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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Oct 29. 2019

토마 피케티 비판

*원문출처: http://www.socialisteconomist.com/2019/10/capital-not-ideology.html?m=1


자본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Michael Roberts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 맑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작가이며, 런던에서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경제 위기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 작업을 해 왔으며,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가장 최근작은 『장기 침체: 맑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위기』(The Long Depression; Marxism and the Global Crisis of Capitalism, Haymarket Books, 2016)이다. 최근 몇 해 동안, 그의 블로그인 ‘The Next Recession’는 전세계적인 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지난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이라는 블록버스터급 책을 한 권 출판했다. 맑스의 『자본』을 되풀이하는 듯한 제목 때문에, 이 책은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21세기에 업데이트한 듯한 암시를 주었다. 피케티는 주요 자본주의 경제국가에서의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18세기 말 이래 가장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했으며, 무언가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등은 계속 될 것이라는 점을 논증했다.       


책은 비단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특히 프랑스에서보다는 미국에서)일반 대중들에게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국가에서 점증하는 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논증, 경험적 데이터와 진술들로 가득찬 이 800페이지 짜리 기념비적인 출판물이 2백 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종내에 이 책은 가장 많이 사갔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The Brief History of Time)에 버금가는 책이 되었다. 난 맑스의 『자본』도 이런 책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피케티의 논증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주류와 비주류 양 쪽에서 잇따랐다. 피케티는 그의 프랑스인 친구 주크망(Zucman)과 사에즈(Saez)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평등의 정도들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경험적인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불평등 연구의 대부가 있었는데, 최근 사망한 안토니 앳킨슨(Anthony Atkinson)이 그 사람이다(그의 연구는 19세기 영국에서의 부의 불평등에 관한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Thomas Piketty at Fronteiras do Pensamento, São Paulo 2017. From: Fronteiras do Pensamento / flickr.

하지만 내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에 발표한 글에 따라 피케티를 비판하건데, 피케티는 결코 맑스를 따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가치와 이윤율 법칙에 기초한 맑스의 경제이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피케티에게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는 주요 주제가 아니었고, 부의 소유(특히 사유재산과 금융자산)가 더 중요했다. 그것은 부자들이 어떤 경제 체제 안에서 총소득에 있어서 그들의 몫을 불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케티의 이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체가 아니라 부자들에 의해 축적된 자본의 재분배를 요청했던 것이다.      


주류 학계에서의 피케티의 명성은 빠르게 희석되어 갔다. 평하자면, 2015년 ‘미국 경제학회’ 컨퍼런스에서 피케티는 환영받았지만, 그 한 해 안에 모든 것이 잊혀졌다. 이제 6년이 지났고, 피케티는 새로운 책,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내놓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대략 1200페이지의 대작이다. 혹자는 이것이 『전쟁과 평화』보다 더 길다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이 불평등에 대한 이론과 그 증거들을 제공한 반면, 이 책은 왜 이러한 불평등이 20세기 후반기에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으로부터 그는 그러한 상태를 역전시킬 몇몇 정책들을 제안한다. 피케티는 그의 분석을 (민중을 포함한) 전세계적 지평으로 넓히고, 자산 소유권이 여러 역사적 사회체들, 즉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에서부터 유럽 식민통치기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럽의 봉건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었고, 정당화되었는지에 관한 역사적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그는 불평등이 하나의 선택이라고 전제한다. 즉 불평등이란 ‘사회체들’이 채택하는 것이지, 기술과 세계화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이데올로기를 계급 지향의 소산으로 이해했던 것과는 반대로, 피케티는 역사란 이데올로기들의 전장(戰場)이라는 관념론적 전망을 취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주요 경제국가들은 불평등을 심화시켜 왔는데, 그것은 통치 엘리트들이 불평등을 위한 허구적 정당화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불평등 사회란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든 정당화는 그가 “재산의 신성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귀결된다.      

 

경제학자의 일은 이러한 허위 논증들을 폭로하는 것이다. 억만장자들의 예를 들어 보자.  “그들의 존재가 공동선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많이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부는 집합적 상품들, 즉 공공 지식, 사회적 생산 기반, 연구 기관들 덕분에 획득된다.”(이것은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의 연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억만장자들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을 부양한다는 생각은 거짓이다. 1950년에서 1990년 사이의 미국에서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연간 2.2%였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억만장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을 때 - 1990년에 100명 정도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600명 정도로 성장했다 – 1인당 소득 성장률은 1.1%로 떨어졌다.         

 

피케티는 로널드 레이건 이래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형태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이건주의는 부의 집중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억만장자들을 마치 구세주처럼 만든다.” 하지만 “레이건주의는 그 한계를 드러냈다. 즉 성장률이 반토막이 나버리고, 불평등률은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이라는 이 허상을 깰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의 민중들이 ‘사회주의’를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다만 “자본주의를 극복”하기를 원한다고 본다. 재산이나 자본을 철폐하기는 요원하기 때문에, 그는 부유한 국가에서조차 결코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인구의 하단층에 대한 보상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는 사적 소유를 “잠정적”이자 제한된 것으로 제정의 하기를 요청한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마도 피케티는 5% 누진부유세를 2백만 유로의 가치를 가진 부자들에게 요구하거나 20억 유로 이상의 가치를 가진 부자들에게는 90%에 해당되는 누진부유세를 요구할 것 같다. 그는 “기업가들은 수 백만 또는 수 천만 유로를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그 이상, 즉 수 억이나 수 십억을 가진 자들는 피고용인일 수 있는 주주들과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억만장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같은 국가는 25세가 된 각각의 시민들에게 약 12만 유로의 가치가 있는 신탁자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50-80년 시기에 매우 높은 세율이 경제의 급성장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피케티는 또한 “교육적 정의”도 요청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각 사람들의 교육에 동일한 금액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독일이나 스웨덴에서처럼 노동자들이 그들의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중대한 발언을 하도록 기꺼이 허용한다. 고용된 노동자들은 이사회의 50%를 배당받아야 하며, 가장 큰 주주들의 투표권이라도 10%로 제한되어야 한다. 재산에 대해 보다 높은 세금이 부과된다. 가장 광대한 부동산에는 세율이 90%를 훌쩍 넘어선다. 모든 사람들에게 25세가 되면 지급되는 12만 유로에 상당하는 일괄적인 자본 할당 총액(10만 7천 파운드를 조금 넘는다)과 개인 탄소세는 각각의 사람들의 지구온난화에 끼친 영향에 따라 개인화된 카드로 산정된다. 그는 자본주의 너머로의 이러한 이행을 “참여 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든 것을, 불평등이 훨씬 덜 했고, 경제성장은 더 강렬하게 진행되었으며, 노동계급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고용상태인데다 보다 숙련되고 보수가 좋은 일을 하려고 수준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소위 1948-65년대의 ‘황금 시대’의 날들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되돌리는 것이다. 당시에는 ‘혼합 경제체제’였으며, 거기서 자본주의 기업은 아마도 노동조합과 국가와 더불어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작업했었다. 이것은 하나의 신화였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사회민주주의적 낙원이 존재했고 그 소멸이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야기되었다는 피케티의 전제를 수용하기만 한다면, 이 “재분배적 발상들”이 대불황의 경험과 지금의 극단적인 불평등의 발생 이후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고려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피케티는 사회민주주의 당들이 그들의 평등에 관한 원래의 목표들을 폐기했고, 그 대신에 능력주의를 선택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교육이 노동계급을 위한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논증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그렇게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점점 스스로를 덜 교육받고 더 가난한 계급의 정당에서 교육받고 풍족한 중간 그리고 중상층 계급의 정당으로 변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이 변화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원래의 사회민주주의적 아젠다가 너무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1950년대와 60년대에 변변찮은 배경 출신의 민중에게 교육과 고소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민중, 즉 사회 민주주의의 “승자들”은 계속 좌파 정당들에 표를 던졌지만 그들의 관심과 세계관은 더 이상 그들 (덜 교육받은) 부모들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정당의 내적인 사회 구조는 변화했으며, 그것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의 산물이었다.            


진짜 그러한가? 노동계급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있어서 사회 민주주의 정당의 실패는 197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사회 민주주의 정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상호적대적인 자본주의 권력들의 국가민족주의적 목표를 지원했다. 영국에서, 노동당 지도자들은 내핍을 강요하기 위해 보수당과 연정을 이루었으며, 1929년에는 노동조합과 결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로부터 윌슨(Woodrow Wilson)으로, 그리고  캘러헌(James Callaghan)으로, 킨녹(Stephen Kinnock)으로 옮겨갔으며, 마침내 블레어(Tony Blair)와 브라운(Gordon Brown)으로 이동했다. 이것은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서 올랑드(François Hollande)로, 독일에서는 브란트(Willy Brandt)에서 슈미트(Helmut Schmidt)로.         


이것은 단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계급구성이 산업노동자에서 교육받은 전문가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전후 자본주의 경제국가들의 체질이 변했던 것이다. 짧았던 ‘황금 시대’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또는 조솁 스티글리츠가 내세운 바, ‘규칙의 변화’)로 인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률이 1970년대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에(『자본』에서 맑스에 의해 개괄된 바, 이윤율의 법칙에 따라) 끝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친자본주의 정치가들이 더 이상 노동에 양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상 황금시대의 성과들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되갚아져야만 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경제적 체질에서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 갔는데, 왜냐하면 요컨대 그들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처의 말을 사용하자면, [그들에게는] “대안이 없다.”      


적어도 피케티는,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co Milanovic)와는 달리, 자본주의 너머로 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밀라노비치는 내가 최근에 비평한 그의 새로운 저서 『유일한 자본주의』(Capitalism Alone)에서 대처에 동의하면서 자본주의가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규정한다. “당신은 자본주의 너머로 가야 한다”라고 피케티는 말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너머’라는 단어는 왜, ‘자본주의에서 떠나가다’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을 때, 피케티는 “난 밖으로 간다, 폐기한다, 대체한다고 말하기 위해 ‘넘어 가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초과하다’라는 말은 나로 하여금 대안적 체계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게끔 만드는군요. 소련의 실패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충분한 토론 없이 자본주의의 페기를 그리고 우리가 다음 번에 무엇을 진행할 것인지를 약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부단히 이에 기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케티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소유권주의적(propriétariste)이고 능력주의적인 이야기”는 약화될 것이라고 간주한다. “소위 말하는 능력주의가 그들의 아이들을 명문 대학에 보내면서, 정치 정당들을 사들이고 그들의 돈을 세금으로부터 지키는 부자들에 의해 전유되었다는 것이 점점 더 이해를 얻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시장 안에, 재분배적 발상을 실현하기 위한 어떤 간격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피케티의 대답은 바로 다음과 같다. 즉 불평등한 부와 소득의 재분배는 자본의 사유 재산권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지, 공동소유와 공동통제의 체계로 생산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 그리고 노동착취를 대체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명백하게도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이 존속할 것이고, 거대 제약회사도 그러할 것이다. 화석연료 기업도 계속 있을 것이고, 군산 복합체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본의 기득권들이 여전히 그들이 갖고 있는 극도의 부와 소득에 관한 과세에 있어서 어떤 분명한 증가를 수용할 만치 충분한 이윤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이러한 것들을 대체하지 않고서, ‘재산권의 신성화’라는 현행의 ‘이데올로기’가 극복될 수 있는 무슨 여지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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