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
<바닥에서>를 보고
2023.12.3.
노수 친구
생명에는 여러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살리지 못하기에 애도하는 마음이 있다. 하물며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도 덜컥 하고 느껴진다. 당신에게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가. 바닥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는가.
바닥에서는 비질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공장식 수산의 그림자를 언급하고, 기후위기에 영향을 받는 해양 생태계에 대한 보고가 이어지지만, 이것은 분명하게 비질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비질에 대해서는 말을 얹기가 어렵다. 비질의 목적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누군가는 살리려고, 누군가는 돌보려고, 누군가는 애도하혀고, 누군가는 울기 위해서, 누군가는 죽기 위해서. 모든 동물을 구조할 수는 없다. 당장 끔찍한 구조를 끊어낼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바뀐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비질을 꾸리고 모으고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어떤 생명과 굳이 인연을 맺고 조각난 마음으로 돌아온다. 한 출연자는 다녀오면 늘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넋을 잃으려 비질로 향하는 것인가.
나는 그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다. 조심스럽지만, 나는 단 하루 비질에 다녀온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다. 다큐에 나오는 노량진역과 노량진수산시장을 잇는 육교를 걸었던 일, 꺼져가는 생명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만 걸어야 하는 못난 발걸음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았는지. 스스로의, 우리들의 존립양식이 얼마나 추한지 깨닫는 일은 너무 아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용기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나는 지금도 물살이와 살아간다. 십년도 넘게 매달 어항 물을 갈았다. 물살이와 살다보면 이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혹은 얼마나 약삭빠른지, 얼마나 게으른지 같은 TMI를 알게 된다. 사람을 알아보고, 서로 자주 싸우고 (때로는 화해 혹은 휴전을 맺고), 밥 안 먹으면 성질 나빠진다. 안시 L-144인 노수랑 7년 째 살다보니 너가 죽었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기가 어렵다. 죽은 물살이를 만지는 촉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 그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무심코 밥상에 올리는 생선구이가 이름이 있을 생명이라는 사실을 감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극에 해답을 건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비극과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비극을 제거한다는 목적은 허망하고, 다만 비극을 풀어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이 다큐멘터리가 전하고자 하는 말의 온도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생명은 모두 죽는다. 그렇기에 그 유한한 생을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보내는가가 귀하다 여긴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바닥을 향해 바다로 걸음을 옮기는 이들에 못생긴 경의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