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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Jan 16. 2017

47. 미니스커트

어른이 된다는 것


친구가 한 컷의 만화를 보여주었다. 지친 표정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고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둘리 보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너도 어른이 되는 거란다.” 


웃었지만 한편으론 짠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살고 싶어 했던 그에게 어느 날 들이닥친 둘리와 도우너 그리고 또치. 그들의 존재는 얼마나 애물단지였을까! 예전엔 길동이 아저씨가 둘리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서 미웠었는데 지금의 나는 측은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생의 경험치가 쌓여서일 것이다.


타인에게 연민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나와 다름과 동시에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날 선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같은 이치랄까. 인생이란 겪어봐야 터득하게 되나 보다. 한해 두해 나이에 숫자만 더해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





여행 가방에 미니스커트를 챙겨 넣는다. 한창 어울릴 때는 입지 못했다. 나는 내 다리가 부끄러웠다. 마치 통통한 동치미 무처럼 느껴졌다. 그보다 어릴적 뛰어 놀다 생긴 상처로 인해 군데군데 작지않은 흉터가 있는 게 보기 싫었다. 그렇게 짧은 치마를 오랫동안 멀리했다. 실상은 다리가 어떻든 무슨 치마를 입었건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쳐다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은 사람들은 '날씬하고 예쁜 다리를' 주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착각에 빠졌었다. 나는 그만큼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았다. 풋풋해서 좋던 시절 다 보내고, 뒤늦게 입고 다니게 된 건 여행 때문이었다.


긴 면바지를 깜박 잊고 챙겨오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 햇볕은 쨍쨍하고 모래알은 반짝거리는, 게다가 후덥지근한 바람이 연신 불어오는 무더운 날씨에 집에서부터 입고 온 땀에 전 긴 청바지를 다시 꺼내 입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가방을 뒤졌다. 혹시 해서 가져온 치마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나쁜 마녀에게 저주받은 공주마냥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옷장에서만 지내야 했던 나의 청색 미니스커트. 그래, 이제 너의 저주를 풀어주마.


거울 앞에서 몇 번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가 입었다. 그리고 쭈뼛쭈뼛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보다 태양은 더 눈부시게 타올랐다. 마음 내키는 대로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가게에 들어가 옷 구경도 하고 길거리에 서서 간식도 사 먹는 동안 나는 알게 되었다.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형국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에 빠져있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다른 이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쓴다 해도 잠시일 뿐 다시 작은 화면 속을 집중한다. 사람들이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 들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취직은 했어? 결혼은 왜 안 해? 애는 안 낳아? 그 나이에 그걸 해서 뭐 하게? 이런 말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저 잠깐 궁금해서 혹은 이렇다 하게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묻는 말일뿐 금세 잊고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간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 1순위도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힌다. 그런 잠시 잠깐 때문에 그동안 내가 나를 스스로 가두어 온 걸 생각하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는 결코 알지 못 한다는 것 또한 이제는 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지나간다.  


이제 리스트에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것들을 하는데 덜 주저하게 되었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예전보다는 훨씬 자유로워졌음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에게 좋은 시절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아는 걸 지금 하자’고 다짐해본다. 나이 들수록 더 즐거워지려면 말이다.


나라는 사람은 단순한 사실을 아는데 이토록 오래 걸린다. 어쩌나 그게 나인걸.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나이 많은 사람일 뿐 어른이란 노력을 해야지만 이를 수 있는 자리구나 알게 되니 어른, 이거야말로 힘든 극한 직업일세.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마법에서 풀려난 나의 청색 미니스커트는 이제 레깅스란 놈을 대동하고 겨울에도 거리를 활보한다.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나를 데려다 주는 튼실한 내 다리에게 새로운 주문을 건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고맙고 또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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