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고 싶은 사람 - 약속으로서의 실재론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을 읽고

by 노마 장윤석

실재에 대한 논쟁을 듣다보면 어쩐지 피곤해지는 나를 본다. 다소 상극에 배치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오래된 대립을 시작으로, 실재론과 유명론의 대립이 그 뒤를 잇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포스트모너니즘의 긴장도 그 연장선상에서 흘러가는 듯하다. 다소 분법적인 이 논쟁에서 나름의 정반합을 시도하는 여러 논의, 예컨대 비판적 실재론은 듣다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실재를 복권’하려는 시도에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 피곤함과 찜찜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실재에 대한 입장은 연구 방법론의 선택과도 ― 명백하게 인과관계가 있는다기보다는 작은 상관관계로서 ― 연결된다. 세계의 실재에 대한 입장은 사회의 실재에 대한 입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양적연구와 질적연구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하는 사회를 분석하고자 대표성 있는 표본을 표집하고 수리 모형을 통해 (대개의 질적 연구자들은 원리를 알 수 없는)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는 양적 방법론. 현장이나 주제에 맞추어 ‘연결된’ 연구대상/연구참여자와의 대화를 토대로 (대개의 양적 연구자들은 왜 소설 쓰고 앉아 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분석과 해석을 수행하는 질적 방법론. 이 양자는 분명 함께할 때 더 시너지가 있을테지만 마치 고교에서 이과와 문과가 갈라지듯이, 담수와 해수처럼 갈라져 서로를 그다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는 데는 이 실재에 대한 존재론-인식론적 관점차가 크다고 본다. ―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분명 누군가에게 과학을 철학/종교로 돌린다고 비판받겠지만 ― 세계(사회)와 방법에 대해 믿음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분명 강을 건너고 싶은 사람은 있다. 기시 마사히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시는 “사회학에 이 두 가지 방법만 있다는 것이 젊은 시절부터 참을 수 없이 불만스러웠”다고 말하며 그전까지 사회학에서는 이야기와 역사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지만, “오키나와에서 청취 조사를 하며 “이야기와 역사는 ‘동일한 것’이라는 걸 실감(7)”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기시는 구술청취 과정의 일화를 통해 “이야기 속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다(21)”는 테제를 내놓는다. 오해는 금물이다. 모든 이야기가 실재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포개어진’ 이야기가 “그저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그 시간들과 ‘실제로’ 관계가 있는 어떤 것이라는 단적인 사실”임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실재의 관계를 증거하는 데 있어 기시는 디테일을 말한다. 구술 과정에 구술자의 대답이 실재(라고 알려져 있는 것)과 디테일의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는 다반사이다. 이것은 일종의 어긋남인데, 이런 ‘어긋남을 포함한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의 물음에 기시가 내놓는 대답은 인상적이다. “여기에 착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착각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착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 또한 할 수 없기 때문이다(20).”


여기서 더불어 “이야기는 베이면 피를 흘린다(22)”는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역사속에서 실재했던 비극, 가해, 고통은 그 역사속에서 실재로 살았던 이의 마음에, 그의 생태에 어떻게든 자국을 ― 상처를 ― 남긴다. 당연히 사람이기에 그 상처는 동일한 형태일 수는 없을 것이고, 아물거나 벌어짐을 반복하며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재가 아니거나, 실재로 번역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영 우리들의 상처에 대해, 어떤 실재하는 진실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실재로 번역하는 방법론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능하고 그것은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다.


피를 흘리는 이야기를 통해 살필 수 있는 것은 사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지 않는 질적조사이다. 기시는 이야기 속에서 마주하는 관계와 그 이야기 속에서 연결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단순한 화법, 스토리, 내러티브, 리얼리티가 아니다. 구술 청취 현장에서 ‘그렇습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중에 혼자 연구실에 돌아와, 그건 단지 이야기다, 스토리였다고 말하는 건 할 수 없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동시에 논리적인 것이다(23).” 대화를 반복하면서 구술자와 ‘규범적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기시는 “이것은 단순한 실재론이 아니라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이다(23)”라며 ‘약속’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생각하면 두 명 이상의 존재가 이루고 있는 사회의 많은 것은 약속일 수밖에 없다. 법이나 제도는 당연하고, 모든 것을 이루는 언어의 가장 바탕도 결국 어떤 약속 ― ㄱ을 기역이라고 부른다는 ― 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은 (사회와 역사라는) 실재의 기본 요소에 오히려 가장 충실한 논지이자 접근법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는 이데올로기보다 힘이 세다”던 도나 해러웨이의 말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강을 ― 어쩌면 태평양일까 ― 건넜던 기시의 항해 일지를 읽으며, 나는 어떻게 이 강을 건너갈 수 있을까 이러쿵저러쿵 생각해 보게 된다. 살펴볼수록, 후쿠시마라는 비극을 둘러싼 이런저런 강들을 ― 여기에는 민족감정, 편파적 생태학 등이 있다 ― 확인하게 된다. 기시의 항로를 따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사를, 이야기를 경청하며 연결되다 보면 어느새 나도 강을 건너고 있게 되는 걸까.


참고문헌: 기시 마사히코 (정세경 옮김), 2021,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 두번째테제

* 2026년 4월 2일 <인류학과 역사연구 (정헌목)>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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