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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정 Cathy K Jul 19. 2021

좋아하는 걸 찾아 방황해도 될까요?

비록 엄마가 말하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1 전에 제주살이 때 써놓고 발행하지 않았던 묵힌 글입니다.

정말로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내려왔다. 서울은 비가 많이 온다던데, 햇살 가득한 모습으로 반겨준 제주도는 여유만 한가득 넘쳤다. 강남에서만 평생 살던 사람이 시골길의 조용하고 여유로운 정취를 맛보았을  느끼던  해방감이란. 우거진 청록과 굽이 굽은 드라이브  위에는 자전거들과 오토바이들이 간혹 지나가며 인사를 전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천천히 바이크를 타고 제주도까지 내려왔다

남들은 겉모습만 보고서는 대부분 나를 도시 사람, 도도한 유학파(아님)로 생각하지만, 실상 내 몸 깊은 한구석에는 자유로운 히피가 자리 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나는 히피로 태어난 것인데 어쩌다 보니 서울,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강남에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강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높은 인구 밀도와 밤까지 빛나는 화려한 불빛 아니던가. 멀리서 보면 참으로 멋진 야경이 되지만,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밤이면 빛나는 불빛들이 숨 막히게 답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잠 못 이루고 공부하고, 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치열한 자본주의 무한경쟁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강남 8 학군 출신. 탑 3 자사고. 탑 3 대학교. 어찌 보면 화려할지 모르는 몇 줄의 스펙들을 얻기 위해 나는 항상 자습실에 처박혀 있었다. 학교에서도 남들이 말하는 소소한 추억보다도 언제나 자습실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던 기억이 먼저 난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도 항상 오늘 다하지 못한 공부, 그리고 내일 해야 하는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내 옆에 나보다 늦게 자는 저 아이를 내심 견제했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혹여나 뒤처질까 항상 불안해했다. 대학에 간 뒤에는 모든 게 달라진다고 했건만, 달라진 건 내 나이 앞자리 숫자와 점점 늘어나는 술자리뿐이었다. 치열한 경쟁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지금 이 시기를 지나는 친구 혹은 동료 그 이전에 언제나 경쟁 상대로 여기며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무렵, 한 스타트업에 꽂혀 인턴을 하고자 했을 때 나를 아끼던 선배가 송도까지 나를 찾아와 말렸다.

"그런 작은 회사에 가서 뭘 하려고? 나중에 대기업 가거나 로스쿨 가려면, 지금부터 학점 관리해야 하는 것 몰라? 방학 때도 그렇게 놀면 안 돼. 봉사 활동을 하던지, 대기업 계열의 기업에서 인턴을 해야 나중에 유리하다고. 자격증을 따던지 말이야. 그걸 왜 하려는 거야?"


너무도 흔해빠진. 항상 들어오던 식의 말들에 숨이 턱 막혀왔다.

'남들을 이기려면, 낭비할 시간이 없어.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그걸 하기만 하면 돼. 왜 남들과 다르게 하려고 하는 거야?'


그 이면을 조금 살펴보면 상당히 콧대 높은 전제가 하나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인생에 '정답'이 존재한다는 것. 네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이 '정답'대로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무적의 논리가 숨어있다. 취향이니 적성이니 꿈이니 하는 소리가 다 무슨 소용인가. 행복해지려면 우린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무조건 '남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미 정해진 답이 있는 세계 속에서 나는 끝없이 답답했었다.


내가 작은 기업에서 인턴을 하려 했을 때에도, 22살에 첫 창업을 했을 때에도. 주변에서는 '공부 안 하고 왜 헛짓거리 하느냐'라는 질타 외에는 크게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때때로 정말 힘든 때가 있어 '힘들다' 이야기를 꺼내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이야기는 "그러게 누가 그런 걸 하랬어", "바보 같네,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하냐" 정도의 걱정을 가장한 질타와 한심하게 보는 눈빛이었다. 그런 것들이 그 시기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아무도 나를 지지해주지 않고 나 홀로 간다는 그 느낌이 견디기 어려웠다. 나만 그만두면 끝이라는 허무함 그리고 약간의 비장함 속에서 조금은 외롭게, 아니 사실은 많이 외롭게 걸어왔던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이렇게 정답 밖을 걷는 사람들을 '은따'시킨다. 조용히 지켜보며 거리를 둔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선을 두고, 높고 견고한 벽을 지어 구분시킨다. 그리고 이 벽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저 밖은 지옥이니, 나가면 큰일 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정답'을 걷는 사람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답을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혹독하게 벌을 준다. 대놓고 돌아오는 시선과 따가운 눈초리들은 아마 내가 철면피가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오지도 않을 미래의 보상으로 끝없이 희망고문 당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 지난 5년 간 직업만 몇 번을 바꿨는지, 몇 번째 창업인지, 몇 번째 도시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내 삶은 짧은 시간 안에 극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도시를 바꿀 때 누군가는 내게 역마살이 끼었다고 했고, 직업을 바꿀 때 누군가는 내게 참을성이 부족하다 말했다. 사실 나는 지난 10년간 잃어버린 내 자아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지난 10년 간, 우린 선생님이, 우리 엄마가 말해준 그대로 나를 정의하고 살아왔으므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공부만 한 모범생일수록 정도가 더 하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10년', 공부에 저당 잡힌 시간들에 의해 우린 생각할 시간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사회의 정답을 밟고 있는 '잘 나가는 인생'의 실상이란


고로 우리에게는 취향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맬 자유. 방황할 자유가 필요하다. 이것저것 해보고, 맞는 것은 해보고, 안 맞는 것은 버릴 수 있는 자유. 우리에게 그 정도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100년이나 사는 삶, 10년 정도 공부했다면. 앞으로 살 30년 정도는 내가 정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이다.


방황하는 시간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속에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때때로 금수저의 여유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돈이 많기 때문에, 부모님이 지원을 잘해주셔서, 로스쿨 혹은 대기업에 가지 않으려 하는구나.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그렇게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내 현실이 그런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휴대폰 요금을 낼 돈이 없어서 3달 동안 수신 전화만 받으며 산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좋았으니까.


이 시간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하나, 내 지난 시간에 대한 깊은 후회였다. 나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을 생각까지 하며 공부만 해온 지난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나은 기억 하나조차 없이 면학실에서 공부하는 기억뿐이던 그 10년의 세월을 내 한 줄짜리 대학 졸업장이 보상해주는지 의문스러웠다. 사실 대학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죽은 학문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가 그곳에 다니는 4년 간 얻는 것은 거진 졸업장이라는 문서 한 장 정도가 다라고 생각한다. 이 종이 한 장은 또 다른 남들보다 조금 나은 자리 하나를 얻는데 쓰일 뿐, 내 지나간 시간에 대해 보상해주는 이는 그 누구도 없다. 나의 경우에는 행복 대신 후회만 깊이 남았을 뿐이었고,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는 증오 어린 다짐만 생겼을 뿐이었다.


지난 5 간의  삶은 수많은 여행, 창업, 실패 등으로 얼룩져 남들이 말하는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지만,  결과 나는 현재 누구보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따스한 햇살이 드는 바닷가 집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텃밭을 일구며, 고양이  마리와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향이 좋은 커피  잔을 마시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헤매고, 오후에는 마음에 드는 숲이나 바닷가를 찾아 자연 속에서 잠시 업무를 보고서는, 저녁때에는 원격으로  사업을 조금씩 키워나간다. 주말이면 글도 써보고,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해 먹는 .  소신에 따라, 나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나는 너무 행복한 .


이 글을 쓴 지로부터 일년이 지났고, 저는 여전히 바이크 위에서 (이제는 2개가 )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유유자적 태국에서 살고, 여행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


아침부터 이런 몽글몽글한 호사라니

나는 남들과 약간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는 나를 바꾸지 않겠다는 선택. 언제나 내가 행복한 것을 선택하겠다는 다짐.


나는 사회가 그어놓은  밖으로 나왔고, 사람들이 오지 않은 길에서  세상은   푸르고, 여유로웠으며, 가끔은 힘들어도 공기만은 달았다는  알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만약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정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대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말이다.


비록 우리 엄마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오늘 나는 행복에 조금  가까워졌다고, 그럼 그걸로  거라고 내심 만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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