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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Nov 03. 2019

법 없는 사회, 정동의 헤테로토피아

- 들뢰즈와 정동의 사회화

*원문서지사항: Beyond the Society of Judgement: Deleuze and the Social Transitivity of Affects,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13.4 (2019): 541–551, Edinburgh University Press


판결 사회를 넘어: 들뢰즈와 정동의 사회적 전이성     


클라우디아 란돌피(Claudia Landolfi), 분할 자아 센터     


초록 

사법 장치는 삶의 합리적 기획에 의존하는 일련의 규범처럼 보인다. 하지만 들뢰즈 뿐 아니라 흄과 카프카에 따르면, 이 장치는 이 체제의 불합리한 측면으로서 인식가능하다. 법은 하나의 꿈인가? 법은 주체와 무슨 관계인가? 만약 사법적 주체가 어떤 꿈 속에서 활동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 논문은 주체성의 토대와 법적 규범성과 주체의 연결들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목표로 하는 그와 같은 질문 주위에서 전개된다. 이때 규범성은 존중과 맹종(adherence)의 주요 형식으로서 복종을 요청한다. 이런 표면상의 자유와 창조적인 현재 안에서, 그것은 정보의 디지털 코드문서 위에 펼쳐지는 것으로서, 사유과 그것의 잠재적인 창조적 혁신 주변에서 점점 더 단단해지는 장애물들에 대한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 법/불법, 복종/불복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 사회적 관계의 체계에 대해, 주체들의 항구적이고 반복적인 형상에 여지를 주는 대신, 정동의 보다 넓은 잔여지대, 전횡의 행위적 예시들에 응답하는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연결들의 발견을 사유할 수 있는가? 

키워드: 정체성, 판결(판단), 통제, 꿈, 정동, 디지털      


I. 서론사법적 주체

레만(Rehmann, 2009)에 따르면, 후기-구조주의는 역사적으로 유럽 휴머니즘의 위기, 남근중심주의의 대한 비판 그리고 유럽 헤게모니의 전환에 뿌리박고 있다. 지배적 관계에 있어서 ‘본질성’(essentiality)에 기반한 위계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철학적 세대는 반-파시스트, 탈-공산주의자이자 포스트휴먼이다. 이들은 욕망에 따라 활동하는 덧없고, 비단일적인 주체라는 개념에 기대어 휴머니즘, 합리성 그리고 보편주의와 관련된 유럽 정체성의 고전적 정의를 거부했다. 

     

Rehmann, Jan (2009) I nietzscheani di sinistra. Deleuze, Foucault e ilpostmodernismo

들뢰즈는 전후 시기에 그의 저작들을 쓰기 시작했다. 유대인 학살과 광범위한 나치의 폭력의 와중에 그의 형이 죽었을 때, 들뢰즈도 그러한 역사에 연루되었다. 이때 그는 규범과 주체성의 관계에 대한 긴급한 성찰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주체와 그것의 세계 안에서의 위치, 그리고 여러 행위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내면화된 법에 복종하는 것에 관한 성찰이다. 더 나아가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 이것은 들뢰즈의 첫 번째 책에서부터 시작되는 최초의 질문이다 – 은 관건적인 것이 되었다.     

 

주체성에 대한 들뢰즈 초기의 성찰(Deleuze 1953a)은 물론 생성 중의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킴으로써 주체의 서구적 모델을 의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주체-의식성으로부터 생산성과 창조적 특이성으로, 필요와 결핍으로서의 욕망으로부터 기계와 인공적 욕망으로서의 정념의 경향성으로, 내면화된 규범으로부터 사회적 정념들과 정동들로 나아간다. 고대적 의식과 목적으로 돌아가는 서양 헤게모니의 전통,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는 인격성의 모델, 그리고 개체적 통일성의 재현은 붕괴하게 된다.  

    

들뢰즈(좌측)와 그의 형

플라톤적 모델은 개체와 정치적인 것(the politeia), 즉 권력, 질서, 법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개체화된 주체, 조직화된 신체에 구체화된 그것의 요소들은 어떤 기능, 규칙에 상응한다. 이것은 ‘oida’[οἶδα, ‘본다는 것’ 또는 ‘완전한 보임의 상태’, 여기서는 ‘감시’의 의미-역자]라고 하며, 시민-기구들의 총합으로서 개별적인 규범적 상태의 모델과 유비된다.     


공동체의 원형은 사회적 정체성을 믿는 것(identitarian)이다. 즉 상이한 개체들의 종합이자 ‘총체적’ 사회(하나의 신체로서)의 통일성은 하나의 ‘가치’로서의 위계를 보존하는 재현의 메카니즘에 의해 보증된다. 공동체는 법과 다르다고 간주되는데(그리고 그것의 신성한 기초에 있어서도), 이는 완전하며, 언제나 인간적 성취의 가능성 너머에 존재한다(사실상 종종 그 통일성은 ‘유실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의 유토피아로서, 완전태(entelecheia)로서 또는 영혼으로서 멀리 있거나, 과거이거나, 또는 미래이다.  

   

서구적 주체는 하나의 기초, 즉 아래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존재의 한 단위로서 총체적이며, 이는 우주[질서](the cosmos)에 상응한다. ‘주체/주제’ 개념은 대상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물/사태(Das Ding)를 의미하기도 하며, 논쟁, 의견 그리고 토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체/주제는 실재성을 규정하는 원리이며, 질서잡는 원리, 즉 부재하는 표상으로 드러난다(Natoli 2010).     


이러한 요소들 모두는 주체와 그 합법성의 이미지를 실어 나른다. 즉 합법적 주체는 항구성과 동일성에 의해 규정되어지고(욕망의 탈중심화 운동은 정체성의 경계들을 옮겨 놓는다), 따라서 그것은 토대에 관한 공준, 즉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과 일치한다.     


들뢰즈(좌), 사르트르(중), 푸코(우)

규범적 의식[양심]으로서의 주체는 서구 사유에서 법에 대한 이념과 더불어 태어났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감옥 안에서 죽기로 결정할 때의 그 법(the Law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주체성 – 의식성[양심]으로서 – 과 그의 사회-정치적 행위는 동시에 수립되고 정당화되며, 이에 따라 도시에 대한 법률적 위상, 즉 그 토대도 주어진다. 사법적 주체는 특이성의 교묘한 변형들을 넘어 어떤 지속하는 원리를 공식화하는 요청에 응답한다. 철학은 자주 지식과 정치적 삶이 그 위에서 수립되는 항구적인 특성에 기대어 존재의 생성을 가치절하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판단[판결](judgement, kirno, 판단, 실재의 종합)의 주체적[주제적] 기술을 의식적 태도를 가지고 정의할 필요가 있으며, 가치를 창조할 수도 있고 실재성[현실성]을 질서잡을 수도 있다.      


주체-인격 기관은 책임성과 해석의 중심으로 주체를 정립하는 사법 장치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어떤 토대적 규범에 기반한 법체계를 이론화한 켈젠(Kelsen)과 프로이트에 의해 구성된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법철학 체계와 정신분석 체계가 같은 맥락에서 동시에 공식화한 그러한 것과 결코 일치하지는 않는다.     

   

들뢰즈는 다양체를 하나의 통일성으로 묶어 내는 기초 규범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를 평가하는 권력의 위험한 부착물이기 때문이며, 폭력의 목표물이 되는 ‘희생양’으로부터 순수성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미, 그는 주체성의 모든 형태에서 실재-규제적(real-regulative) 이념(권력의 어떤 체계, 즉 어떤 정당에서의 경제적, 정신분석적 등등의 부분적 권력체계)이 되는 법의 이런 추상적 과정을 인지한다. 들뢰즈는 주체성의 본질에는 흥미가 없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인종적 우월성, 그리고 자연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원초적 본질이라는 개념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에 관한 들뢰즈적 성찰은 주체성을 특이성으로 변형하고, 그것을 제의들의 반복으로 제한하며, 생명의 혁신적 능력을 저하시키는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변론하는 소크라테스

   

II. 주체의 법정과 비영구적인 믿음

질 들뢰즈는 데이비드 흄의 사유에서 전통적 주체성에 대한 비판을 발견한다. 흄은 주체의 획일적 종합과 대조되는 어떤 패턴, 즉 그것의 개별적 통일성, 그리고 변형(metamorphosis)에서의 특이성을 바라본다. 흄에게서 주체의 동일성은 하나의 허구(fiction)이며, 허구는 연속적인 실재성의 관념이 정신의 의해 요구될 때 믿음의 특질들을 가정한다(Hume 1738–40). 그것은 표면적이고, 바닥 없으며, 관계들 안에서 외면화되는 맥락이자 만남들이다.      


흄은 들뢰즈가 권력을 사유하기 위한 참조점이다. 즉 왕은 타율적이고, 그는 스스로 합법성의 원천, 즉 초월적인 법에 놓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념의 평면에 놓여 있는 그것을 가지지 않는다. 사회적 신념[믿음]은 어떤 내재적 법이 없는 상상이다(이것은 사회적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추상적이지 않다). 이것은 왕을 형이상학적으로 근거지워진 주체로서 표상하기를 거부하고 관계적 방식으로 주체(그리고 주체들 간의 권력)를 사유하기 위한 것인 셈이다. 들뢰즈에게 권력[힘]이란 사회적 관계 안에서 특이성(singularity)으로 네트워킹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과 창조성이 개별적인 것이라기 보다 사회적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재평가해야 한다.      

주체 안의 항구성에 관한 생각은 실재적이지 않으며 허구적이다. 이것은 상상 속의 데이터를 연합하는 정신의 규칙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서, 그것들 간의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 관계는 관념들에게 외재적이다. 일상적 경험에서 만약 당신이 A를 보고 B를 기대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A와 B를 이어주는 것이 내재적이지 않다면 그 연결은 무엇인가? 흄의 대답은 ‘습관’이라는 것이다. 흄은 인과적인 도출에 관한 가설을 거부하고 질문을 습관과 믿음과 관련하여 제기한다. 따라서 환영적 관념과 믿음, 학문과 믿음 간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공간 안에서의 인접성(contiguity)이다. 인과율에 관한 믿음은 이러한 연결, 즉 앞에 오는 것과 뒤에 오는 것에 기반한 연결에 의해 수립된다.      


Gilles Deleuze, Empirisme et subjectivité :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1953)

      

습관이 반복에 의해 생산되는 반면, 믿음은 관념들의 생산에서 어떤 내적인 차이에 따라 생산된다. 믿음은 데카르트의 이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감각자료 너머의 관계들을 정립하는 어떤 확실한 원리로부터 나온다. 흄에게는 믿음에 우선하는 필연성의 확실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관념들이란 감각자료에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규칙들에 따라 생산된다. 다다른 말로 하나면, 믿음들은 내적인 지속성이나 상응을 위해 연합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믿음을 독단으로서, 즉 어떤 혼란되고 신뢰할 수 없는 모호한 인식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잠재력’(potentia)으로 강화한다.        


흄은 주체의 기반을 해체한다. 즉 그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됨으로써, 합법성과 복종의 원천으로서 원리의 원초적 지점을 함축하고 있는 ‘항구적’ 형상으로서의 그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정신은 불변하지 않으며, 보편적이지 않다. 그보다 우리는 마음의 정서들(affections)을 불석할 수 있으며, 이 정서는 정념적이면서 사회적일 수 있다. 주체성에 관한 첫 번째 질문부터 주체는 사라진다. 정서들은 탈중심화하는 힘을 가지고, 감각을 앞서가는 자아를 배제한다.     


흄의 탐구의 결과는 일련의 느낌들로 구성된 어떤 주체적 실재(entity)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와 타자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즉 욕망은 사회적이며, 관계적이고, 그리고 그 책략은 실증적, 발명적이며 사회적 행동을 생산한다. 느낌들 그리고 이미지들은 ‘공감’(sympathy)의 흐름에서 결합한다. 정동적 장은 결코 공생(symbiosis)으로 변환될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회를 접합하는 본질적이고 안정적인(항구적인) 지평이 탁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념은 제도들을 생산하지, 법적 원리를 생산하지 않으며, 다양성을 생산하지 희생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회적 장은 인력과 척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흄의 주체론의 기획이다. ‘내재적’인 것은 독립적인 범주, 즉 형이상학(순수한 것, 보여지는 것, 부재하는 것, 기초규범Grundnorm, 자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간 안에서 활동 중인 힘의 산출물로서 ‘외재적’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주체성과 사회의 단계 둘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반대로 양심에 기초한 정의 개념은 주체와 ‘자아의 법정’이라는 ‘내적’ 의도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즉 “억압은 법이 인간을 후원하는 제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으로 향할 때 발생한다”(Deleuze 1953b, 번역 수정). 들뢰즈는 서구 문화가 탄생시킨 모든 법정들을 거부한다. 무엇보다 칸트적인 그리고 프로이트적인 법정에 대해 그러하다. 주체 안으로 널리 퍼져 들어가는 법은 이미 억압의 도구이다.  

       

Deleuze vs. Kant
칸트는 법(THE LAW)이란 궁극적인 근거이거나 원리라고 천명함으로써 현대적 사유에 본질적인 차원을 부가했다. 법의 대상은 정의에 따르면 알려지지 않고 파악하기도 어렵다. [...] 확실히 법(THE LAW)은 그것의 순수 형식에 따라 정의하자면 [...]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작동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유죄인 위반[범죄]의 영역을 정의한다(Deleuze 1991: 83).     


칸트는 어떤 보편적 법칙에 따르는 이성의 명령과 일치하는 도덕법칙과 그것에 대한 복종을 공식화한다(Kant 1797). 보편적 법칙은 주체들의 내면을 향하며, 그것은 반드시 일관된 행위를 뒤따르게 해야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의’ 법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 보다 우리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이념을 위해, 그것이 실재하든 그렇지 않든지 상관 없이, 우리 자신의 안을 들여다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적 범례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을 창조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도덕을 수립할 수 있는 어떤 실재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법은 상징적 가치를 가지며 공동체를 (하나의 전체로서, 주체로서) 응집력 있게 유지한다. 왜냐하면 법이 그런 가치들을 재현하기 때문이다(공동체적 통일성은 인지되지 않는 자들을 배제하고 판결[판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들뢰즈의 또 다른 관심사는 프로이트적 사유의 해체를 겨냥하는 바, 이 사유는 주체를 정상화하는 규범적 사유, 그것이 불안정성을 치유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프레임 안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이트에게 초월적 질서는 주체에 내재적으로 된다. 들뢰즈는 1950년대 이래 프로이트의 법에 관한 주제를 취급해 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념들의 무질서는 주체의 쾌락 원리를 위한 탐구에 의해 유도되는 주체의 무능력에 따라 발생된다.      


프로이트적 초자아의 발견은 주체 안에 있는 법정의 이념을 강화한다. 사실상 초자아는 전반적인 프로이트적 분석을 법의 장으로 옮겨 놓는다. 거기에는 주체의 어떤 제도, 사법적 토대, ‘욕동’(Trieb)이 기소되어야 하는 법정이 존재한다. 초자아는 ‘욕동’의 단념이나 그것의 교화라는 의미에서 법을 가동한다. 판결은 형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방법에 따르면, 치료는 주체가 저절로 공식화하는 의견으로부터 비롯되며, 스스로의 실수를 인지하고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주체의 법(주체 안으로 투사되는 통일적인 원리)은 안전의 약속을 재현하는 질서잡힌 사회의 이념을 산출하지만, 차이를 희생양 삼고, 제의를 반복하는 메커니즘으로부터 그리고 판결(판단)을 경우하여 작동한다. 이 도식은 경향들에 기반한 ‘열린 사회’에 반대되는, 새로움과 창의성을 제한하는 베르그송의 ‘닫힌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Bergson 1932).      


Sigmund Freud(1856-1939)

III. 판결(판단)

판결(판단)은 법(the Law)의 주요 표현이다. 오늘날과 같이 특별히 디지털 소셜 미디어에 의해 문명화된 상태에서, 항구적인 노출은 타자의 판결 대상이 있는 곳에 존재하며, 자기와 타자에 대한 판결은 주권자의 법적 행위의 지속을 재현한다.     


오늘날의 행정적 기술(그리고 그것의 정신성)은 과거의 재현 단계를 넘어서지만, 주권성 자체와 그것의 기구들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오늘날 권력은 수요를 통해, 시장을 먹여 살리고 판결적 사회화(디지털 통제는 어떤 중립적 기구가 아니다.)의 형식을 퍼트림으로써 주체[종속]화의 과정과 새로운 연결을 수립한다. 사법적 실행으로서의 판결은 여전히 활발히 작동 중이며,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수준들은 그것으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법의 문제는 행위를 관장하는 일련의 규칙들로, 단순히 외적인 실행들로 고려될 수 없고, 하나의 원리, 즉 기초규범(Grundnorm)으로서, 차이의 ‘하나로의 회귀’(reductio ad unum)를 내세우는 그러한 원리이다. 그것은 내면화되었으며 인터넷 위의 주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행된다(Landolfi 2016).     


판결(판단)은 재판정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추문에 대한 미디어 재판도 있다. 이것은 리얼리티 예능 쇼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심판하는 인기있는 재판관들의 경우에서처럼 오로지 인상들과 감성에 빠져 움직이는 것과 같다. 주체적[종속적] 규범은 우리 행위를 지배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들과 믿음들을 지배하기 위해 내면화된다. 이 규범은 인공적이며, 심지어 우리의 정서들(emotions)의 자연스러움을 예상했을 때조차, 특히 만약 그것들이 정치적 도식을 위한 것일 때 더 그러하다. 따라서 정동의 흐름은 양심의 판단보다 더 넓은 어떤 것이며, 다양체를 분류하기 위한 사회적 의미화들을 정의하고 분리하며 사회의 위계적 모델을 건설하는 자아의 완고한 도식들을 흩어 버릴 수 있다. 위험은 표준화된 인간성의 예측가능하고 공인된 모델들을 생산하는 것, 즉 심리적 결정론이다. 나는 이것을 인지적이면서 정동적인 ‘심리 폐색’(psychic enclosure)으로 부르고자 한다. 우리 뇌에 관한 디지털 연구는 정신이 상징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적이라는 것을 확증한다. 그것은 혼란스런 데이터 꾸러미들의 가속적인 연결을 통해 작동하며, 규범-자율적인 연합 양태들을 야기한다. 어떤 사유도, 어떤 정서적 상태도 받아들이지 않는 기존 판결(판단) 행위로서의 판결(판단) 메커니즘을 어떤 위기 상태로 가져 가면서, 심리적 수준을 개방적이며 미결정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유용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판결(판단)은 선실존하는 기준을 가정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재판의 기준에 부합함으로써, 언제 어떤 새로움이 기존의 실재 안에 발생하는지에 관한 깨달음은 제한된다. 다시 말해 판결(판단)은 어떠한 새로운 실존양태의 도착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진술을 토대로, 이것이 하나의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실존하게 하는 것, 즉 판결(판단)하지 않는 것. 주체가 지각적, 인지적 그리고 정동적 수준들에서 행정권력[정부] 기구들에 정서적으로 연루되는 것(오늘날에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이것이 매개된다)에 대한 성찰은 유용하다. 그 목표는 ‘재판’ 기구들을 알아채고, 우리에게 억압적인 권위주의의 필연성을 납득시키려 하는 정동적이고 인지적인 술책이라는 고도의 위험에 대해 질문하는 가능한 방식이 어느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파국을 생산하는 모델들로부터 우리의 삶을 탈식민화해야 할 것이다. 창의적이지만 내면화되지 않은 정동성은 생산적인 만족감의 공간들을 열어 놓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결합들을 증진한다. 이것은 외적 연결들에 속한 경험주의적 장으로서, 계통발생적 도식들을 생산하는 인과적 추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새로운 가능성들에 개방되어 있다. 판결(판단)적 가치를 생산하는 대신, 주체는 상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바, 이때 법 질서의 내면화 기제는 어떤 문화적 구성물, 즉 때때로 유용해질 수 있는 상상력의 활동이지, 정신 활동들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이다. 이성은 하나의 사법적 실재다.     


존 프로테비와 그의 책
많은 철학자들에게, 이성적인 인지적 주체는 우리 자신의 본질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판단(판결)이 측정되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윤리적 목적인 인식론적 표준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상황 안에 이성적 주체들이 존재한다면, 그 주체들이 행위할 만한 방식을 행하기 위해 결합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많은 다른 철학자들에게 – 좌파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거의 – 이 주체의 관념은 잘해 봐야 비역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이며, 구체적 삶으로부터 나온 앙상한 추상물이고 최악으로는 하나의 속임수이고, 정치적 억압에 활용될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성적이지만, 너는 감정적이고, 그래서 넌 그냥 입 닥치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해야 한다.’(Protevi 2009: 3)    

  

인간적 느낌들과 판단(판결)에 관한 부정적 개념은, 권위(auctoritas)를 사람들 사이의 추정된 혼돈 위에 부과함으로써, 피라미드 구조에 질서를 가져다 준다. 다른 한편으로 감응(affectus, 정동)은 어떤 위계도 설정함이 없이 연결하고 조직한다. 내 생각에 탈주선은 하나나 다른 모델들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들을 상실하는 것에 놓여 있다. 하지만 편파적이고 불안정한 정동들을 위한 공간을 내어 주면서, 그것은 연결들 자체를 앞서가는 어떠한 법에도 복종함이 없이 조합적인 메카니즘들을 생산한다.      


주류 모델은 ‘정서적 판단’을 하는 자로서, 그는 디지털 미디어를 거쳐, 즉 어떤 꿈과 같이 정서적 수준을 침투하는 감각들과 아이콘적 언어를 통해 규범들을 공유한다. 우리 의식의 판결(판단) 기능이 우리의 내향성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회화된 가장 중요한 가치로 고려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용인된 주체가 생산된다.      


IV. 정동[감응]-이미지/정서-판단(판결])(Affectus-Image/Emotion-Judgement)

정동적 주체가 과거 수세기 동안 토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우리가 목도하는 거대한 주체성의 전환이라는 사실 안에 새로운 것이 놓여있다. 왜냐하면 디지털 기술에 의한 상호작용은 지각과 의식지각(awareness)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으며, 심신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틀이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응(정동, affect)과 변용(정서, affection)을 사유하기 위한 핵심 참조점은 사실상 들뢰즈로부터 온다(Deleuze 1981). 변용(정서)는 거기서 지각의 문제로 펼쳐진다. 즉 그것은 지각운동적(감각운동적, sensorimotor, Angelucci 2012)인 것이고, 이미지나 관념을 예상하지만,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변환적(transitive)인 것이지, 지시적이거나 재현적이지 않으며, 이미지는 삶의 수준에서 경험되는 것으로서, 상태의 차이, 즉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 사이에 있는 변화의 차이를 포함하는 것이다. 감응(정동)은 이미지의 변형을 포함하고 행위의 힘을 함축한다. [이때] 스피노자의 사유는 매우 중요하며 데카르트 『성찰』(Descartes 1646)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감응(정동)과 비교한다면 보다 분명해 진다. 거기서 우리는 변용(정서)-이미지, 의지-행동 그리고 판단(판결) 사이의 차이를 보게 된다. 변용(정서)의 영역은 의지-행위의 그것이 아니다. 그리고 판단(판결)은 사물/사태의 이미지들(이를테면 키메라의 이미지)를 함축하는 변용(정서)의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욕망하는-행위’와 함께 가는 변용(정서)은, 그것들이 상상력에 속하기 때문에, 참이나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래로, 이미지들과의 단순 조응을 ‘넘어 갈’ 수 있는 어떤 인식론적 도구를 수립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되었는데, 그것은 참과 거짓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실수를 허용하지 않으며, 판단(판결)을 위한 능력은 정신 안에 정립되어야만 한다.      

Martha  Nussbaum(1947-   )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변용(정서)은 행위들, 판단(판결)들과는 차이나는 것으로 보이며, 판단(판결)은 정동적이고 의지적인 요소들을 포함하지 않는 어떤 것, 어떤 순수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 스피노자에게서 감응(정동, affectus) 개념은 행위의 힘과 연결된다. 칸트에 따르면, 판단(판결)는 모든 사유하는 존재자에 공통되는 의식의 논리적 기능이다. 하지만 흄은 판단(판결)과 믿음 사이의 연결을 주장하며, 때문에 흄을 따르는 들뢰즈는 ‘꿈으로부터 태어나는’ 판단(판결)의 부적격성을 소환한다. 판단(판결)을 허물기 위해 들뢰즈는 아폴로가 판단(판결)의 신인 동시에 꿈의 신이라고 말한다. 감응(정동)은 꿈의 왕국은 아니지만,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의 왕국이다. 그것은 판단(판결) 너머 행위의 힘을 응축하지 않지만, 그것을 함축한다.      


점차적으로 감응(정동), 변용(정서)-이미지과 의지-행위로부터 판단(판결)을 분리하는 현대적인 논리적 도식에서 전형적인 이론적 모델은 많은 비난들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효과적이다.      


나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철학이 판단(판결)과 불확정적인 감응(정동)의 잠재성 간의 대조에 대해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누스바움이 행하는 이론적 작업은 매우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가 무엇이 정서들, 정동(감응, affectus) 그리고 판단(판결)의 ‘선언 체제’(enunciation regime)일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누스바움에게서는 정서의 관념은 판단(판결)과 깊숙이 결합되어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즉 이것은 어떤 중립적인 확언이 아닌 것이다. 사실상 정서와 판단(판결)의 관계는 정서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느낌으로 규정하며,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의 한 모델로 드러난다. 『사유의 격변』(Upheavals of Thought)[한국어판은 『감정의 격동』]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나의 논증의 목적은 정서가 중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판결)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판단은 – 우리의 행복을 위해 –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는 바,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서 욕구되는 것으로 그것을 인지하는 가운데 행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사물/사태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낸다(Nussbaum 2003: 19).           


누스바움은 문제는 통제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정념의 영역을 통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누스바움은 “정서가 판단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대신”(Nussbaum 2003: 21) 정서가 하나의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을 공격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만약 정서가 하나의 믿음이라면, 그때 그것은 통제, 재생산성, 정의 그리고 자기-전개, 즉 자기-강화의 특성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혼란스러워진 노동자(이를테면, 생물경제학에서 정동은 정말 비싸다!)의 ‘거래비용’을 낮추기 위해 우리의 신체에 속한 하드웨어에 접근하는 정당한 ‘인지적’ 소프트웨어를 획득함으로써만 실행될 수 있다. 선언들(enunciations)은 인간원자료(즉 오늘날 심리적인 것이라고 지칭되는 상품관 관련되는 사물들)의 상호거래 비용을 채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기분, 오해, 불화 같은 것이다.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과정들은 생산적 거래비용들을 위해 표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들뢰즈가 했던 대로, ‘하나의 꿈으로서 판단(판결)’와 정서-판단(판결)의 선언을 대조할 수 있다. 「판결을 종결하기 위해」(‘To Have Done with Judgment’)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는다.  

    

Franz Kafka(1883-1924)
판단(판결)의 세계는 꿈 속에서 스스로를 수립한다. [...] 꿈 속에서, 판결은, 지식이나 경험의 긴급함들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어떤 환경의 저항과 조우하지 않으면서,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이것이 우리가 꿈을 꾸든 그렇지 않든, 판결에 관한 의문이 우선은 인식하는 것인 이유이다. 나아가 아폴로는 판결의 신이기도 하고 꿈의 신이기도 하다. 아폴로는 판결하는 자, 즉 유기적인 형식으로 우리에게 한계와 구속을 부과하는 자이다. 삶을 판결받은 그 이름이라는 형식들 안에서 삶을 저당잡힌 것은 꿈이다. 꿈은 벽을 건설하고, 죽음을 먹여 살리며, 그늘을 창조한다. 모든 것과 세계의 그늘, 우리 자신의 그늘들 [...] 꿈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가지는 그룹들, 예컨대 정신분석학자들 또는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찬가지로 재빨리 실재를 판결하고 처벌하는 법정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꿈 속에서 출몰하는 구역질나는 미치광이(Deleuze 1997: 130).   

  

들뢰즈는 판결의 법령이 실재로 꿈이라는 것, 판결이란 삶을 포획하고 죽음을 먹여 살리는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논증한다. 꿈은 또한 공준들에 의해 지배되며 적용받는다(이를테면, 아메리칸 드림). 문제는 실재에 대한 효과다. 즉 제도화된 판결을 실행하는 법정의 수립이 그것이다. 하지만 만약 ‘죄형재판주의’(재판 없이는 죄가 없다.nulla poena sine judicio)(그리고 ‘죄형법정주의’sine lege)가 있다면, 그때 우리는 모토를 뒤집을 수 있으며 ‘죄가 없이는 재판이 없다(그리고 법도 없다)’(nullum judicium (and “nulla lex”) sine poena)라고 논증한다. 판결(그리고 법)은 형벌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   

   

들뢰즈는 카프카를 소환한다. “나는 나의 옷 입은 몸을 보낼 것이지만 그 동안에 나는 노란 갈색의 담요로 덮힌 내 침대 안에 누워있다”(Deleuze 1997: 130). 이 몽유병자들의 증식은 사이보그와 닮은 어떤 이미지처럼 보인다. 이것은 새로운 주체성의 매력적인 이미지이며, 탈-생물학적 문턱에 대해 성찰하며, 여기서 디지털을 통해 우리는 물론 위험에 처할 것이고, 정서적 식민화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을 살필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놀라게 하는 명확성’을 몽유병자들처럼 가로질러 가는 우리의 정서(변용)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리고 판결없는 사회적 세계를 건설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운 감응적(정동적) 주체들이다.    


논문 저자: 클라우디아 란돌피

논문저자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 참조: https://www.edizionipaguro.it/?mc_tk=TFpXSy18FBsWNSQAJHkvEzQaLxceYAsELCUzOSgxPzYwKzwyDFkzOy5VBzAmHwgsB1BICB8eT0JETUU=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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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gson, Henri (1932)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F. Alcan.

Deleuze, Gilles (1953a) 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Deleuze, Gilles (1953b) Instinct et institutions, Paris: Hachette.

Deleuze, Gilles (1981)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Paris: Éditions de Minuit.

Deleuze, Gilles (1991) Coldness and Cruelty, New York: Zone Books.

Deleuze, Gilles (1997) ‘To Have Done with Judgement’, in Essays Critical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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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artes, René (1646)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ed. Michel Soly, Paris.

Hume, David (1738–40) Treatise on Human Nature, ed. John Noon, London.

Kant, Immanuel (1797) Die Metaphysik der Sitten, Koünigsberg: bey F. Nicolovius.

Landolfi, Claudia (2016) The Digital Governmentalisation of Emotions, F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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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oli, Salvatore (2010) Soggetto e fondamento, Milan: Feltrinelli.

Nussbaum, Martha C. (2003) Upheavals of Thought: The Intelligence of Emo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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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vi, John (2009) Political Affect: Connecting the Social and the So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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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hmann, Jan (2009) I nietzscheani di sinistra. Deleuze, Foucault e 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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