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 일하는 것에 최적화된 회사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회사가 있다. 아니, 정말 있다. 회사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조금 정리해 보았다. 일을 시작한 지는 삼 주 밖에 되지 않은 신입이지만, 신기함과 초심을 잃기 전에 기록해보려고 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 직원은 800명이 조금 넘는데, 이 중 사무실에 출근하는 10%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본인의 집에서 일을 한다. 이 중 상당수는 디지털노마드로 생활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직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통계를 내지는 않아서 어느 나라에 얼마나 가서 살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신기하게도 이 많은 인원이 전 세계에서 노트북 하나에 의지해서 일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회사가 굉장히 잘 굴러간다. 회사 대부분의 사람과는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컨퍼런스 콜을 켜도 카메라 끄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회사 면접, 채용, 연수, 실제 업무에 이르기까지 얼굴 모르고도 일이 잘만 굴러간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가 얼굴 전혀 안 보고 굴러갈 정도면 나는 왜 한국에서 사무실에 그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 쌩고생을 했단 말인가, 왜 우리는 그렇게 멀리까지 출장을 가서 굳이 얼굴 보고 이야기했었어야만 했나라는 생각이 이제는 진심으로 든다.
원격이어서 특별한 우리 회사만의 특징들을 몇 가지 얘기해보자면..
회사에서 채용을 결정한 지 정확히 4일째, 집에 택배로 미국에서 맥북프로가 날아왔다. 세상에. 통도 크지. 심지어 코로나가 터졌는데도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별로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보내줬다. 소중히 여기라느니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괜한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미국에서는 다음날 받아볼 수 있다고 한다. 새삼 이 쿨함에 멋짐이 느껴졌다.
더 멋있는 건 노트북이 혹시나 망가질 경우에 보안 문제 때문에 수리를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바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트북을 다음날 바로 보내준다고 한다.. 망가진 노트북은 회사에서 수거한다. 아, 멋지다..
원격 회사인데 IT 회사라는 말인즉슨 일을 시작할 때 엄청나게 많은 툴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보안 때문에 우선 회사 노트북으로 개인 계정에 접근하거나, 반대로 개인 노트북에서 회사 일을 보면 절대 안 되지만, 덕분에 워라밸이 확실히 지켜지는 장점은 있다. 일단 노트북을 받으면 VPN이라는 회사 사내망에 접근하는 앱부터 깔게 되고, 사내망에 접속한 뒤에 다양한 다른 툴들에 접근할 수가 있게 된다. 커뮤니케이션 툴만 5개 정도 있는 것 같고 (일상용, 대외용, 대외용 2, 보안 유지용, 화상 미팅용), 이외에도 회사 내부 백과사전, 내부 어드민 등 등 다양한 이 회사만의 툴들이 있어서 초반 일주일은 툴만 익히고 설정하다가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이 수백 명이 원격으로 일하는데 보안 문제가 없었다니, 역으로 말해서 툴만 잘 쓰면 보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너무너무 좋은 문화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뭔가 업무와 일상의 경계가 흐려서, 입사하는 순간 휴대폰 번호와 함께 카톡까지 모두에게 공개된다. 심지어 업무마저 카톡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꽤나 많은데, 이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말에도 연락이 온다던지, 놀러 가면 모두들 알게 된다던지, 누구네 애인이 어떻게 생겼다던지 등 등의 회사에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어쩔 수 없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경우가 많다. 카톡의 특성상.. 알지 않는가. 이게 일이기 때문에 '남보다 못한 사이'지만 누구보다 좋은 관계를 업무상 유지해야 하는 그런 우리의 끈끈한(?) 관계상 대답은 해야 한다. 가식적인 관심도 연기해내야 하고, 굉장히 쓸데없는 감정 노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꽤나 있는데 이렇게 아예 "본인 연락처 공개하지 마세요"라고 회사에서 원천 차단해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다면 슬랙이나 이메일로 이야기하고, 좀 깊이 이야기하고 싶으면 별도로 화상 미팅을 예약한 뒤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은 것 같다.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는 것의 장점들>
- 별로 관심받지 않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사생활에 간섭받지 않아도 된다. (묻는 사람도 없다)
- 업무 외 시간에는 전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원천 차단! 워라벨은 여기서 시작된다. 단순히 일 안 하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업무 시간 외에는 일 생각 자체를 안 하게 해 달라고.
-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일에 집중할 수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오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일정을 조절할 수가 있기 때문에 내 업무를 볼 때는 업무를 보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업무 시간 중에도 개인 업무(요리를 한다던지, 커피 한 잔 한다던지 등 등)를 보고 그에 조절해서 근무하면 된다. 행복하다..
놀라우리만치 모든 게 문서화되어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각에 대한 세부 매뉴얼이 전부 글로 정리되어 있다. 그냥 정리된 수준이 아니라 시시콜콜 별 얘기가 다 적혀 있다. 회사 사내망을 통해 접속하면 사내 위키피디아 같은 백과사전 사이트가 있어 누군가 질문을 할 때나 혹은 공지나 교육을 해야 할 때 링크 하나 던져주면 다인 경우가 많다. 그 수 백 가지 글들 정리하느라 애간 애쓴 게 아닐 테지만, 그로 인해 줄어드는 공수를 생각하면 정말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 명확하게 정답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신입의 입장에서는 속이 좀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처음 온 신입을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을 테니. 몰라도 모른다고 하기 눈치 보이는 게 직장인데, 여기서는 그냥 백과사전 뒤지면 다 나온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아무도 나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하라는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다. 그냥 첫날부터 해야 할 일 목록만 던져준다. 모르겠으면 물어보고, 백과사전 찾아보고. 업무는 있는데 스케줄과 하는 방법은 전부 알아서 찾아서 하는 방식이다. 안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 해외 기업 특성상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두다가 진짜 일 안 하면 조용히 자르겠지만. 좋은 건 적어도 간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때부터 남의 잔소리는 한 마디도 못 듣고 있던 탓에 독학으로 대부분의 과목을 클리어한 사람으로서.. 행복한 곳이다.
대게 그렇지 않나. 9 to 6. 아침에 오면 업무 보고부터 하고.. 몇 시부터 몇 시에 거래처 미팅하고.. 몇 시에 팀 회의하고.. 저녁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고 등 등. 회사에서 대략의 타임 프레임은 정해주는 느낌인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다. 애초에 전 세계에 직원들이 전부 퍼져 있다 보니 일괄적으로 같은 시간에 일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본인의 업무 시간을 직접 고른다. 이를테면, 저는 8 to 5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수요일에는 늦잠 자고 싶으니 1 to 9 하겠습니다. 아니면, 저는 피에스타를 해야 해서 9 to 12, 그리고 3 to 8 하겠습니다. 이런 게 가능한 식이다. 업무 요청만 처리하면 되고, 회의도 거의 없이 슬랙이나 문서로 처리하기 때문에 미리 알려주기만 하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하면 된다.
내 사수는 콜롬비아라는 남미의 한 나라를 여행 중인 디지털 노마드다. 원래는 캘리포니아 사람이라는데, 남미를 여행한지는 1년이 다 되어간다고 한다.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격리 중이기는 하지만 페루,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여행했다고 한다. 사수라고는 하지만 딱히 분위기 잡고 그런 것 없이 진짜 그냥 일주일에 한 번 근황 토크하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애초에 회사의 톱 3 규율 중 하나가 수평적 문화인데, 이게 정말로 실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압박하고, 스트레스 주고, 심지어는 지시를 내린다던지 묻지도 않은 충고를 해준다던지 하는 그런 쓸데없이 친밀한(?) 문화가 전혀 없다. 요청하기 전에는 푸시하지 않는다. 채용 면접을 진행할 때부터 면접관이 자기 집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스몰 토크하는 느낌으로 진행됐는데 (진짜 자기 집이었다), 역시나 업무에서도 계속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다. 실제로 회사에서는 수직적 문화를 강요하거나 꼰대 짓하는 사람을 '문화 부적격'이라는 사유로 주기적으로 쫓아낸다고 한다.
이것도 꽤나 신선했는데, 물론 큰 틀에서 나의 직무는 정해져 있지만, 이 팀 내에서 하고 싶은 일은 내가 고르면 된다고 한다. 신입은 회사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사수를 붙여주는데, 사수는 내가 내 적성을 잘 살릴 수 있는 부서로 배정받을 수 있게 같이 상의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수가 와서 이것저것 제안해준다던지, 뭐가 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물어봐준다. 친절함에 애간장이 녹을 것 같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디지털 노마드 회사라서 가능한 점. 어느 나라를 가도 이 회사 직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장점을 활용해서 여행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콜롬비아에서 칠레를 가는데, 가기 전에 슬랙 단톡 방에 물어보는 식이다. "지금 칠레 있는 사람~~~?"이라고 하나 올려두면 댓글로 여기저기서 알려주고 단톡 방에 초대해준다. "앨리스 칠레에 있으니까 만나봐!" 그리고 곧 앨리스한테 메시지가 온다. 칠레 오면 만나자고. 이렇게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나서 같이 술 한 잔 하고 논다고 하는데, 코로나가 풀리는 즉시 나도 어딘가로 날아갈 예정이다. 회사에 입사했는데 전 세계 친구를 얻은 느낌이다.
보통의 회사에서는 "아, 너무 힘들다. 나도 퇴사하고 여행이나 갈까"라는 말에 "저는 그래서 이번 연휴에 발리로 가요"라고 대답하는 이런 대화들이 종종 이루어지고는 하는데, 이 회사에서는 수시로 여행 후기 및 추천이 올라온다. "나 발리에서 살아봤는데 너무 좋더라. 연말에 우리 발리에서 모일까?" (실제로 오프라인 회사 밋업이 발리에서 기획되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보통 회사들에서는 이 장기 여행이라는 게 퇴사하고서나 가능하거나 혹은 연차를 몰빵 해서 써야 간신히 일주일 정도 여행할 수 있는 거라면, 이 회사에서는 이게 일상이라는 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음 여행지를 정하고, 이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거기서 또 그렇게 관광하며 일을 이어간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온몸에 애사심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재택근무를 하는 모든 직원들에게 입사 이후 3개월이 지나면 현금으로 약 300만 원 정도를 홈오피스 만드는 용도로 쏴준다고 한다. 사무실이 없으니 대신 집을 잘 꾸며서 일하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라는 취지인데, 가장 좋은 부분은 이 돈, 아무 데나 써도 된다는 것이다. 비용 내역을 정산하거나 증빙할 필요도 없고, 뭐 원하면 슬랙에 자랑 글은 올려도 된다고 한다...(!!) 실제로 슬랙에는 자기 홈오피스 자랑하는 채널이 따로 있다.
이 회사의 최대 장점이다. 업무량만 소화한다면 마음껏 유급휴가를 받을 수가 있다. 제한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가족 문제로 인해 한 달 넘게 유급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장기 휴가를 내서는 안 되겠지만, 상식적으로 이해 가는 선이면 그냥 사수한테 말하고, 사내 시스템에 올린 이후에 쉬면 된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전 세계 직원이 있기 때문에, 공휴일을 챙길 수가 없어서 - 알아서 쉬어라라는 취지인데, 회사에서는 평균적으로 연간 25일 이상은 알아서 쉬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상,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여태 느낀 이 회사의 장점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사실 단점은 아직 잘 모르겠다. 음. 세금 문제가 좀 머리 아프다는 것 정도? (한국에 법인이 없는 외국 회사에서 월급을 받지만 물리적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경우에 대한 규정은 찾기가 너무 힘들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세무사랑 이야기해 보는 중이다.) 이외에는 세계 여행하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라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다닐 만한 것 같다. (그런데 월급도 잘 주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일도 쉽고 복지도 좋고.. 별천지 그 자체다.) 회사 영업 글은 아니지만 이런 회사도 정말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너무 좋아서 이상하다고 이야기해줬는데, 실제로 회사 평점 등을 보면 거의 만점에 가깝고, 회사 안에서도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배우자가 일하는 것을 보고 너무 좋아 보여서 옮겼다고 한다. (3주 동안 벌써 세 커플 봤다.)
조만간 또 회사 생활에 대해 중간 리뷰를 남겨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