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 제6부
들어가며: ecology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영어 단어 ecology는 집과 가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οἶκος(oikos)에서 따온 접두사이자 명사 eco와 말, 이치, 학문을 뜻하는 logos (λόγος)에서 따온 접미사 –logy에서 유래를 두고 있다. 이 ecology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생태학 외에도 ‘생태’, ‘생태계’, ‘생태주의’가 있다. 여기에서는 책에서 번역된 ‘생태학’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음을 짚어두고자 한다. 먼저 ‘생태학生態學’의 사전적 정의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생물의 생활 상태,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표준국어대사전).” 다음으로 생태계의 사전적 정의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어느 환경 안에서 사는 생물군과 그 생물들을 제어하는 제반 요인을 포함한 복합 체계(표준국어대사전).” 마지막으로 ‘생태주의(生態主義)’의 사전적 정의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를 보존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나 태도(표준국어대사전).” 이렇게 ecology를 둘러싼 여러 한국어 번역어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이 ‘말의 생태’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故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은 ‘에콜로지’로 원어를 살려서 쓰기도 했다.
책을 살펴보면서 ‘이 ecology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질문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생태학’이라는 다소 학문적인 ― 속되게는 먹물적인(?) ― 차원의 번역에 내포한 태도는 약간의 인간중심주의에 더해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 故 신승철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은 ‘생태적 지혜(ecological wisdom, ecosophy)’를 가장 적절한 설명어로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지혜’는 –logy가 뜻하는 지식과는 다르게 ‘마음의 생태학’이 비서구적 풍토에서 자리잡은 토착적 지혜(indigenous wisdom) 의 맥락들 ― 남미 에콰도르의 수막 카우사이(좋은 삶), 호주 선주민의 리얀(장소와 존재의 관계), 한국의 풍수지리(전통생태)와 동학의 삼경사상 등 ― 을 담고자 하는 면이 있다. “세상의 주요 문제들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과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베이트슨의 태제를 다시 가져온다면,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과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인식 차이가 극심히 크지 않았던 사상의 생태계가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 멸종위기에 처한 것 같지만 ― 남아 있으니까.1)
이 어려움은 ecology라는 말이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말이면서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벗어날 수 없는 말이라는 위치성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2) 인류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를 이해했다면 문명의 위기가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라던 누군가의 말 ― 생태경제학의 시작을 연 니콜라스 조르제스쿠-로겐(Nicholas Georgescu-Roegen)이 『엔트로피 법칙과 경제 과정(The Entropy Law and the Economic Process)』(1971)에서 제시하는 논지 ― 을 이어서 떠올려보자. 무한히 성장하는 경제(인간의 살림살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비가역적으로 자원에서 폐기물이 되는 경제(엔트로피라는 의미에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초래한 비극인 것이다. 3차원의 세계를 살아가고 시간 축을 더해 4차원을 인식하는 인간 종이 그 이상의 차원을 수리적 영역 이상으로 상상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것도 엇비슷한 맥락이겠다. 무엇이 되었든 현대 인류의 인식론적 유한성이 이 병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태도의 전환점
『마음의 생태학』제6부 ‘마음의 생태학의 위기(Crisis in the Ecology of Mind)’는 다음과 같은 4편의 각기 다른 글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사유에서 사이버네틱스까지〉(1966), 〈인식론의 병리〉(1969),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1970), 〈도시 문명의 생태학과 융통성〉(1970). (풍문으로 듣기로 이 책에 실린 베이트슨의 많은 글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사들에서 거절당하거나 출판되어도 찬바람을 맞았던 글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먼저 〈베르사유에서 사이버네틱스까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베이트슨은 인류학자로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하다고 평할 두 순간으로 ‘베르사유 조약과 연결된 사건들’과 ‘사이버네틱스의 비약적인 발전’을 꼽는다. 먼저 베이트슨은 “우리가 역사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정말로 알기 원한다면, 역사에서 태도들이 변화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전 ‘가치들’ 때문에 상처 입는 순간들이다(707)”라고 말하며 사건이 아니라 관계 패턴에 지극히 관심을 기울이는 포유동물 인간이 ― 1966년에 돌아본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 가장 크게 상처입은 순간으로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짚는다. 그가 원자폭탄이나 2차 대전을 언급하지 않고 베르사유 조약을 짚은 까닭은 당시 우리의 “바이어스와 메커니즘 설정을 변화”시켜 “태도의 전환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패색이 짙었던 독일은 영국과 미국이 합병, 부과금, 보복 조치가 없을 것을 조건 제안을 받아들여 항복을 선언하고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했지만, 돌아온 것은 봉쇄 등의 배신이자 기만이었고, 독일인들은 1년 동안 굶주림을 겪었다.3) 베이트슨은 이에 대해 “이는 우리 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나 배신 중의 하나였다. 완전히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2차 대전을 발발케 한 가장 터무니없는 사건이었다(709)”고 일갈한다.
베르사유 조약 사건은 이후 태도의 전환점이 된다. 베이트슨은 “이런 상황은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주고받는 비극과 스스로 전파되는 불신과 증오, 파괴가 대대로 전해진다(710)”고 언급하는데, 이처럼 타자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폭력의 순환고리는 2026년의 우리가 도처에서 들려오는 전보(戰報)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베이트슨은 2차 대전 이후에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도 그 연속성을 찾는다: “2차 대전 및 이후의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모른다.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이 일반적인 선과 미국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던 것을 회상한다. 그 당시 ‘무조건적 항복’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조건적 휴전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히로시마의 운명이 베르사유에서 결정되었는가?(713).” 베이트슨은 이 상황을 “아버지는 쓴 과일을 먹었으며, 아이들의 이는 시큰해졌다(구약성서 〈에제키엘〉18장 2절)”는 성서의 조항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중간 세대나 후세대] 미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이런 혼란을 야기한 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미친 것은 아니며,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 없었던 후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미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이런 처지에 말려들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도 미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710).”
언덕에서 굴린 돌을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하고, 언덕 아래에서 돌에 깔린 이는 영문을 알 수 없듯이 한 번 돌아간 악마의 맷돌4)은 비가역적인 피드백 구조를 갖는다. 베르사유 조약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강을 건넌 것과 같이 비가역적 변화를 촉발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베이트슨은 “거대한 기만이 있은 다음에는 이런 철학[약간의 위선과 약간의 타협]이 성립되지 않(712)”고 “일반적인 선이란 자라는 세대에겐 위선의 냄새를 풍(712)”기기에, 자리잡은 청교도적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타협에 대한 극단적 청교도주의와 위선에 대한 청교도주의는 결국 삶을 축소시켜 산산조각으로 만든다(712)”는 것인데, 베이트슨은 이 사례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일반적인 선으로 여겨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든다. “히로시마의 운명이 베르사유에서 결정되었는가?(713)”는 참담한 문장이 베이트슨의 문제제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공교롭게도 베이트슨이 이 글을 쓴 시점으로부터 다시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돌아 2026년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질문을 다시 빌려와 묻고 싶다.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사건이 우리 태도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것일까. 나는 여기서 각각 40주기, 15주기를 맞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야기를 하게 된다. 냉전의 여파 속 핵무기 군비증강 끝에 우후죽순 지어진 핵발전소의 잇따른 사고는 장밋빛 미래를 산산조각내고 이 좁디좁은 지구에 거주불능구역을 생성하고 말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이버네틱스: 야누스의 얼굴
다음으로 베이트슨이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꼽는 사이버네틱스를 살펴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 정보 이론, 또는 시스템 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이 사건들이자 생각들은 “조직된 시스템은 어떤 종류의 사물인가(713)”라는 물음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이론체계들은 2차 대전 중 통신 및 전쟁 기술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 과학적 이해의 발전은 분명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넓혔고, “이제는 윤리도 형식, 엄격성, 논리, 수학,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단순한 영감적 설교와는 다른 기초 위에 서 있다(714).” 베이트슨은 이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정직성을 가지고 이 새로운 이해를 이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714)” 말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가 우리 주위에 만들어놓은 환상의 미로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715)”이라 제시한다. ― “어떤 이해도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715)”고 덧붙이지만 ― “사이버네틱스 속에 새롭고 어쩌면 좀더 인간적인 면모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 통제에 관한 우리의 철학을 바꾸는 수단, 더 폭넓은 시각에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게 하는 수단 또한 잠재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717)”며 기대를 남긴다.
베이트슨의 이야기를 살피면 기술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1970년 대가속의 시대가 생생하게 보인다. 어떤 기술이던지 양면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의도와 태도에 따라 결과의 양상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공교롭게도 60년이 흐른 지금, 사이버네틱스의 정점인 AI가 판을 치는 세상이 다가와 있다. 근래 AI가 전쟁 가운데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연일 뉴스에서 살펴보게 된다. 우리는 베이트슨이 제시한 사이버네틱스의 인간적인, 성찰적인 면모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마음(정신)이란 무엇일까
베이트슨은 〈인식론적 병리〉에서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과학적 발견은 마음의 본질에 대한 발견이라며 융의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라라는 두 가지 설명 또는 세계를 말한다. “플레로마에는 오직 힘과 충격만이 존재하며, 크레아투라에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플레로마의 세계는 자연과학의 세계이며, 크레아투라의 세계는 커뮤니케이션과 조직의 세계다(722).” 베이트슨은 이 대비를 통해 “크레아투라적 효과(플레로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는 회로 구조에 의존하며, 또한 회로는 차이들(혹은 차이의 변형들)이 전달되는 닫힌 통로(혹은 통로의 네트워크)(723)”라고 설명하며,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1) 그 시스템은 차이를 가지고 차이들을 근거로 작동할 것이다.
(2) 그 시스템은 차이나 차이의 변형이 전달되는 통로의 닫힌 고리 또는 네트워크로 구성될 것이다. (뉴런에 전달되는 것은 충동이 아니라 차이에 관한 소식이다.)
(3) 그 시스템 내의 많은 사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의 충격보다는 반응하는 부분에 의해 활성화될 것이다.
(4) 그 시스템은 항상성을 향하거나 폭주하는 방향으로 자기 교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자기-교정은 시행착오를 내포한다.
즉, 마음이란 “인과적 고리의 절절한 회로 구조가 존재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생기(724)”는 것으로 “적절한 복잡성의 필연적 기능으로, 복잡성이 발생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필연적이다(724).” 이 지점에서 베이트슨은 “진화의 생존 단위는 마음의 단위와 동일한 것(725)”이라며 분류군들의 계층 구조를 ‘개인, 가계, 아종, 종 등’에서 ‘유기체-내-유전자, 환경-내-유기체, 생태계로 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태학이란 회로 내의 상호작용 및 관념과 프로그램(즉 차이, 차이의 복합체 등)의 생존에 대한 연구임이 드러난다(726). 이상의 마음(정신)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한정해 설명하는 심리(心理)와는 무척 다른 설명 방식이다. 더불어 이상의 논의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적 오류를 살필 수 있게 하는데, 이 지점은 아래에서 살펴보자.
잘못된 사상의 생태계/학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 첫머리에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알쏭달쏭한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잡초의 생태학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사상의 생태학도 있다”고 번역된 문장이다.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었을 정도로 잡초의 생태학은 뭐며, 잘못된 사상의 생태학이 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인식론의 병리〉에서 원문을 찾을 수 있었다: “잡초들의 생태계가 있듯이 나쁜 생각의 생태계도 있으며, 그것이 기본적인 오류가 스스로 번식하는 시스템의 특성이다(There is an ecology of bad ideas, just as there is an ecology of weeds, and it is characteristic of the system that basic error propagates itself)(726).” 여기에서 말하는 나쁜 생각의 생태계로 베이트슨은 “종 대 주위의 종, 또는 종 대 그들이 조작하는 환경(726)”을 들고 “오염된 카네오헤 만, 미끌미끌한 녹색 쓰레기의 이리 호, 이웃을 죽이기 위해 더 큰 원자폭탄을 만(726)”든 것들을 예시한다. 베이트슨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오류의 패러다임’이 낳은 결과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연의 회로와 균형들은 아주 쉽게 나쁜 상태에 빠지며, 이들은 우리 사고의 기본적 오류들이 수많은 문화적 세부 사항으로 강화될 때 반드시 나빠지게 된다(728).”
즉 베이트슨이 지적하는 문제는 어떤 시스템적 구조를 가진 인식론적 병리이다. 베이트슨이 덧붙이듯이. “인간과 인간의 생태계에 대한 이 크나큰 위협의 집적은 깊고 어느 정도 무의식인 수준에서 우리의 사고 습관에 생기는 오류라고 나는 확신한다(731).” 이것 ― 우리의 사고 습관에 생기는 오류 ― 이 잘못된 사상의 생태학/나쁜 생각의 생태계이다. 베이트슨은 이 지점을 “서구의 인식론적 오류에서 자라난 파국적 위험”이라 칭하며 “살충제, 환경 오염, 원자탄 낙진, 북극의 빙산이 녹을 가능성, 세계적 기근 등을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태’라는 말을 쓸 때 긍정적인 지향을 담아서 쓰게 되는 지점이 있다 싶었다. 그러므로 생태 파괴(ecological destruction), 생태학살(ecocide)이라는 말처럼 등 어떤 좋은 상태이자 조건이라고 가정되는 ‘생태’가 부정적인 상태로 변했다는 어법이 가능해진다. 즉, (부정적으로) 파괴됨으로 발견되는 (긍정적인) ‘생태’거 있는다. 하지만 ecology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인식을 담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어떤 상태다. 즉 선순환과 악순환이라 이름붙이기 이전에 존재하는 양의 피드백(positive feedback)과 음의 피드백(negative feedback)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positive와 negative는 긍정과 부정이 아니다.) 우리는 시스템이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현재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5)
생태학적 위기의 역동성
세 번째 글,〈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에서 베이트슨이 지적하는 생태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 기술의 진보 ㉡ 인구 증가 ㉢ 서구 문화의 사고방식과 태도에서의 어떤 오류들. 우리의 ‘가치들’이 잘못되어 있다(736)”는 세 가지로 집약된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 근본 요소들이 분명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트슨은 “인구 증가는 기술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며, 우리의 환경을 적대시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한편 기술은 인구 증가를 부채질하면서 동시에 자연 환경을 상대로 한 우리의 오만, 혹은 ‘교만’을 강화한다(736)”며 다음과 같이 그림 8을 그려 보인다. 인구, 기술, 교만이라는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기근, 공해, 전쟁이라는 결과 값을 만들어내는 지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보다 우리가 보다 깊이 살필 수 있는 것은 “우리[서구 문명의 교만]의 방식이 인간의 유일한 방식은 아니(739)”라는 점이다. 그는 “생각건대 그것은 변화 가능하다”고 말한다(739).” 앞서 시스템 이론에 기대어 설명하면서 ‘비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엄밀하게 시스템 이론에 입각했을 때 피드백 루프는 음양(+-) 모두의 값을 가진다. 즉, 사회는 악순환의 길에 접어들 수도 있지만, 선순환의 길이라는 피드백 루프를 탈 수도 있다. “이 과정을 역전시키기 위해 가능한 진입점(entry point)”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을 활용해 세 가지 생태학이라는 전환구도를 만들어낸 펠릭스 가타리의 논지를 생각해보자. 이는 펠릭스 가타리가 기존의 생태학과 생태주의 개념을 사회와 마음으로 확장한 자연생태, 사회생태, 마음생태라는 삼원도식으로, 아래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펠릭스 가타리(윤수종 옮김), 2003[1989], 『세 가지 생태학』, 동문선]. 이러한 구도는 생태를 단일한 생태계로 이해하는 관점을 넘어 마음, 사회, 자연 각계에 존재하는 생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앨리스 달 고보(Alice Dal Gobbo)는 이에 대해 자연, 사회, 개인을 방법론적으로나 혹은 사고의 편의를 위해서도 분리할 수 없는 상호 의존적 실재로 개념화한 것이라 말하며 이 세 가지 차원을 같이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는다. “하나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나타나며, 사회 및 자연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않고서는 개인 차원의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앨리스 달 보고(경규림 옮김), 2024,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 이상북스]. 종합하면, 생태(학)적 위기도 시스템적이지만, 위기에 맞서는 대응 또한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이에 대한 베이트슨의 답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세상에는 아직 건전한 부분들이 살아남아 있다. 대부분의 동양 철학은 서양이 낳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건전하며, 우리 젊은 세대의 표현하기 힘든 어떤 노력들은 체제의 관행보다 더 건전하다(731).”
2) 베이트슨의 논리체계에서 자연과 인간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이분법적 논리구조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자연 및 자연-문화(nature-culture)가 얽혀있는 생태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역설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
3) 이는 베이트슨 한 명의 해석이라고 보기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너무나 생생하게 기술하고 증명한 이야기다. 케인스는 1919년 베르사유 회의에 영국 대표단으로 참여했고 세계 전체가 다시 번영하려면 적개심을 덮고 교류를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 책을 통해 이를 비판했고, 유럽 전체의 경제적 위기와 더 큰 전쟁을 예고했고 불행하게도 이는 20년 뒤 현실이 되었다.
4) 이 지점은 맥락은 다르지만 칼 폴라니의 분석에서도 주되게 등장한다. 폴라니가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자유방임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출현과 이에 맞선 사회 보호 운동의 대립을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라는 대립을 통해 살필 수 있는 ‘악순환’혹은 ‘강화 피드백(positive feedback)’이다.
5) 생태철학자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는 이 지점에서 일반시스템이론과 초기불교 교리의 관점을 함께 활용해, 지금까지 이해되어 온 단선적 인과율을 비판하고 상호인과율을 말한다. 조애너 메이시(이중표 역), 2020,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 일반시스템이론은 생명·생태·윤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불광출판사, 참고. “일반시스템이론은 다양한 영역 속에 있는 일정한 것의 관찰을 토대로 하는 하나의 메타 학문으로서, 단일 방향 인과 개념들이 두 개의 변수를 지닌 문제들에는 타당하지만 다수의 변수를 지닌 복잡한 시스템에는 유익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발전했다. 두 개 이상의 전자를 가지고 있는 원자들의 전자 궤도 패턴에서든, 자신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생명체적 유기체의 전기 화학적 패턴에서든, 변수들은 상호 간에 조건이 되고 있으며, 또한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시스템적 견해는 실체가 아니라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원인과 결과는 더 이상 범주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생물학자이자 일반시스템이론의 아버지인 폰 베르탈란피는 “단일 방향 인과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분리된 단위들의 체계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했다(조아나 메이시: 55).”
*참고문헌: 그레고리 베이트슨(김대식 역), 2006[1972], 『마음의 생태학』, 책세상, 제6부 마음의 생태학의 위기(705-756쪽).
* 2026년 3월 25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의 쟁점 2> (조일동) 수업 발제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