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서문-1장
0. 들어가며 – 로버트 단턴의 관계망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은 ‘책의 역사’라는 방면을 개척한 선구적인 역사학자로 불리며, “대량 인쇄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 형성에 끼친 영향(9)”을 논증해왔다.
『고양이 대학살』의 번역자 조한욱은 그의 작업을 ‘관념의 사회사’라고 칭하며 두 가지 의의를 설명한다. 첫 번째로는 ― 민속학과 인류학을 이용함으로서 ― 많은 사람들이 사료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던 자료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캐냈다는 점이다. 즉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 “가장 불투명한 곳에서 문서에 손을 대어봄으로써 낯선 의미 체계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문화 해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으로, 단턴은 문화가 반드시 ‘높은’ 곳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논증했다(13).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보다는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던 방식(9)”에 주목한 것이다. 이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설명된다.
그는 “모든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역사학도 본질적으로 해석적이다(20)”라고 말하며 해석을 강조하는데, 이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주고) 받았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역사학과 인류학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개정판 서문에서 말하듯이
“역사학과 인류학은 서로를 강화시켜왔고 『고양이 대학살』이 처음 나온 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두 학문은 서로 결합하여 그 어느 때보다 전도유망해 보이는 비옥한 연구 분야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22).”
전도유망해 보이는 공부에 함께 들어서기 전에, 그의 작업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위해 클리포드 기어츠와 카를로 긴즈부르그와의 관계를 잠시 살펴보자.
1) 클리포드 기어츠
이 책 ‘고양이 대학살’은 월리엄 슈얼의 말처럼 “클리포드 기어츠(1926~2006)의 영향을 크게 받은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기어츠의 핵심 개념인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을 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사례로 꼽힌다. 역사(학)와 인류학의 경계를 허무는 기획의 저작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 두 사람은 1970년 프리스턴에서 만난 동료 사이로 공동 강의(The History of Mentalities)를 25년간 이어오기도 했고, 기어츠의 사후에 출간된 『문화의 해석』결정판에는 단턴이 서문을 집필했다. 기어츠 사망 후 단턴이 쓴 추모 회고문에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그는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심성(mentalitie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물었습니다. 내가 더듬거리면서 대답을 내놓자 그는 말했습니다. “인류학처럼 들리는군요.” 1년 뒤 우리는 함께 강의하게 되었고, 그것은 역사학과 인류학에 대한 세미나로 발전했습니다. (중략) 역사학과 인류학의 사랑 이야기는 1970년대에 놀랍도록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두 학문은 마치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시간적으로 아주 먼 과거의 것을 연구했고, 인류학자들은 공간적으로 아주 먼 미래의 것을 탐구했습니다.”
2) 카를로 긴즈부르크
한 걸음 더 들어가 『치즈와 구더기』, 『베난단티』등 미시사(微視史, microhistory) 연구의 선구자로의 저작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크(Carlo Ginzburg, 1939~)도 함께 살펴보자. 두 사람은 영 교류가 없어 보이지만, 동시대에, 서로 다른 국가적 전통 안에서, 유사한 방법론과 기획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동갑내기라는 것 외에도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단턴이 18세기 프랑스 인쇄공 도제들을 연구하며 프랑스 혁명 속의 다른 이야기들을 조명했던 것처럼, 긴즈부르크는 16세기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을 연구하며 종교재판을 살폈다. 주변화된 ― 혹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던 ― 개인 혹은 개인들의 이야기로부터 역사 현장에 내재된 상징과 의미를 드러내려 했던 점에서 둘은 흡사하지만, 방법론적 차이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긴즈부르그의 방법론은 ‘단서 패러다임(evidential paradigm)’이라 불리는데, 역사가가 ―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같은 탐정처럼 ― 미세한 단서와 흔적들을 추적하고 비교해 어려운 증거에 다가가는 방법이고, 여기에 비해 단턴에게 이 ‘단서’이자 ‘증거’는 하나의 읽어내야 하는 텍스트였다. 더불어 어떻게 자료에서 의미를 이끌어내는 지 또한 차이가 있다. 긴즈부르크는 초기에 비해 연구를 거듭해가며 미시는 거시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긴즈부르크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점도 여기서 연결되는 데, 그는 단턴의 지적 계보에 포함된 프랑스 아날학파의 심성사(心性史, histoire des mentalités)에 대해서 계급 없는 특징을 지닌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긴즈부르그의 접근이 계급 관계와 지배 문화의 억압을 읽는 반면, 단턴의 접근은 ― 기어츠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 문화를 보다 자율적인 상징 체계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할 수 있겠다.
1. 서론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연구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지성사가 아닌 ‘망탈리테의 역사’이자 문화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인종지학적[민족지적] 성향의 역사다(23).” 단턴의 분류에 따르면 관념의 역사가는 형식적 사고의 계보를 추적하지만 인종지학적[민족지적] 역사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관을 캐내어 그들이 마음속에서 실제를 어떻게 구성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이려고 시도(24)”한다.
현장이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분명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이고,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는다(25)”는 것이다. 단턴은 우리는 두 세기 전의 유럽 사람들이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꼈다는 편안한 가설로 미끌어질 것이 아니라, “문화 충격이라는 처방을 받음으로써 과거에 친숙하다는 그릇된 느낌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문서보관소에서 해매일 때 “우리는 낯선 의미 체계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이고, 그 실마리는 이상하고 놀라운 세계관으로 연결될 수(26)”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문서 속의 속담, 농담, 의례 등을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담이나 철학 서적을 읽는 것과 똑같이 의식이나 도시 또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독서법’이라는 해석으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단턴이 주목하는 대상은 전형적인 사례가 아니다. 그는 “‘전형적인 농민’이나 ‘대표적인 부르주아’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27)”는다고 말한다. “문화사가가 왜 이상한 것을 회피하고 평균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27)”고 체계가 없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 인류학적 방식의 역사는 ― 경직된 사회과학자들에게 문학으로 의심받더라도 ― 그 자체의 엄정성을 지니고 있고, 단턴은 이에 대해 “이런 종류의 문화사는
해석 과학에 속한다”는 다소 논쟁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2. 1장. 농민들은 이야기한다: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
「빨간 모자」 이야기로 알려진 오래된 프랑스 민담으로 장은 시작한다. “계몽사상의 시대에 계몽되지 못했던,” 18세기 평범한 사람들의 우주관을 이해하기 위해 단턴은 질문을 던진다. “이런 텍스트의 해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빨간모자 이야기는 늑대를 멀리하라는 교훈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 등 “원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에 대한 수수께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단턴은 이렇게 일갈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어쩌면 그렇게도 왜곡할 수 있을까(34)” 이어서 그는 (이 왜곡은) “전문가의 독단이라기보다는 민담의 역사적 차원에 대한 맹목에 기인한다(34)”고 말하며, 민담의 역사적 차원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정신분석학자 브루노 베텔하임 등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은 법”으로 이 민담을 분석한 이들은 이 텍스트가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 주목하지 않아왔다. 하지만 단턴의 말따라 “사실상 민담은 역사적 문서”이기에 “수 세기에 걸쳐 진화해왔고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다른 변화를 겪었다(38).” 여기에는 교훈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18세기 프랑스의 이야기꾼들이 지었던 「빨간 모자」뿐 아니라 「잠자는 미녀」「푸른 수염」「신데렐라」「헨젤과 그레텔」 다른 마더 구스 이야기들도 모두 이 점에는 마찬가지로, 강간, 수간, 근친상간, 식인 등 날것 그대로의 야만성의 세계가 드러난다.
“역사가는 이런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41).” 단턴은 이 심리적 역류 속에서 발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인류학과 민속하게 매달리기를 제안한다. “인류학자들은 이론을 논할 때 그들 학문의 본질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기에 “이야기를 구연口演의 기술과 관련시켜 그 이야기가 발생한 맥락 속에 위치시키(41)”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펴볼 때 이 이야기들을 비교 연구하면 “먼 여러 외진 마을에서 채록한 같은 이야기의 다른 기록들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농민들이 수 세기에 걸쳐 놀랄 정도로 손실 없이 축적해온 대중문화의 일부였다(45)”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구전 전통은 인쇄 문화와 독립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전승되어왔다.
1794년생 문맹 농촌 여성, 1862년생 외프라시 피송의 구술 판본이 1697년 페로의 인쇄본과 무관하게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은 계보가 독립되어왔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단턴은 우리에게 ‘낯선’ 이 텍스트가 18세기 프랑스 농촌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지 질문한다. 단턴이 비교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프랑스 민담의 세계관에는 근대 초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실정이 묻어 들어가 있다. “근대 초 프랑스의 농민들은 계모와 고아의 세계, 비정하고 끝없는 노동의 세계, 거칠지만 동시에 제어된 잔인한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62).” “그 이후에 인간의 조건이 너무도 변화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들의 삶이 야비하고 잔인하고 짧았던 사람들에게 당대의 세계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우리가 마더 구스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62-63).”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실정 ― 농민들의 이중적 배경 ― 은 민담에서 크게 두 가지 기본적인 틀로 드러난다. 가난을 상징하는 가정과 마을이 그 하나이고, 부랑자와 도적 등의 위험을 상징하는 ‘열린 길’이 다른 하나이다. 이것은 땅에 묶인 삶과 도망 및 이동의 삶을 민담이 구조화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물질적 현실은 민담의 구조 자체와 직접 대응한다. “간혹 보이는 환상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은 실재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71).” 그는 이 이야기는 “마을에서건 길에서건 곳곳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갔는지를 보임으로써 농민들의 방향 설정에 도움을 주었다(78)”고 말한다. 그들의 삶에서 이야기가 자리하는 위치를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단턴이 말하듯이 “이야기는 세상 살아가는 길의 지도를 그렸던 것이자 잔인한 사회 질서 속에서 잔인한 것 이상을 기대한다는 것의 어리석음을 증명했던 것이다(78).” 즉 민담이 잔인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잔인한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야기 속에서 확인하고 지도로 삼았다는 점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겠다.
3. 논의거리
(1) [계급에 대한 소고, 밑으로부터의 역사] 단턴의 작업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로 널리 불린다. 그렇다면 이 ‘밑’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턴의 작업은 언어권력을 독점한 상류층 중심의 역사에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블랙박스/괄호치기 되어있었던 농부와 수공업자들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겠지만, 농부 및 수공업자의 사회와 지식인 혹은 부르즈아의 사회의 관계를 충분하게 짚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앞서 살펴본 긴즈부르크의 지적처럼 ‘계급 없는 특징’을 가진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혹은
E. P 톰슨이나 가야트리 스피박과 같이 계급적 관점으로 역사를 사유한 이들의 맥락으로 이 ‘밑’을 사유할 때 어떤 논의를 더 해나갈 수 있을까.
(2) [평화학/범죄학과의 조우] 범죄학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이를 읽게 된다면 단턴이 지적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야’식의 추리소설처럼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이해 방식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며 18세기 노동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주인을 조롱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지`ㅌ 못하는 것이다(21).” 하지만 이 역사의 행간을 읽더라도,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고야 마는 ‘폭력의 순환고리’은 여러 지점에서 참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단 18세기 프랑스의 일만은 아닐 것인데,
21세기 한국으로 돌아오면 군대에서 ‘짬타이거’라고 불리는 고양이들을 학살해온 역사가 있다. 군대 시스템 내 부대에서 척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군대 내 계급 하에서 존재하는 폭력이 동물학대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혹은 후대의 역사가 혹은 인류학자는 어떻게 이 문제를 읽게 될까.
(3) [고양이의 역사, 묘사] “이 캠퍼스에도 정말 많은 고양이의 역사가 있어요(정헌목, 2026.3.19. 운중동의 한 점심시간).” 이 이야기를 고양이라는 종의 눈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고양이의 역사, 이름하여 ‘묘사(猫史)’의 관점으로 이 대학살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양차 세계대전 가운데 있었던 아우슈비츠와 같은 학살들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개념과 법 제도를 출범시켰던 것처럼, 이 사건도 그 역사속에서 중차대한 지위를 가졌을지 모를 일이다. 서술자의 위치를 뒤바꾼 역사의 전환은 어떻게 말해볼 수 있을까.
참고자료: 로버트 단턴(조한욱 역), 2003[1984], 『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 문학과 지성사, 서문-1장 농민들은 이야기한다: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 (8-132/구판15-65).
* 2026년 3월 1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과 역사연구(정헌목)> 수업 발제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