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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번역가 Nov 09. 2023

소금 주스와 '배불러요' (하)

상큼한 소금 주스


말 그대로 소금 라임 주스였다.



(상) 편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https://brunch.co.kr/@nomadboar/2)



유심을 샀다. 이제 돈도 인터넷 연결도 충분하니 무서울 게 없었다. 일단 길을 가다가 어디든 에어컨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서 주스나 한 잔 마시며 땀을 식힐 작정으로 또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가도 가도 카페가 없었다. 그 많던 카페가 어쩜 내가 걷는 길에만. 왕복 6차로의 대로변인데도. 문을 열고 노상 좌석을 놓은 카페는 몇 군데 보였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에어컨이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마냥 걷다 보니 교차로가 나타났다. 마침 보행자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내 옆의 노인이 길을 건넜다. 나는 홀린 듯 노인을 좇았다. 지금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영영 이 넓은 도로를 건널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건너간 쪽에도 에어컨이 나올 것 같은 카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 카페에나 들어갔다. 문을 활짝 열고 노상 좌석을 놓은, 그간 여러 차례 지나친 곳들과 마찬가지로 에어컨이 없을 게 분명한 카페. 내가 들어서자 노상 좌석에서 다른 손님과 이야기하던 사장님이 따라 들어와 메뉴판을 꺼내 주셨다.



상큼한 소금 주스

커피, 차 같은 부분은 지나치고 구석의 딱 한 부분만 확인했다. Nước ép, 주스. 몇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chanh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주문을 결정했다. chanh은 라임이라는 뜻이다. 상큼한 라임 주스라니, 종일 땀을 흘리며 걸어 다닌 여행자에게 딱 맞는 메뉴가 아닌가! 나는 원해요, 주문하다, 하나, 주스, 라임…. 더듬거리며 말하다 문득 Nước ép chanh 뒤에 한 단어가 더 붙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muối. 이건 소금이라는 뜻이다. Nước ép chanh muối, 소금 라임 주스. 나는 멈칫했지만 곧 '부탁해요'로 주문을 마무리했다. 에이, 설마. 라임청이나 그런 거겠지. 당절임도 소금이라고 하나 보네.


곧 사장님이 잔 두 개를 내왔다. 큰 잔에는 바닥에 라임 절임을 듬뿍 깔고 물과 얼음을 넣어 만든 주스가, 작은 잔에는 얼음을 듬뿍 넣은 녹차가 담겨 있었다. 내 얼굴에 맺힌 땀을 보았는지 가게 안의 선풍기도 내 쪽으로 틀어 주셨다. 감사 인사를 하고 빨대를 깊이 꽂아 주스를 쭉 마시는 순간 혀에 이제껏 맛본 적 없는 충격이 전해졌다.



메뉴판의 muối는 소금이 맞았다. 그러니까 Nước ép chanh muối라는 메뉴명은 비유도, 내가 베트남어 단어의 다른 용법을 몰라서 잘못 독해한 것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소금 라임 주스였다. 라임을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물을 넣어 주스로 만든 것 같은데 염도가 상당했다. 라면을 끓일 때 물은 권장량의 절반만 넣고 가루수프는 다 넣은 뒤 국물을 그대로 마시는 수준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근데 이제 시원한 얼음과 상큼한 라임 향을 곁들인.


예기치 못한 짠맛에 황급히 옆에 있던 찻물을 들이켰다. 다행히 차는 예상대로 그냥 차가운 녹차 맛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소금 라임 주스를 조금 마셨다. 빨대 끝을 최대한 얼음 위쪽에 두고, 아래쪽의 라임 절임이 최대한 덜 섞이도록. 그래도 짰다. 다시 녹차를 마셨다. 그리고 반복했다. 소금 주스 쪼록, 녹차 벌컥벌컥. 짠 김치 한 줄기를 반찬으로 밥 한 공기를 비우는 양 마시다 보니 금방 찻잔이 비었다. 주스는 거의 그대로였다. 많이 남겨서 사장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계산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님과 대화하던 사장님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빈 잔에 다시 얼음과 녹차를 채워 내오셨다.


나는 당황했지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직 덥고 입 안이 짜니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주스 한 모금을 반찬으로 녹차를 다 마시고 여기 계산이요, 가 베트남어로 뭐더라, 생각하는 순간 사장님은 또다시 찻물을 따라 주셨다. 이제 슬슬 더위가 가시다 못해 물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잔을 다 마실 때쯤 바깥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이 떠났고, 사장님은 아예 작은 잔을 치우고 주스 잔만큼 큰 잔에 녹차와 얼음을 가득 채워다 주셨다. 오, 제발. 정말 감사한데 이제 괜찮다고는 어떻게 말하지.



큰 잔에 담긴 녹차를 거의 다 마실 때까지도 소금 주스는 줄지 않았다. 분명 많이 마셨는데 오래 걸리다 보니 마신 양만큼 얼음이 녹은 모양이었다. 그럼 짠맛이 줄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사장님이 내 주스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씀하셨다. 당황해서 영어로 괜찮아요, 충분히 마셨어요, 남겨서 죄송해요,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이에요 등의 말을 주워섬겼지만 사장님은 활짝 웃으며 주스를 가져가더니, 잠시 후 라임 절임의 양이 조금 줄고 물과 얼음이 많아진 주스를 가져오셨다. 짜서 못 마시고 있는 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그야 티가 날 만도 했다.


물을 더한 주스는 아까보다 덜 짰지만 그래도 마시기가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사장님이 녹차를 새로 따라 주시더니(다섯 잔째였다)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렇게 베트남어는 조금, 몸짓과 표정이 대부분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어 하니? 

나는 말해요, 베트남어, 아주 조금만. 공부했다, 듀오링고 앱으로.

주스가 별로야(이건 못 알아들었지만 사장님의 몸짓으로 짐작했다)? 

나 마셔요, 소금 주스, 처음. 

한국? 

네, 한국인(대답하면서도 눈앞의 외국인이 한국에서 온 걸 어떻게 바로 알아보시나 했는데, 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 내 티셔츠 앞자락에 SEOUL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몇 살이야? 스물다섯? 

아뇨, 서른둘이에요. 

그래? 나는 오십이야. 

아, 내가, 말해요(사장님을 가리키며), 남자 어른(anh)이라고? 나는, 어린 사람(em)? Anh em(사실 이렇게 합쳐 말하면 '형제'라는 뜻이 되지만 사장님과 의형제를 맺을 의도는 없었음을 밝혀 둔다)?

하하, 맞아. 직업은? 어디서 일해?


이쯤에서 잠시 검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직업을 베트남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읽어요, 영어, 그리고 써요, 한국어."라고 말하며 급하게 구글 번역으로 '번역가'를 검색한 결과를 보여 드렸다. người phiên dịch. 번역 결과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으니 대충 맞았을 것 같다.



그 뒤에 하는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 사장님이 자리를 뜨셨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재미가 없어 그러나 했는데, 곧 웬 과일을 한 접시 썰어서 가져오셨다. 껍질은 푸르고 과육은 흰 과일이었다. 한 조각 먹어 보고 맛있다며 이름을 물으니 오이(?)라고 알려 주고는 과일을 가리키며 뭔가 손짓과 함께 '주스'라는 단어가 포함된 말씀을 하셨다. 설마 이걸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 주시겠다는 건가?


나는 이미 소금 주스와 함께 마신 작은 잔으로 석 잔, 큰 잔으로 두 잔, 도합 다섯 잔의 찻물 때문에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배가 부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몰랐다. 황급히 아는 단어를 조합했다. "나는 마셨어요, 많이. 아주 많이." 그러나 사장님은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깊이 후회했다. 


배부르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공부해 왔어야 했다. 내가 그간 외운 단어로 작문할 수 있는 "행복이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형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헤엄쳐 가기 일보 직전이다." 같은 말이 아니라, 충분하고 배부르고 괜찮다는 사양의 말이 필요했다. 사장님이 갈아 주신 과일을 검색해 보니 qu ổi, 즉 구아바였다. 구아바 주스는 시원하고 달콤하며 소금 맛은 전혀 나지 않았다. 맛있다고 하자 사장님이 활짝 웃으셨다. 그 웃음을 보고 정말 배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이 주스는 다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베트남 특유의 화려한 건물이 늘어선 도로가 바로 보이는 곳에서 엔진과 경적 소리를 듣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앉아 마시는 구아바 주스는 각별했다. 사장님과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제대로 소통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베트남어가 서툰 관광객과의 만남을 기념하고 싶으셨는지 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구아바 주스까지 다 마시고 음료가 목구멍까지 차서 찰랑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굉장히 좋은 상태로 일어나 계산 부탁해요, 하고 말했다. 혹시 사장님이 내 발음을 못 알아들으실까 지갑을 적극적으로 열어 보이며, 소금 라임 주스와 구아바 주스에 녹차 무한리필까지 받았으니 대체 얼마를 드려야 할지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고개를 저으며 뭐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당황해서 다시 지갑을 들어 보였다. 사장님이 이번에는 손까지 내저으며 다시 길게 얘기를 하시는데,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아무래도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베트남어 공부를 대충만 한 게 다시금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손을 내저으며 그나마 할 줄 아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저 마셨어요, 많이, 죄송합니다, 사고 싶어요, 주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말이 통하기보다는 몸짓과 말투로 사양의 의미가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웃으면서도 계속 돈을 받기를 거절하셨고, 몇 안 되는 베트남어 레퍼토리가 다 떨어진 나는 결국 주스 값을 내지 못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카페를 떠났다.



이렇게 내가 하노이를 떠나기 전에 꼭 다시 들를 곳이 하나 생겼다. 작은 선물을 사 가서 사장님께 드리고, 소금을 안 넣은 주스를 마실 거다. 구아바 주스를 다시 마시는 것도 좋겠지. 물론 이번에는 사장님이 거절해도 어떻게든 주스 값을 낼 작정이다.


그리고 카페를 나서며 검색한 베트남어 한 문장은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배불러요, Tôi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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