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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망가진 피아노에서도 음은 난다. 줄이 끊어지지 않은 한 조금 싱크가 맞지 않더라도 음은 난다.

살아있구나

싶었다. 몇 살이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놓기에는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녹록치 않았다. 어긋난 음이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좋게 들렸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고 음의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끝났다.


걸었다.

아무 생각이 일지 않을 때까지 걸을 심산이었다.

고향에 다다랐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이었다. 안개가 살짝 내려앉았고 날이 걷히면 청명함이 앞섰다.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고 사람 숨쉬기 딱 좋은 공기, 바람이라도 한 번 불면 괜스레 기분이 시원해지는 그런 곳. 그런 자연의 환대가 그곳의 찻잎을 유명케 했다.

낯설지만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반겼다.

조용히 목례를 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았는데 그마저도 짧게 느껴졌다.

지친 몸을 뉘였더니 해가 지는 게 보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공간에 정을 붙이고 살까. 사람들을 만나면 늙은이 마냥 고향이 어디냐고 묻고 다녔다. 우리 할머니나 할 법한 질문을.. 말세에 땅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 잠기거나, 불모지가 되거나, 전쟁터가 되거나. 지구상에 더 발붙일 데가 있을까 싶다. 고향이 어디고 말하는 이들의 낯빛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결국 모두 실향민이 되고 말 터인가. 최후의 한 명까지 실향민이 되고마면 이 비극이 끝날까. 수많은 사람들이 빼앗겨온 고향들을 우리 시대 사람들이라고 부지할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당장 내 할머니가 시집올 적에 전쟁을 겪었는데.


고산 지대인 이 곳은 아직 여파가 밀려오지 않았다. 바닷가 아래쪽은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잠겼고, 중부 지방은 밀려온 난민들로 아비규환이 되었지만 산 까지는 아직 사람들이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죽어나가도 사람들과 살고 싶어하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아이 하나가 물수건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있는 방을 원래 쓰던 아이인가 보다. 잘 못 먹었는지 병약해 보이는데 누가 누구를 돌본다는 건지. 나는 나를 여행자라고 생각하지만 이이에게는 난민 중 하나로 보이겠지 싶다. 감기를 옮기기 싫어 나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편도가 부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비몽사몽 중얼거릴 뿐이었다. 고열이 있어 어지럽다. 아프니까 그간 겪었던 일들이 실감이 난다. 두고온 어항의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집과 함께 전소되었을 것이다. 묻어줄 필요 없이 화장장이구나. 고개를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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