. 사람이 원최 밝고 맑은 사람인데 말년에는 안색이 어두워 놀랐던 기억이 있다. 갑작스러운 그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꺼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 접어두고 먼 발치로 떠나고 싶어 했단다. 이미 넘어버린 선 자기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이 와중에도 잘 될거라고 말하기에는 자기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그것도 순수했다. 그가 조금은 비열했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돈도 좀 벌고, 밖에서 이름값 좀 높이고, 자기 잘난 맛에도 살아보고 그랬으면 어땠을까. 이제와서 다 부질 없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이 꼴 안보고 가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소식을 알 길이 없는 친구들을 생각했다. 너희들은 맘이 좀 어때. 후회해? 후회하냐고. 하기사 후회할 것도 없지. 이 정도면 할 건 다 해봤잖아? 돈이나 좀 모아놓을 걸. 그래봤자 휴지조각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절로 눈이 떠진다. 경직된 어깨 근육들이 딱딱한 바닥과 맞부딪혀서 일어나게 된다. 낡은 대청마루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 보면서 졸던 때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