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레이브와 에티엥 웽거의 상황 학습
편집자로 일을 한 지 오 년 정도가 되어가지만 사실 아무도 내게 편집 일을 가르쳐 준 적은 없다. 편집자로 일하는 대개의 친구들도 비슷한 대답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편집자가 됐어요?” 하는 질문에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혹은 “책을 좋아해서요.” 등의 대답이 종종 나온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자격의 요건으로 대개 대학 졸업장이나 국가공인자격증 등을 꼽지만, 편집을 배우는 전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 한국어로 쓰인 글을 다루는 특성상 국문과가 가장 근접한 전공이겠지만, 국문과를 나왔다고 해서 편집 일에 막 유리한 건 또 아니다 - 교정교열 시 국립국어원의 어문규범에 많이 의존하긴 하지만 (놀랍게도) 국가공인자격증도 없다. 출판계를 포함해 글을 다루는 많은 곳에서 일하는 편집자 수가 적지는 않은데, 편집자는 어떻게 편집자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이 마땅치 않다는 것은 사뭇 신기하게 보인다. 편집 학습은 어떻게 이뤄져 온 걸까. 실제로 편집자들의 학력을 보면 인문계 공부 제각각이다. (하도 커리큘럼이 없어서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매년 만드는 ‘편집 매뉴얼’이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블로 꼽힌다.)
“하다 보니 됐다.”는 대답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모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편집 일 또한 그런 면이 있다. 대학의 강단이나, 자격증 커리큘럼을 따라서 편집자가 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 편집자가 되고 난 후 그 네트워크 안에서 선배, 저자 ― 요새는 AI ― 등과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되어간다. 이 부분은 편집 일의 성격을 살펴볼 때 더 상세히 드러난다. 기본적인(일반적인) 어문 규범과 규칙에 더해서 전문적인(특수한) 어문 규범과 규칙이 별도로 있기야 하지만 ― 그래서 정답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 실은 편집에는 정답이 없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띄어쓰기나 맞춤법도 출판사마다 편집자마다 시대마다 분명히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본용 뒤에 나오는 보조용언의 경우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이는 것도 허용된다 ― 물론 허용되지 않는 붙임도 있다. 편집이라는 것이 일종의 문화이기에 그렇다. 정답이 있다 라기보다 비-정답이 있는 것이고, 그 비-정답 또한 사회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정답이 될 수 있으므로. 가장 유명한 예시가 ‘짜장면’ 같이 사람들이 너무 많이 ‘틀리니까’ 시간이 지나 표준어로 인정된 사례겠다. 그렇기에 편집 일은 해 봐야지만 될 수 있는 일이다.
“하다 보니 됐다”는 말은 ‘상황 학습’을 잘 요약하는 말처럼 여겨진다. (편집 일을 레이브와 웽거가 연구한 도제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주입식 교육과 같은 일방향의 학습과는 다르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 형성”이라는 테마의 상호학습이라면 말이다. 들어야 말할 수 있고, 말해야 쓸 수 있는 언어의(모국어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학습은 상호적으로 구성되고, 어느 상황에 놓여야 이루어진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나아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 묻어들어가고 난 뒤에, 관계 속에서 학습하며 ― 주변에서 중심으로 ― 위치성과 정체성이 변해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학습은 ‘누가 되어가는가’의 문제이다. 하다 보니 편집자가 되고, 하다 보니 연구자가 되고, 하다 보니 무언가가 된다.
마지막으로, 글을 읽으면서 1970년대 전문가들의 교육 독점을 비판했던『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썼던 이반 일리치와 그의 동료들이 함께했던 CIDOC(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가 떠올랐다. 레이브와 웨그너가 언급한 실천 공동체와 맥락이 온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교육업계의 폐단이 곳곳에서 등장하며 조명된 ‘배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엇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CIDOC의 교육철학 또한 일리치가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언급했던 (도제식+α) 중세 수도사의 학습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텍스트를 함께 낭송하는 방식과 같이 근대적 독해와 글쓰기가 가진 근원적 독점성, 반생산성과 다른 상호학습의 문화를 다시 조명하고자 했던 시도라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일리치와 그 동료들이 함께 꾸려낸 여러 텍스트(개발 사전Development Dictionary 등)를 살펴볼 때 그들의 상호 학습은 우리 시대 대안 담론의 한 계보를 만들어낸 것이기에. 어느 인터뷰에선가 10년간 아름다운 학문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을 때도, 일리치는 우정과 환대를 소중히 들고 하다 보니 됐다는 답을 내밀었다. 그렇다. 하다 보니 되는 거였다.
*2026.4.1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의 쟁점 2 (조일동)>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참고문헌: J. 레이브 & E. 웨그너(손민호 역), 2010, 『상황학습 – 합법적 주변참여』. 강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