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사에 대한 탐색
편집자 일을 한 지 거진 오 년이 되어간다. 삼년간 냈던 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이 그 시작이었고 종간한 뒤에는 이어서 문명전환종합지《사상계》에 합류해 지금도 머리를 싸매고 있다. 아마 매 계절마다(지금은 두 달마다) 인터뷰를 하고 풀고 정리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서 들었던 여러 고민들이 있다. 이번 주 구술사 글들을 읽으면서 좋은 참조가 되었던 것 같다.
하나의 구술 인터뷰를 풀어본다 상상하고, 말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녹취를 푸는 데 있어서는 편집자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다. 나는 아무래도 연구자 정체성이 편집자보다는 강한지 원래의 말을 최대한 옮기고 살리려 애쓰는 편이다. 다만 지면과 마감시한이 한정된 잡지의 특성상 계속 시간과 분량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같이 일하는 분 중 일간지에서 20년간 일하셨던 한 선생님이 떠오른다. ‘가독성’을 중시하는 선생님은 정말…… 가위손 그 자체다. 선생님이 손댄 ‘말’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깔끔한 ‘글’이 되어있지 싶다.1) 하지만 감탄과 동시에 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들었던 나는 ― 무언가를 잘 못 버리는 성격도 한 몫 할 듯한데 ― 뭔가 아깝고 아쉽기 시작한다. 지면 관계상 잘라낸 ‘좋은’ 말들이 아깝고, 갖은 요란한 것들이 ― 정동, 사투리, 정적 등 ― 다듬어진 게 아쉬운 것이다. 알레산드로 포르텔리의 표현과 같이 풍부한 말들이 담긴 인터뷰에서 “[글의 분절들 안에 포함될 수 없는] 특질들을 제거함으로써 기록문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평정과 객관성으로 말의 감정적 내용을 무미하게 만든(알레산드로 포르텔리, 2010)[1991]: 81)”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에서 ‘가독성可讀性이란 무엇인가’2) 고민이 시작된다. 짧고, 명료하고, 보편적인 글이 가독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인 것 같다. 하지만 길고, 반복되고, 조금은 난해하며, 특이한 글이 꼭 가독성이 낮은(?) 글일까. (개인적으로 너무 딱딱하게 정리한 인터뷰는 감정 이입과 몰입이 안 되어서 오히려 안 읽힌다.) 이 다소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함수를 만들어 가독성 지수를 매긴다고 생각하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다.
가독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과 글의 차이로 인해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말과 글은 정말 다르다. 알레산드로 포르텔리가 구분하듯이 말에서는 변화가 규범이고, 글에서는 쓰기와 읽기 모두 규칙성이 규범이다(알레산드로 포르텔리, 2010[1991]: 81). 변화가 규범이기에 말이 담을 수 있는 일종의 (정리되지 않은) 풍부한 변칙성 내지는 총체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규칙성이 규범인 글이라고 총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규칙에 따라 한정된 것이다. 가독성은 이 ‘말’을 ‘글’로 변환(혹은 번역) 하는 과정에서 쓰이는 일종의 준거(혹은 지표)다. 풍부한 말을 단정한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들리는 말을 읽을 수 있는 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가독성은 생겨난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문자 그대로(literally) 옮긴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번역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만 가지 고민 지점들이 말을 글로 옮기는 작업에서도 발생한다. 인터뷰 전사문을 출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말 많은 손이 가게 되고, 여기에서 ‘어떻게 손을 댈 것인가’라는 편집자의 질문이 시작된다. 각자가 생각하는 가독성의 기준에 맞춰서 손을 댈 테지만 가독성의 기준이 각자 다를테니 말이다. 당장 20년간 일간지 기자를 하셨던 50대 한 선생님과 20대 자칭 연구활동가 뭐시기인 내가 생각하는 가독성도 미묘하게 엇갈린다.
여기서 잠시 활동가(운동가) 정체성을 데려와 보자. 다채로운 ― 그보다 대개 제멋대로인 ―활동가를 규정하는 것은 편집자와 연구자를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에게(우리에게) 가독성이란 어쩌면 ‘와닿는’ ‘울리는’ ‘뜨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판과 공감, 변화를 키워드로 삼은 이들에게(우리에게) 가독성의 준거는 어느 책 제목과 같이 ‘말은 가 닿을까?’라는 질문일 수 있다. 그러니까 가독성의 ‘가’가 ‘가可’가 아니라 ‘가닿다’ 할 때 ‘가’인 것이라면, 앞서 말했던 길고 반복되고 난해하며 특이한 글이라도 가독성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의 물음은 조금 비약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굳이 활동가들의 감각을 예시하지 않아도 젊은 편집자들이 형성해가는 ‘가독성’에 대한 감각이 이전과 다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에 나오는 인터뷰들을 보면 젊은 편집자들의 감각이 한껏 깃들어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분명 기성 신문사가 독점해 온 기사 투의 딱딱한/젠체하는/엄숙한 문체와는 다르다. 나는 편집자들의 이 문체를 말을 글에 짜맞추기보다, 말을 최대한 살려서 ‘대중’보다 몇 사람이더라도 ‘누군가’에게 가닿도록 애쓰는 시도로 이해하게 된다.
사회와 문화가 변해가기에, 가독성이라는 말과 글의 관계이자 독자와 저자/편집자의 관계도 변해가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1) 여기에는 아주 재미나게도 시대와 세대의 기술적 경험도 차이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정말 녹음기를 들고 다니면서 ‘통으로’ 녹취를 풀어 전사문을 만들고 편집을 했던 세대와, 클로바 노트나 다글로 등 AI기술의 출현을 통해 엉성하나마 전사문을 받고 그 위에서 편집을 했던 세대의 일 감각이 같을 수는 없다. 나는 그 사이에 낀 세대 편집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2) 가독성: “인쇄물이 얼마나 쉽게 읽히는가 하는 능률의 정도. 활자체, 글자 간격, 행간(行間), 띄어쓰기 따위에 따라 달라진다.” (표준국어대사전)
* 참고문헌
알레산드로 포르텔리 (윤택림 편역), 2010, “무엇이 구술사를 다르게 하는가?,” 『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 아르케, 77-94쪽.
나탕 바슈텔 (윤택림 편역), 2010,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구술사, 기억으로 쓰는 역사』, 아르케, 97-120쪽.
윤택림, 2003,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2장 “대안적 역사쓰기의 이론적 배경: 역사인류학적 접근,” 역사비평사.
** 이 글은 2025년 3월 26일 <인류학과 역사연구(정헌목) 수업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