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난 왜 이 모양이지..
계획오류(planing fallacy) : 사람들이 어떤 일을 마치는데 걸리는 시간을 예측할 때 비현실적인 최적상황을 가정하는 경향 탓에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야 마는 오류를 말한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초등학교 방학숙제부터 인생을 살아오면서 치른 수많은 시험계획까지 단 한 번도 원최 설정했던 계획을 완수!해 본 적이 없다. 글을 쓰면서 또 한 번 부끄러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세상에, 정말 한 번도 없다니!" 매년 설정하는 신년계획, 독서계획, 알바계획 모두 해낸 적이 없다. 당장 브런치 계획만 해도 여행기 작업을 세 번은 끝내고도 남았어야 했다..
왜 그럴까. 왜 나는 계획을 이루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매번 똑같다. 의지에 불탈 때 계획을 만들고, 처음 하루 이틀은 확 타오르다가 삼사일 째는 '그래도 해야지' 하며 시큰둥하게 하다가 어느 순간 보면 계획이 있었는지 조차 잊는다. (나중에 다이어리를 뒤지다가, 혹은 책상 구석탱이 종이쪼가리를 펴다가 깨달으니 말이다.) 이 무수한(?) 경험을 통해 경험적으로 깨달아 버린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세상에는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이 차고 넘친다는 것. 둘째, 내가 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 셋째, 나는 게을러터졌다는 것..(또륵..ㅠ)
그런데 나만 그런 모양은 아닌가 보다. 모두가 그런 모양이다. 생각하면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도 그 태곳적부터 사람들이 그러니까 만들어진 거겠지. 행동경제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넛지(리처드 탈리만)'를 읽다가 더 그럴싸한 개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 사람들은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변수를 설정하지 않아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거론된다. 오페라 하우스 시공 당시 호주 정부는 공사기간 6년, 공사비 700만 달러의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공사기간 16년, 공사비는 12,000만 달러가 들었다. 정부조차도 계획오류를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오류는 우리 주위에서 쉽사리 관찰된다. 열이면 아홉이 과제를 제때 못해오고, 지각을 반복한다. 계획보다 늦어질 걸 예상한다 하더라도 늦는 게 우리다. 이건 '호프스태터의 법칙'이라 불린다. 우리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고 그에 대한 시간이나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
이제 '자존감' 이야기를 해볼까. 근래 인상 깊게 읽은 글 하나를 소개한다. 브런치 김슬 작가의 '게으른 완벽주의자에게'. 서두에 웹툰 <유미의 세포들>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머릿속에는 자기비하 세포와 자존심 세포가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운단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현실이 그런 걸. 정말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것이다.(한편, 필자는 실제로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곤 한다. 인지부조화..)
https://brunch.co.kr/@bobasul/35
내가 바로 그 게으른 완벽주의자다. 나의 '뇌피랜드'에도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두 세포가 산다. 강한 자기확신 세포와 세상 나태 게으름 세포. 이 자기확신 세포는 내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충족해야 자존심이 산다. 하지만 웬걸, 게으름 세포는 하고 싶은 게 많다. 한 시간 책상에 앉으면 삼십 분은 뒹굴어달라고 조른다. (망할!) 그래서 계획은 완수하지 못하고, 자기확신 세포는 쭈그리고 앉아버린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자기에게 기대가 컸던 나는 '왜 나는 이모양이지..'를 연발하며 급격한 자존감 하향 모드에 돌입한다. 피곤, 지침, 부족한 집중력으로 말미암아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면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나는 왜 이모양이지, 개쓰레기네, 온갖 자기 비하를 일삼는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어! 하고 다시 일어나면 그제서야 좀 사람 사는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또 장대한 계획을 세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수한 반복이다. 자존감 하락의 늪에 빠지면 약도 없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구석이 있다. 다음은 '게으른 완벽주의자'글에 달린 댓글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에 공감을 표했다. 모두 계획오류를 빈번히 저지르는 동지(?)인 것이다ㅋㅋㅋ
어쩌면 우리는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오력을 그리 중시하는 사회 풍조 탓에 말이다. 베스트셀러에 흔히 오르는 자기계발서들은 시간관리의 중요성을 변주해 설파할 뿐이다. 오죽하면 '시테크(시간+재테크)'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부지런'에 스스로를 매달아 '여유'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여유와 게으름을 혼동하면 안 된다. 나는 나에게 너무 야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곳저곳에서 모자라고 눈도 쉽게 피로해지고 하루에 원서 한 권을 읽어버릴 수 없는 - 제 아무리 강경한 의지가 있더라도 - 인간일 뿐이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완벽한'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 : 경제적 인간)이 아니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잣대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테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의지'가 아니다.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어떤 사소한 것들일 테다. 이를테면 '넛지'처럼 작고 미묘한, 그리고 부드러운 개입이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놓고 핸드폰을 멀리 충전해놓는 것 만으로 아침 '뒹굴시간'의 절반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읽기로 한 원서의 하루당 범위를 줄이고 안 읽으면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주기로 하니 꾸준히 읽게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장치들의 도움을 받으니 전보다 계획을 이뤄가기가 수월해졌다. 완벽주의 기질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 않자 자존감이 보다 안정되어 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